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왕국유(王國維)의 "육불(六不)"

중은우시 2014. 4. 4. 10:47

 

글: 사비상(史飛翔)

 

 

 

국학대사 왕국유는 학문을 하는데 아주 엄격했고,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일생동안 그와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1909년, 왕국유는 경사도서관의 편집을 맡는다. 나중에 <국학총간>의 기초선언(起草宣言)을 쓰는데, "학술에는 새 것과 옛 것의 구분이 없고, 쓸모있고 쓸모없고의 구분도 없다." 이것은 왕국유의 순수학술연구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학술을 발달시키려면 반드시 학술을 목적으로 보고 수단으로 보지 않은 후에야 가능하다."

 

왕국유는 26세에서 30세의 기간동안 4번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마란다: "철학의 바다는 너무 깊어서 알기가 어렵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왕국유는 <상서>, <시경>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연구한 수준의 깊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만, 왕국유는 매번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항상 먼저 4,5군데 자신이 아직 잘 모르는 데가 있다고 하였다. 언어학자 왕력(王力)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청화국학연구원에서 첫번째 수업을 받은 것이 왕국유의 <시경>이었다. 왕력은 말한다. 왕국유의 이 <시경>과목은 아주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견해는 깊이있고, 뛰어났으며, 강의방법도 신선하고 알아듣기 쉬웠다. 왕력이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느끼는 바와 얻는 것이 많았다. 다만 왕력은 발견한다. 매번 어떤 문제에 대하여 얘기할 때면, 왕국유는 자주 "이건 내가 모른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떤 때는 수업 한번 하면서 여러번 "내가 모른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 왕력은 왕국유가 왜 "내가 모른다"는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것은 대사의 신분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왕국유와 접촉이 많아지면서, 왕력은 점점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왕국유의 치학(治學)이 엄근(嚴謹)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모르면서 아는 척할 필요가 없고,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일 필요가 없다.

 

기실, 약간만 분석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왕국유 선생이 말한 "모른다"는 것이 진짜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수업이 끝난 후, 학생이 그가 '모른다'고 말한 부분을 물으면, 그는 자신의 견해를 얘기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그가 수업시간에 말한 '모른다'는 것은 첫째, 입언(立言)의 근신(謹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그의 견해가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않아서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학생들에게 독립적인 사고의 능력을 배양하고, 실사구시의 치학태도를 배양해주기 위해서이다. 학실들이 아직 정론이 나오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탐색하고 연구하도록 격려한 것이다. 왕국유의 학술에 대한 이런 엄숙, 진지, 겸손, 무실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의 일부 권위자로 자처하고, 걸핏하면 큰소리치며, 전지전능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소위 '전문가'들보다 얼마나 대단한가.

 

왕국유는 성격이 담백했고,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청화대학에 있을 때, 수업을 가르치는 외에, 그는 일반적으로 앞장서서 학생들과 얘기하지를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가버리고, 자신의 서원(西院) 거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재에 쳐박혀서 학술연구에 골몰했다. 다만 만일 누군가 집으로 찾아오거나 서신을 보내오면, 그것이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건 아니면 논쟁을 하는 것이건 그는 항상 열정적으로 맞이했고,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고, 노소,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 것은 모두 말했다. 한번은 '역사학회'의 다과회에서 어떤 학생이 간행물을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왕국유는 즉시 일어나서 반대한다. "간행물을 낼 필요는 없다. 너희같은 나이에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글은 조금만 써라. 설사 썼더라도 발표할 필요는 없다." 왕국유는 청화 국학원에서 교수로 있을 때, 그의 학샐들에게 "육불"을 요구했다.

 

- 불방언고론(不放言高論): 고담준론을 하지 않는다.

- 불공격고인(不攻擊古人): 고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 불의론타인장단(不議論他人長短):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거론하지 않는다.

- 불취허(不吹噓): 허풍떨지 않는다.

- 불과연박(不夸淵博): 박학다식하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 불초습타인언론(不抄襲他人言論):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베끼지 않는다.

 

왕국유의 이 "육불"은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본받아야할 의미가 있다.

 

왕국유의 치학은 엄근하다보니 사람됨이 어쩔 수 없이 딱딱한 점이 있다. 왕국유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학문을 얘기하거나 정사(正事)를 얘기하는 외에 다른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더구나 다른 사람에게 듣기좋은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고동기(古銅器)를 봐달라고 하면, 그가 보기에 가짜이면 바로 '믿을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를 불러서 봐달라고 한 사람이 고동기의 색이 어떻고, 얼마나 고아하고, 청록하고 얼마나 영철(瑩徹)하며, 문자는 얼마나 정치(精致)한지, 어떤 책에 어떤 유사한 내용이 있다고 얘기하면서, 그 책들을 그에게 보여주며 참고하게 하며 다시 한번 자세히 봐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통융(通融)할 줄 안다. 그러나 왕국유는 본 후에도 여전히 '믿을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 부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박하지도 않는다.

 

왕국유가 청화국학연구원에 있을 때, 매일 집에서 나와 연구원에 가려면 이화원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일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이화원에 들어가서 유람한 적이 없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오면서 이화원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수년후인 1927년, 그는 결국 이화원에 들어간다. 단지 이번에는 유람이 아니라, 이화원의 곤명호에 몸을 던져 자결하기 위하여, 일거불부반(一去不復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