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는 왜 6번이나 강남으로 내려갔는가?

중은우시 2018. 2. 4. 00:47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 300년역사중에서 단지 2명의 황제만이 6번 강남을 내려갔다. 한 명은 강희제이고, 다른 한명은 그의 손자인 건륭제이다.


강희제가 강남으로 6번이나 내려간 것은 국계민생을 위해서였고, 적지 않게 실질적인 일들을 했다. 그러나, 건륭제가 6번 강남으로 내려간 것은 비록 겉으로 내세운 것은 민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의 목적은 놀기 위함이다. 거의 제대로된 일은 하질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놀기위한 것이라면 어디서 놀아도 된다. 왜 하필이면 천리 먼 강남까지의 길을 힘들게 6번이나 내려갔을까? 기실 원인은 단지 3가지 정도일 것이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살펴본다.


첫째, '조부를 닮고 부친을 닮은 것이 아니다'라는 개인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현재의 일부 전문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강희제가 옹정제에게 황위를 넘겨준 것은 바로 옹정제의 아들인 홍력(나중의 건륭제)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륭은 일생동안 할아버지 강희를 본받으려고 했고,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예를 들어, 강희제는 농업을 중시하고 치수사업을 벌였다. 건륭제도 해당 4천여장을 돌로 쌓도록 했다. 건륭제는 교육을 중시해서 <강희자전> <패문운부> <청문감>등 전적을 편찬한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한다: 강희제는 몽골을 친정하고, 대만을 수복했다. 건륭은 서쪽으로 병력을 보내어 신강을 개척한다; 강희제는 강남으로 6번을 내려갔고, 건륭도 딱 6번 내려간다; 강희제는 61년간 재위했는데, 건륭도 60년간 재위하고는 아들(가경제)에게 넘겨주고 태상황이 된다. 이는 조부를 넘어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강희제는 학식이 깊고 넓어서 중국과 서양을 관통한다. 건륭은 자신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시를 열심히 짓는다. 일생동안 4만수의 시를 지었다.


그렇다면 건륭은 왜 부친 옹정을 배우지 않았을까? 옹정은 재위기간동안 정무에 근면했고, 적폐를 일소한 뛰어난 황제였다. 동시에 팔만이천냥 백은을 그를 위하여 남겨놓았는데도. 기실 간단하다. 왜냐하면 옹정제는 이렇게 혁신을 하느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원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옹정제는 너무 엄격하고 잔혹했으며 시기심이 많고 의심이 많았고, 각박하며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고 하여 명성이 아주 나빴기 때문이다.


둘째, 국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십전(十全)"공적을 널리 드러내고자 했다.


강희제가 6번 강남으로 간 것은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였다. 그는 요란하게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지 않았고, 지방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본인도 비교적 근검절약했고 돈을 많이 쓰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은 달랐다. 6번 강남으로 가는데 그 기세가 대단헸다. 매번 만명이상이 움직였고, 2년까지 길게 다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치의 극을 달렸고, 지방에서의 공급도 아주 장관이고 화려했다. 그가 쓴 돈은 강희제의 몇배도 넘었다. 대신 윤회일은 일찌기 상소를 올려 민간이 힘들어하고 원성이 길에 가득하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건륭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호대희공(好大喜功)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친 옹정이 남겨놓은 국고를 두번 준가르를 평정하고, 회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금천을 소탕하고, 대만을 평정하고, 버마와 안남의 복속을 받아내고, 구르카를 항복시키고, 무력과 위명을 사방에 떨쳐서 태평성대의 왕조를 건립하는데 썼다.


강남으로 남순하는 기회에 조정의 재력을 뽐내고, 황실의 위엄을 수립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건륭제는 '십전'의 업적을 지닌 개세의 황제라는 것을 알게 하려 했다.


셋째, 후궁의 엄격한 법도를 벗어나서 성자유를 추구했다.


청나라황제의 부부생활은 전문적인 기구에서 관리했다. 경사방(敬事房)이다. 그 최고책임자는 경사방태감이다. 그의 임무는 바로 황제와 후궁의 부부생활을 안배하는 것이고, 이를 가지고 수태의 증거로 삼았다.


이런 제도는 황제에게 여러가지 제한을 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패를 고르지 사람을 고르지 못한다. 모든 비(妃)는 1장의 패가 있다. 황제가 어느 비를 고르고 싶으면 반드시 그 패를 골라야 한다. 그런데 왕왕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고르지 못하기도 한다. 그외에 시간상으로도 제한이 있었다. 매번 황제와 비가 부부생활을 할 때, 태감이 문밖에서 기다린다. 시간이 되면 태감이 소리친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후에 비를 등에 업고 나가버린다. 마지막으로 황후의 간섭도 받는다. 황제가 어느 비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면, 반드시 황후의 문건을 그 비에게 먼저 통보해야 한다. 문건에는 황후의 인장을 찍어야 비로소 유효하다. 만일 이 문건이 없으면, 황제는 그 비의 문앞까지 갔더라도 들어갈 수가 없다.


건륭제는 원래 풍류를 좋아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법도의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공연히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를 어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떡할 것인가?


그는 한편으로 돈을 많이 들여서 황가원림을 만들었다. 이화원, 원명원, 피서산장, 목란위장등등. 그 후에 거기 안에서 살면서 마음대로 놀았다. 다른 한편으로 강남을 순유하는 기회에 마음대로 놀았다. 그래서 지금도 강남일대에는 건륭황제의 풍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