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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220

제갈량 vs 이엄 (2): 양자간의 싸움 글: 의사리(衣賜履) 이엄은 원래 유장(劉璋)의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쳐들어왔을 때, 이엄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리하여 유장에게 큰 타격을 준다. 유비는 이엄을 크게 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유비는 이엄을 보내 유봉(劉封), 맹달(孟達)을 따라 상용군(上庸郡, 호북성 죽산현 서남의 전가패)을 공격하게 했다. 그후 이엄은 건위군(사천성 팽산현) 태수에 부임하고, 이어서 두 건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는 그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 따르면, 이엄과 제갈량, 법정, 유파, 이적(伊籍)의 다섯 명은 공동으로 촉한정권의 법령을 정비했다. 이는 이엄이 법률전문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정은 220년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이엄은 개략 건위군태수의 직위에서, 겸직으로.. 2022. 3. 8.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 2022. 3. 7.
유비(劉備)가 놓친 4명의 맹장(猛將) 작자: 미상 동한말기, 유비는 무장으로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위연등 맹장이 있었고, 문관으로 제갈량, 방통, 법정등 모사가 있었다. 이들은 촉한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량이었다. 그리하여, 조조, 손권등 두 제후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휘하에도 인재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비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인재들을 놓쳤다. 필자가 오늘 얘기할 것은 4명의 맹장이다. 이들은 모두 촉한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니, 후세인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1. 전예(田豫) 전예(171년-252년), 자는 국양(國讓), 어양(漁陽) 옹노(雍奴)사람(지금의 천진시 무청구). 출생지로 보면 전예와 유비는 모두 유주(幽州) 출신이다. 그러므로, 동한 말기, 전예는 처음에 유비의 곁을 따랐다. 그러나, 모친이 나이가 많아 항상.. 2022. 1. 4.
관우의 후손이 남아 있을까? 글: 고산(高山)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심심하면 항상 고대의 명인들의 후손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일단 관우의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이 없어진다. 관우의 후손은 그다지 큰 공헌이 없으므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관우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얘기한다. 도대체 관우는후손을 두었을까? 관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동한 삼국시대의 대장이다. 또한 유비와 도원결의한 형제이기도 하다. 관방사서의 기재이건 아니면 역사연의소설의 묘사이건, 관우는 모두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온조참화웅과 천리주단기로 삼척동자도 아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영웅도 죽는 법이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이 .. 2021. 12. 24.
정사(正史)로 본 여포(呂布) 글: 역사춘추망(歷史春秋網) '삼성가노(三姓家奴)'는 여포에게 덧씌워진 최대의 오점이다. 여기에 반복무상(反復無常,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럽다), 배신기의(背信棄義,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유리시시(唯利是視, 이익만 쳐다본다), 용이무모(勇而無謀, 용맹하나 지모가 없다), 애제장부(愛諸將婦, 다른 장수의 처를 좋아했다)등등. 거의 모든 나쁜 말들은 모두 그에게 붙여졌다. 그러나, 정사를 분석해보면, 이 모든 것은 '낙정하석(落井下石,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의 혐의가 짙다. 여포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계속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이용당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짓밟혀 죽었는데, 죽고 난 후에도 천년간 여러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그는 삼국시대 장수들 중에서 가장 비운의 장수라 할 .. 2021. 10. 25.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삼국이 정립된 후, 가장 먼저 건국하여 황제를 칭한 위(魏)는 승상을 두지 않는다. 그후에 건립된 촉(蜀)과 오(吳)는 처음부터 승상을 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오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상을 두었지만, 촉한은 제갈량이후에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위나라. 건안13년 조조가 승상에 오른다. 건안18년에 이르러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고, 기주(冀州)내의 10군은 그의 봉지가 된다. 두달 후,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십일월에 이르러, 상서(尙書), 시중(侍中)과 육경(六卿)을 설치한다. 원래 건안연간에, 조정백관은 모두 조조의 말을 들었고, 승상이 되었으며, 승상부를 두며, 모든 정령은 승상부에서 나왔다. 조조.. 2021. 10. 19.
촉한(蜀漢) 오호상장(五虎上將)의 부인은...? 글: 천애간점역사호(天涯看點歷史號) 에 이런 문구가 있다: "자룡일신도시담(子龍一身都是膽), 갱유인심병의간(更有仁心幷義肝)" 조운의 자는 자룡이고, 오호상장중 하나이다. 유비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졌고, 유비가 조조의 오천 호표기(虎豹騎)에 쫓기느라 처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어, 처자식을 전진에 놔두고 혼자서 도망쳤다. 유비는 자신의 처자식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조운은 부하로서의 직책을 잊지 않고 장판파에서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유비가 버리고간 미부인(糜夫人)과 유선(劉禪)을 찾아다녔다. 조운은 이처럼 협의로운 인물이다.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시집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에 그의 처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조운의 처는 도대체 누구일까? 오호상장은 모두 결혼을 했고, 부인이 있다. 비록 에는 .. 2021. 7. 13.
조위(曹魏)의 도호장군(都護將軍) 2명은 누구일까?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한말 삼국시대에 무장의 관직은 주로 잡호장군(雜號將軍)과 중호장군(重號將軍)의 두 유형이다. 그중 중호장군은 비록 지위가 비교적 높지만 수량이 많지 않다. 주로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장군(衛將軍), 전후좌우사방장군(四方將軍)등이다. 그러므로, 서한때부터 조정은 대량의 잡호장군을 책봉했다. 전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잡호장군을 내린다. 한말 삼국시기에 이르러 잡호장군은 더욱 널리 응용된다. 예를 들면 관우의 탕구장군(蕩寇將軍), 여포의 분무장군(奮武將軍)은 모두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잡호장군이다. 그중,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도호장군(都護將軍)'도 자연히 하나의 잡호장군이다. 그러나 도호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는 직권을 지니고 있기 때.. 2021. 5. 28.
방통(龐統)은 동오(東吳)의 간첩이었을까? 글: 섭시문사판(攝詩文史版) 음모론자들이 보기에 방통이 유비에 귀순한 것은 동오의 사명을 띈 것이라고 한다. 맥락은 대체로 이러하다: "공조(功曹)는 중요한 직무이다. 주유의 공조인 방통을 동오사람들은 왜 스스로 쓰지 않고, 노숙으로 하여금 유비에게 추천하게 했을까? 서천(西川, 사천)을 취하는 것은 제갈량이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시에 유비는 망설였고, 제갈량도 아무런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통은 계속하여 유비에게 자신을 데리고 사천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을까? 익주로 들어간 후, 유비는 왜 방통의 건의를 거의 듣지 않았을까? 방통은 적진으로 돌진하는 무장도 아닌데, 왜 군진의 앞에 섰다가 죽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방통이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정말 동오인들의 계획인 것일까? 혹은 방통.. 2021. 4. 20.
조조(曹操)는 왜 장료(張遼)를 받아들이고, 고순(高順)을 죽였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장료와 고순은 모두 여포의 수하대장이다. 여포의 군중에서의 활약으로 보자면 고순의 군사적 능력은 장료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함락시킨 후, 장료의 투항은 받아들였지만, 고순은 여포와 함께 죽여버린ㄴ다. 둘 다 여포의 수하장수인데, 조조는 왜 장료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고순은 죽여야했을까? 장료는 원래 정원(丁原)의 부하였다. 무공이 뛰어나고 힘이 세서 정원이 휘하로 거둔다. 하진(何進)이 군대를 경성으로 불러모을 때, 정원은 장료를 데리고 간다. 정원이 패망한 후, 장료는 동탁에 넘어간다. 동탁이 패망한 후에는 장료와 그의 부하들이 다시 여포에게 귀속된다. 여포가 이곽에게 패배한 후, 장료는 여포를 따라 서주로 간다. 그리고 대리노국상(代理.. 2021.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