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군(賈珺)
십홀원은 '숙춘원(淑春園)'이라고도 불린다. 북경 해정구에 위치하고 있고, 명학원(鳴鶴園)의 남쪽에 있으며 화신의 교외사원(郊外賜園) 즉 황제에게 하사받은 장원이다. 예친왕 소련의 <숙정잡록>에 따르면, 건륭,가경시기 모든 왕공대신의 서교(西郊)에 있는 화원(花園)들 중에서 십홀원은 공인된 제일명원(第一名園)이었다. 가경4년(1799년) 화신은 죄로 인하여 사사당한다. 그에게는 20가지 대죄가 씌워졌는데, 그중 13번째 죄목이 바로 화신이 화원을 건설할 때 원명원의 봉화요대를 모방하여, 엄중하게 봉건등급제도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십홀원이다.
십홀원은 점유면적이 500무(1무는 200평)가 넘는다. 당시 화신의 가산을 몰수한 목록을 보면, 모두 1004간의 건물, 357간의 유랑누정(遊廊樓亭)이 있어, 규모가 거의 황가원림에 비견할 만하다. 화신의 아들인 풍신은덕(豊伸殷德)은 건륭제의 딸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를 취했으므로, 가경제는 이 화원을 몰수한 후, 서쪽 절반부분을 여전히 공주와 액부(額附, 부마)에게 하사하여 거주하게 해준다. 동쪽 절반부분은 건륭제의 11째황자인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에게 하사한다.
도광연간에 이 정원은 예친왕(睿親王) 인수(仁壽)에게 하사한다. 명칭은 "예왕원(睿王園)"으로 불린다. 만주어로는 "묵이근원(墨爾根園)"이다. 함풍10년(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할 때, 예왕원도 엄중하게 훼손된다. 게다가 동치연간에 원명원을 중수할 때, 다시 예왕원의 잔여 건축목재를 가져가서, 그 경관이 더욱 황량해진다. 나중에 예친왕의 후손인 덕칠(德七)이 이 화원을 계승한 후, 경제적 곤란으로 건물을 허물고 나무를 판매한다. 심지어 화원에 농경지를 만들기도 한다. 민국초기인 1912년, 이 화원은 군벌 진수번(陳樹藩)에게 팔려서, 이름이 "이근농원(肄勤農園)"으로 바뀐다. 1920년대, 사도뢰등(司徒雷登)이 폐허가된 이 화원을 매입한 후, 이곳을 연경대학(燕京大學)의 캠퍼스로 삼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후, 이곳은 북경대학 캠퍼스의 일부분이 된다. 오늘날의 미명호(未名湖)일대가 바로 옛날의 십홀원 부지이다.
전체 화원은 분산된 수계(水係)를 골격으로 하여, 서부는 못과 해안이 곡절이 있고, 물과 육지가 교차하며, 동부는 큰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3개의 섬을 두었다. '일지삼산(一池三山)"의 경관이다. 아마도 고대 전설상의 동해 봉래, 방장, 영주의 '삼대선산'을 모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명원의 봉래요대의 주제와도 일치한다. 십홀원의 수경은 변화가 많고, 지금도 유적에서 여전히 각종 수만(水灣), 곡계(曲溪), 호박(湖泊)의 형태를 엿볼 수 있다. 걸어갈 때마다 경치가 달라지니 그 수법이 고명하다.
화원의 주요 건물은 중부의 남쪽 위치에 세워져 있다. 호수의 남쪽 큰 섬에는 자제사(慈濟寺)라는 작은 절이 세워져 있다. 민간에서는 "화신묘(花神廟)"라고 부른다. 건물의 북쪽에는 벽돌구조의 묘문(廟門)이 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연못의 북쪽에는 석방(石舫) 즉 돌배가 있다. 그 위의 선창은 이미 없어졌고, 돌의 바닥만 남아 있다. 미명호의 호안에는 지금도 4개의 석병풍(石屛風)이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두 폭의 대련이 쓰여 있다. 한 폭은 "화방평림평안활(畵舫平臨萍岸闊)), 비루부영유음다(飛樓俯映柳陰多)"이고, 또 다른 한폭은 "협경광징풍사면(夾鏡光澄風四面), 수홍영계수중앙(垂虹影界水中央)"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이것이 석방의 원래 구성부분일 것이고, 묘사한 것은 주위 수면과 호안의 아름다운 풍광이다.
당시 화신이 화원에 부춘루(富春樓)를 지었다. 전설에 따르면 누각 안에는 서양에서 수입한 자명종을 놔두었다고 한다. 아침에 종소리가 울리면, 원내의 각곳에 거주하는 희첩들이 일어나서 화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부춘루의 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호석(湖石)이 있는데, 하나는 직립해 있고, 하나는 측와(側臥)해 있다. 모두 북경서쪽의 방산(房山)지역에서 가져왔다. 길이는 1장이 넘고, 형태가 아주 아ㅍ름다웠다. 성친왕 영성은 석공에게 돌 위에 '영통장인(永通丈人)'이라는 글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이 돌을 그림으로 남기게 했다고 한다. 광서연간에 이화원을 중수하면서, 십홀원 부지의 큰 돌을 인수전(仁壽殿)의 앞으로 옮겨가서 전시했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옛날의 '영통장인'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십홀원의 부지는 현재 북경대학교의 핵심지역인 연원(燕園)의 소재지이다. 호안에는 옛날풍격을 본뜬 교학루가 세워져 있어, 옛 화원의 풍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쪽호안에는 요나라때 불탑모양을 본뜬 박아탑(博雅塔, 水塔)이 있다. 미명호, 도서관과 합쳐서 "일탑호도(一塔湖圖)"를 이룬다(一塌糊塗와 발음이 같다). 현재는 북경대학의 대표적인 경관이 되어 있고, 이미 전국중점보호문화단위가 되어 있다.
'중국의 지방 > 북경의 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이징의 노자호(老字號) 육필거(六必居)의 현액(懸額)은 엄숭(嚴嵩)이 썼을까? (0) | 2020.06.11 |
---|---|
명청(明淸)시대 북경의 창(倉)과 고(庫) (0) | 2019.12.31 |
이현친왕릉(怡賢親王陵): 지금은 폐허가 된 윤상(允祥)의 묘 (0) | 2019.01.13 |
몰락한 외삼영(外三營) (0) | 2019.01.09 |
자금성(紫禁城) 융종문(隆宗門)의 화살촉(箭頭) (0) | 2019.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