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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중일관계의 역사원류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유사하(流沙河)


[이 글은 2014년 12월 28일, 유사하가 성도 만상서성 서서불서점에서 한 강연이다. 유사하는 정말 당세의 살아있는 보물이다. 그의 박학한 역사지식과 깊이있는 인문견해는 전체강의동안 조용하게 만들었고,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녹음된 글이다(판권은 서서불에 귀속된다). 오탈자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일부 고문자와 편벽한 전고는 그러하다. 선생은 최근 들어 시력이 떨어져서 차마 교정을 봐달라고 부탁하질 못했다. 그래서 본문을 읽는 친구들의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하자가 옥을 가릴 수는 없다. 이글은 얻기 힘든 지식의 글이고 지혜의 글이다. 하삼외(何三畏) 씀]


신화전설에서 우리가 쓰는 동서남북의 "동(東)"은 '목(木)'자의 중간에 '일(日)'자를 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바로 동쪽이다. 해가 뜰 때, 중국 원고시대의 동쪽바다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우리의 조상은 전설을 남겨 두었따. 전설에 따르면, 동해의 끝에는 아주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는 '포(蒲, 소리로)'이고 그 뜻은 거대하다는 것이다. 태양은 바로 그 곳에서 뜬다. 하늘에는 모두 10개의 태양이 있는데, 나무의 꼭대기에 도착하면 동방에서 서방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하나의 전설이다.


두번째 전설은 00이다. 또 다른 나무이다. 이름은 작목(柞木)이라 한다. 이것도 아주 큰 나무이다. 위에는 꽃이 가득 피어 있고, 아주 예쁘다. 그래서 중원지구에서 동쪽으로 쳐다보면, 동방의 태양이 떠오르는 곳에 있는 붉은노을(彩霞)이 바로 작목의 나무에서 핀 꽃이다.


고대의 책에서 환원한 것은 일출부산(日出富山)이다. 아래에는 뽕나무(桑樹)가 있고, 깊은 계곡이 있는데 양곡(陽谷)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최초 전설에서의 일본이다. 그래서 나중에 일본을 '부산'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부산의 전고는 나중에 중국문화에 전래되어, 계속 사용된다. 나중에는 일본을 비유하는 것으로 쓰인다.


중일양국이 처음으로 교류한 것은 동해에서이다. 일본은 중국을 '일락국(日落國)'으로 부른다. 중국은 일본을 '일출국(日出國)'으로 부른다. 이것은 원고전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따져보면 이는 중국이 명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신화고사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본'인가. '본'은 바로 그 나무의 뿌리이다. 일본의 뜻은 그들이 부산의 나무 뿌리애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일출국'으로 불렀다. 그들은 중국을 '일락국'이라고 불렀다. 일본이라는 그 위치에서보면 태양은 서쪽으로 진다. 바로 황하유역의 화하지구로 진다.


중일양국은 피차간에 모두 아주 존중했다. 그리고 그 때의 중국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을 명명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일출의 나라이다. 어떤 국가는 자신의 이름이 없다. 그러면 중국에서 지어주었다. 원래 중국은 광서를 '백운(百雲)'이라 불렀다. 그들은 광서의 남쪽을 '월남(越南)'이라 불렀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쓰인다. 그들의 영문명칭은 우리가 그들에게 지어준대로이다.


다만, 이것은 모두 지나간 일이다. 우리가 항상 이런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성적으로 큰형님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이후 중국이 일본과 중단없이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수나라때부터이다. 나중에 당나라때 장안성에는 많은 일본유학생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문화는 아주 낙후되어 있었다. 화하문화 특히 유가문화는 그들 유학생을 통하여 일본에 전해진다. 당나라때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한 일본유학생이 장안에서 책을 읽은 후 당나라정부에서 일을 했고, 당나라의 관리가 된다. 이백은 그와 교분이 있었다. 나중에 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복건 천주에서 배를 타고 돌아간다. 배가 동해로 가다가 뒤집어 져서 바닷물에 빠져 죽는다. 이백은 또한 "곡조경(哭晁卿)"이라는 시를 썼다. 그는 중국에서 관리로 있으면서 성을 '조'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좋은 시이다. 그리고 전고에서 쓴 것은 요순의 순(舜)이다.


결과 나중에 몇년이 지난 후 이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배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백의 이 시는 남아있게 된다. 이는 중일양국간의 최초의 기념품이다. 그리고 아주 우호적이다. 당초, 일본이 유학생들은 아주 진지하게 유가문화를 습득한다. 그들중 많은 사람은 사서오경에 통했을 뿐아니라, 당시를 쓸 줄 알았고, 당나라사람들을 모방하여 시를 썼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에, 일본천황이 아주 중시했다. 그래서 그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다. 그가 떠날 때, 일본천황은 시를 써서 그에게 준다. 이를 보면 그들이 공부를 아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언제까지 중국과 일본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피차간에 아주 우호적으로 지냈을까?


언제 문제가 발생하였을까? 나중에 항해기술이 발달한 이후, 큰 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선원이 십이성좌를 알게 되면서, 천문상식이 생겼다. 이를 이용하여 항해할 수 있게 되며 거리가 가까워진다. 가까워지자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원나라 초기에 생긴다. 칠만해군이 일본을 공격한다. 이는 남을 침략한 것이다. 중국인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나라는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에서 중국이라는 이 토지는 유라시아대륙의 일부분이 된다. 중국은 망했고, 또 다른 비농경민족이 왔다. 유목민족은 말을 잘 탄다. 이런 민족은 천성적으로 침략의 야심이 있고, 악의적으로 확장한다. 이는 역사적인 일이다. 미화할 필요가 없다. 혈통으로 보면 필자 본인은 몽골인이다. 나는 알고 있다. 유목문화는 중국의 고도로 발달한 국가 즉 송나라를 멸망시킨다. 송나라는 중국의 유사이래 문명정도가 가장 높고 송나라는 일찌기 중국에서 지구상 유일하게 문명정도가 아주 높은 왕조를 만들었다.


유목민족이 중국을 멸망시킨 후, 일본도 멸망시키고자 한다. 하카다만에서 상륙하려 할 때 돌연 태풍이 분다. 칠만해군이 전멸한다. 만일 상륙했다면 역사는 새로 쓰여졌을 것이다. 일본은 그때 아주 낙후되어 있었다. 무슨 우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대대로 육백여년전의 그 해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태풍을 '카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2차대전때 일본의 공군 '결사대'는 비행기로 미국의 군함에 부딛쳐 갔는데 모두 '카미카제'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이런 관념은 그들에게 영향이 아주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이 그들을 보우하여 그 대적을 무찔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토지의 인민은 바로 이때부터 모순이 생긴 것이다. 많은 것들은 멀리서 보면 아주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서로 의사소통하기 어렵고 서로 융합하기 어렵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역사는 중화문명에 많은 문화이상과 유가의 관념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일본에 준 모든 것은 고대문화이다. 세계는 진보한다. 영원히 고대에 머물 수는 없다. 영원히 유가문화로 한 국가를 통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중에 중국 자신도 유가문화로 사회를 관리할 수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때의 주순수(朱舜水)는 유가문화를 일본에 전해준다. 일본은 아주 감격하여, 일본국민은 많은 곳에서 그를 기념한다. 왜냐하면 주순수가 사서오경을 전해주었을 뿐아니라, 유가의 관념을 가져다 주었으며 모든 농경지식도 가져갔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일본의 맷돌도 주순수가 가져간 것이다,


진정 일본에 가장 중요한 문화를 가져다 준 것은 미국선장이다. 철갑선으로 일본의 대문을 열어제꼈다. 일본이 이전에 접촉한 것은 중화문화로 폐관쇄국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때 시장이 필요했고, 일본이 문을 걸어닫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거렁뱅이 정권때부터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이 있었다. 외국선박을 상륙하게 해서는 안된다. 미국군함이 상륙할 수 없자 포를 쏜다. 일본은 방법이 없었고, 미국군함은 상륙한다. 그후 외국문화가 일본에 전해진다. 이는 근대사회의 계몽문화가 이 군함이 강제로 일본을 열고 전해지게 된다. 일본은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결국은 받아들인다. 바로 이 국문이 열렸으므로, 나중에 메이지유신이 있고, 메이지유신이 있어서 일본은 근대화되고, 나아가 현대화된다. 그래서, 사실이 그렇다. 미국인들에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많지 않지만, 아주 쓸모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이 가져다 주었지만, 모조리 흘러가는 물처럼 없어졌다.


중일양국이 지위상 역전된 것은 이때이후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 관념이 바뀌어 문맹을 없애고, 큰 걸음으로 전진한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그런 안목이 없었다. 머리가 없고, 안목이 없었다. 이는 모두 폐관쇄국으로 조성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전하는가. 우리의 황금시간은 이들 통치자들때문에 놓치고 만다. 역사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광망자대하여, 일본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된다.


중국의 관리제도는 아주 부패했고, 아주 관료주의적이다. 일본은 심지어 그때 어떤 학자는 글을 써서 중국이 중국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중국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화하문화가 있는 곳이 바로 중국인데, 화하문화는 자신들에게 있고, 중국에는 없고 타락했다고 하였다. 그때의 중국통치자는 어찌 이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중일양국간에 발생한 충돌이다. 일본은 확실히 소홀했다. 문화에 대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충분하지 못했다. 일단 서방문명을 받아들인 후, 사회가 진보한 후, 국력이 강해진 후, 스스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중국을 멸시하는 주장들이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일본인이 중국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중국인을 '지나인'이라 부르는데, 그 '지나'라는 명칭은 최초에 중국을 차별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나'는 일본이 지어준 말이 아니다. 중국이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다. 3천여년전 고인도에서 당시의 중국 상나라를 지나라고 불렀다. 지나의 뜻은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나라의 문화때문이다. 다만 나중에 중국의 통치자들은 안목이 없고, 스스로 기회를 잃어버리고, 또한 문을 걸어잠그고 자기가 잘난줄 알게 된다. 또한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다. 이것은 아주 역겨운 일이고, 완전히 암덩어리이다. 이렇게 계속하면 언제야 깨어날 것인가.


이는 중일간에 마침내 전쟁을 불러오게 된다. 일본인은 충분히 준비를 하고, 갑오전쟁(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의 선박은 대청국만 못했다. 일본의 화포사정거래도 진원호 정원호만 못했다. 다만 한가지 그들은 서방문화를 진지하게 흡수했다. 서방의 과학기술을 흡수했을 뿐아니라, 그들의 윤리도덕, 철학을 흡수한다. 그들은 진정한 근대화를 이룬 것이다. 중국은 단지 기술만 흡수하는데도 조정의 저지를 받는다. 서방의 문화, 철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중국은 맹목적이 된다.


본인은 서태후를 욕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그녀가 돈을 가져다가 이화원을 수리하는데 쓰고, 이화원은 현재 매일 국가에 돈을 벌어다준다. 다만 일본은 새옹지마이다 어느 것이 복이고 화인지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은 중국이 세계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진보이고, 따라가지 못하면 낙후이다. 낙후는 우매이고 우매하면 멸시받는다. 멸시하면 칠 수도 있다. 그리고 일본이 당시 2차대전을 발동할 때, 당시 일본은 2차대전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 남하한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일부 정치인은 적극적으로 일본인을 영접했다.


일본은 그들이 선진사회라고 여긴다. 너희는 개방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너희를 개방시키겠다. 그것이 너희를 해방시킨다. 이것이 일본의 생각이다. 나 본인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일본은 그들의 선진관념을 전파할 때 문화에 의존하거나, 경제에 의존하지 않고, 무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정확한지 아닌지만 묻고, 그 수단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본은 당초 아주 악랄한 수단으로 우리를 대했다. 선의를 가지고 우리를 도운 것이 아니다. 일본인과 명나라초기의 일부 지식인들은 모종의 비슷한 관념을 지니고 있다. 즉 편면적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여, 세계는 무궁하고, 모두 죽어라 싸우고, 힘이 세면 힘이 약한자에 이긴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있으므로 일본인은 그들이 힘이 세다고여기고, 그들이 선진을 대표한다고 여긴 것이다 .중국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고, 제국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대전이 일어난다.


일본은 지나칙 급공근리(急功近利)했다. 그들이 말한 천황제는 그들이 2차대전을 발동하기 전에 완전히 군인정권으로 변모한다. 일본은 이전에 다당파가 있었다. 군인이 정치에 접촉하면 일본 내부의 일부 사상 관념을 모조리 말살할 뿐아니라, 공산당인을 체포한다. 그래서 청일색(淸一色)의 군인통치가 된다. 이렇게 수단을 가리지 않으면 비록 그가 관념상으로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하더라도, 관념이 앞서있다고 하여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만일 수단이 아주 알랄하다면 그것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왜 2차대전때 중국은 그렇게 많은 패전을 당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천에서 나간 장정 3백만 중에서 60만이 죽었다. 외성도 그렇게 많은데 중국은 일본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 사병의 자질도 그들만 못했다. 내부의 기율, 통일성도 그들만 못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패배해도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패는 바로 중화민족을 각성시켰다. 그래서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서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고대문화와 결별하고 국문을 열었다. 결국은 일본도 이득을 얻지 못하고, 두 개의 원자폭탄에 그렇게 참혹하게 패배한다. 그래서 많은 것들은 거리미가 있다. 멀리서 보면 좋고, 가까이 가면 좋지 않다.


지구는 갈수록 작아진다. 이웃간에 과거에는 바다가 있었는데, 현재 이 두 개의 국가는 어떻게 되었는가. 본인이 느끼기로 모든 것을 감정대로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중일양국의 모든 인민과 통치자들은 한 가지 과제에 새로 직면하게 된다. 즉 어떻게 하여야 좋은 이웃이 될 수있느냐이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은 아주 골치아프다. 일본은 어떤 때는 그들의 신사를 참배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그들 국가의 신앙이지만, 다만 이웃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만 한다. 고의로 시위해서는안된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이웃이 아니다.


우리는 무슨 민족주의를 가져서는 안된다. 민족주의라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3천여년전에 일찌기 요순우 이전에, 우리의 원고에 있었떤 진정한 성인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는 아직 주(周)왕조도 없었다. 그때는 아직 나라도 없었다. 그 추장을 후세에 "태왕(泰王)"이라고 부른다. 당시에는 "담호(膽虎)"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모범을 보였다. 어떻게 이웃과 잘 사는지.


당초의 근거지는 섬서였다. 그는 그 곳에서 농업을 발전시킨다.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이었다. 그는 지도자이면서 농학가였다. 많은 새로운 품종을 길러낸다. 그래서 이 추장이 통치하는 곳은 '주(州)'라고 부른다. 아주 작았다. 당초 이 추장은 별로 대단하지 않았고, 당초에 농업을 발전시킬 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이다. 당시 그의 주변은 모두 야만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작물, 가축과 재산을 빼앗으러 왔다. 이 '담호'는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뇌물을 바친다' 최초에는 이웃에게 소,양, 가축을 보낸다. 나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웃이 다시 영토를 침범한다. '담호'는 금은보화는 안되자 마지막에는 예쁜 여자를 보내준다. 그래도 그들은 또 왔다.


마지막에 주위의 소수민족의한지도자가 직접 그에게 더 이상 선물을 보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너의 이 땅이라고 말한다. 이 추장은 나는 우리의 구성원들을 대표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나의 부락에는 3천명의 구성원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대표할 권리가 없으니 돌아가서 회의를 열어야 겠다고 한다. 그후에 그는 부락의 사람을 모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본다. 사람들은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무력이 이렇게 강하니, 아예 그들을 토벌해버리자고 한다 '담호'는 한가지 결정을 선포한다. 그는 하나의 원칙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는다. 그들이 토지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담호'는 이렇게 말한다. 토지는 하늘이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토지는 원래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토지를 위하여 살인을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180리밖에 기산(岐山)이라는 산이 있다. 기산의 아래에는 작은 평원이 있는데 농지가 아주 좁았다. 내일 아침에 나를 따를 사람은 모두 같이 가자. 다음 날 아침 3천의 남녀노소는 모조리 떠난다. '담호'와 그의 부인이 앞장서고, 그는 바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토지는 가져와서 생명을 기르는 것이고, 토지때문에 생명을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를 내놓은 사람이다.


그는 또 한 가지를 얘기한다. 주위의 이들 소수민족은 우리의 형제이다. 이전에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농업을 장악했으므로 우리는 그들과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다만 이전에 우리와 그들은 마찬가지로 야만인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이다. 그들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두번째는 남아있기를 원하면 너희는 남아서 그들과 잘 지내라. 그러나, 결과는 모두 그를 따라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많은 역사서를 읽었지만, 다른 정치가들 중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본 것은 모두 촌토(寸土)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당초 항일전쟁도 모두 일촌하산일촌혈(一寸河山一寸血)이다. 우리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나라는 강대해졌다. 이미 아시아제일강국이다. 우리는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대국이다. 우리는 오래된 문화가 있다. 성도인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못에 하나의 눈"이다. 나도 투쟁철학을 해설하지는 않겠다. 무슨 침봉상대...그렇게 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


당연히 이것은 어쨌든 우리가 일방적으로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노력도 필요하다. 최소한 아베 신조가 이전에 한 짓은 부적절하다. 그는 반성해야만 한다. 다만 내 생각에 우리가 앞서나갈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반성하지 않으면 그와 싸우겠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투쟁철학이다. 그저 눈앞의 승리를 취득하는 것이고, 장치구안의 방법이 아니다. 중국은 이제 이미 아시아제일대국이다. 즉 우리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소프트파워인가. 이것이 바로 소프트파워이다. 영국인은 돈 한푼도 쓰지 않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했다. 중국인 자신이 그렇게 많은 세익스피어스쿨을 만들고 어릴때부터 ABC를 가르킨다. 영국인은 한푼의 돈도 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소프트파워이다. 돈을 쓰고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소프트파워가 아닌 것이다.


내가 오늘 얘기한 것은 아주 길었다. 왜냐하면 나는 국제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분야에서는 아마추어이다. 왜냐하면 내가 젊었을 때, 시를 약간 썼다. 나이가 들면서 시를 쓰는 것은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전문방향을 바꾸어 고문자를 연구한다. 고문자를 연구한지 이미 십여년이 되었다. 내가 말하는 이것들은 현재와 아무 관계도 없다. 여러분이 저를 인정해주어서 얘기를 해달라고 했고, 그 결과 나는 이런 내용으로 얘기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