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북양수군의 패망: 이홍장(李鴻章)과 옹동화(翁同龢), 누가 원흉인가?

중은우시 2019. 5. 12. 23:58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최초의 근대화 해군함대로서, 북양수군은 이 오래된 제국의 무수한 희망을 안고 있었다. 자료를 보면, 북양수군은 주로 전함이 크고 작은 25척이 있었고, 보조군함이 50척 있었으며, 운수선이 30척, 관병이 4천여명 있었다. 당시 세계9위, 동아시아1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갑오년의 청일전쟁때 북양수군은 전멸한다. 가슴아픈 일이지만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북양수군의 전멸을 가져온 죄인은 도대체 우구일까? 기실 그 원흉은 아주 청렴하고 좋은 늙은이이다.


북양수군이 패망한 원인에 관하여 역사상 여러가지 분석이 있다. 전쟁에서 보여준 것을 보면, 북양수군은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비록 일부 쥐새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인 블라디미르가 <청일전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평가한다. "중국해군은 육군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우수했다" 기실 블라디미르의 이런 평가는 두 방면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첫째, 정여창, 유보첨, 등세창등 전투가 여의치 않을 때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지 않고, 혹은 전사하거나 혹은 자결했다. 고금중외에 몇 개의 함대의 장수들이 이 정도로 비장했던가?


둘째, 황해대전에서, 일본의 요시노호(吉野號)가 120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지만, 대청의 군함은 실질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대청함대는 요시노호, 히에이호(比睿號), 후소우호(扶桑號)등 일본의 여러 전함에 크게 손상을 입힌다. 관병의 훈련수준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므로, 북양수군의 전멸원인은 많다. 이홍장의 전략이 명확치 못했고, 육군이 일사천리로 궤멸하였고, 반간계를 너무 무시했고....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청렴하고 좋은 늙은이가 있어서 북양수군이 1888년 건립된 이래로 전함 한 척, 대포 하나를 추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좋은 늙은이가 바로 옹동화이다. 광서제의 스승이다. 청일전쟁때 그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청나라말기의 정계는 명나라말기와 비슷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당쟁이 심각했다는 것이다. 즉 제당(帝黨)과 후당(后黨)의 다툼이다. 옹동화는 제당을 대표하고, 이홍장은 후당을 대표한다. 이 양자는 권력을 다투기 위해 자주 명쟁암투를 벌였다. 그리고 증국번과 이홍장이 옹동화의 형인 옹동작(翁同爵)을 고발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옹동화와 이홍장 간에는 풀수 없는 가족간의 원한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옹동화와 이홍장은 숙적이다. 서로 도저히 풀 수 없는 은원관계가 있다. 이홍장에 이로운 것은 옹동화가 반대한다. 이홍장에 불리한 것은 옹동화가 추진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말기의 당쟁처럼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파의 이익을 위하여 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때, 옹동화를 우두머릴 하는 제당은 회군(淮軍)의 장수들과 북양수군의 장수들에 대하여 섭사성(聶士成)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탄핵을 한다. 그리고 실제와 동떨어진 독전도 있었다.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탄핵을 한다. 그러니 장수들이 어떻게 싸우겠는가?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옹동화가 호부상서로 있는 동안, 북양수군의 발목을 곳곳에서 잡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북양수군의 군함구입경비를 유용한 것이다. 비록 군함구입이 국가에 이로운 일이지만, 이홍장에게 유리한 것이므로 옹동화는 거절한 것이다. 서태후가 군비를 유용하여 이화원을 수리한 것에서 옹동화가 했던 역할을 보면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이다.


1891년 호부상서 옹동화는 상소를 올린다: 해군의 규모가 이미 갖추어 졌고, 국가의 재정도 부족하니, 북양수군이 새로 '군함, 대포, 군수물자'를 추가구입하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 군함은 말할 것도 없고, 대포와 군수물자까지도 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북양수군은 곤경에 처한다. 심지어 양질의 석탄조차도 쓸 수가 없었다. 부품을 교체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일본해군은 급속히 성장한다.


조정에 과연 돈이 없었을까? 기실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2000여만냥의 해군경비가 있었고, 그것을 서태후는 이화원을 쉴하는데 썼고, 60세생일을 축하하는 비용으로 썼다. 서태후의 유용에 대하여, 옹동화는 즐거워했고, 이홍장은 반대의견을 말하기 힘들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입을 닫았다. 오로지 전호부상서 염경명(閻敬銘)만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가, 서태후의 미움을 사서 삭탈관직되고, 옹동화가 다시 호부상서에 오른다.


옹동화는 호부상서에 오른 후 서태후의 뜻에 모두 따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옹동화가 제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서태후의 뜻에 따랐을까? 기실 아주 간단하다. 그중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 돈을 이홍장에게 주게 되면 이홍장의 실력이 크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화원을 수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옹동화의 제자인 왕백공(王伯恭)은 <권려수기>에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옹동화는 해군경비 2000만냥으로 이화원을 수리하고, 500만냥으로 삼해(三海)를 수리했고 한푼도 남기지 않았다. (조정에 주청하여 결정하기를) 5년간 북양함대에 선박하나 대포하나 추가할 수 없도록 했다(不得添一船一砲)"


북양수군의 낙오에 대하여 영군인이 건의를 한다. "반드시 쾌속함정 2척을 추가시켜야 한다. 그래야 일본을 대비할 수 있다." 이 건의는 자신의 상품을 프로모션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래도 탁견임은 분명하다. 유감스럽게도, 옹동화가 반대하여, 결국 2척의 쾌속함정은 일본이 구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중의 1척이 바로 요시노호이다. 이 배는 청일전쟁때 대청함선을 가장 많이 침몰시킨 전함이다.


결론적으로, 북양수군의 함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옹동화는 한푼도 내려보내지 않는다. 새로운 전선을 구매할 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북양함대는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계속하여 최신전함을 구입한다. 그리고 결국 북양함대를 전멸시킨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북양함대 전멸의 원인은 아주 많지만, 옹동화가 그 원흉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옹동화는 개인적인 인품은 나쁘지 않았다. 청렴한 청류정객이다. 화동사범대학 역사학과 세쥔메이(謝俊美)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옹동화의 행동이 어떠했든지간에, 그가 관리로서 청렴했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한다.


기실,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명나라역사를 살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겉으로 청류이거나 청백리이고, 당시 세상사람들에게 모두 인정받는 사람이더라도, 행동거지가 왕왕 이기적이어서, 오히려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