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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장로(張魯): "조조의 종이 될지언정, 유비의 귀빈은 되지 않겠다!"

by 중은우시 2022. 8. 6.

글: 소한신시야(笑寒新視野)

 

삼국의 이야기와 인물은 중국에서 삼척동자도 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진실한 삼국시대는 겨우 몇십년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은 아주 컸다. 식사자리에서의 얘기거리가 될 뿐아니라, 그 속의 선악을 통해 민간문화의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보급교육을 했다.

 

민간문화이므로,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지게 되고, 인물의 성격을 선명하게 그리게 된다. 그러다보니 검보화(臉譜化)하게 된다. 어쨌든 복잡한 인물로 그리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유비,조조처럼 한명은 충신, 한명은 간신, 한명은 좋은 사람, 한명은 나쁜 사람.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다.

 

삼국의 이야기는 송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선악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 유비는 점점 정통으로 되고 좋은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반하여 조조는 점점 한나라를 찬탈한 쪽이 되고, 조조 본인은 극악한 나쁜 놈으로 그려지게 된다.

 

이런 이미지는 <삼국연의> 소설이 나온 이후, 존류폄조(尊劉貶曹)현상이 더욱 심해진다. 소설이 유행한 후, 조조의 간신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박힌다. 그리고 자주 유비의 인의와 비교된다. 조조와 유비는 삼국연의에서 인격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한명은 인의의 대표로, 백성을 위해 적군에 쫓길 때에도 백성들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성 하나를 도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조조와 유비이므로 한명은 사람들에게 타기(唾棄)되고, 한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는다.

 

그런데, 기괴한 것은 유비가 사천을 점거한 후, 한중(漢中)이라는 전략요충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야 유비의 사천이라는 근거지가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중이라는 전략요충지를 유비는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천하가 모두 유비는 인의롭고, 조조는 간사하다고 알고 있는데, 당시 한중을 점거하고 있던 장로(張魯)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내뱉는다: "차라리 조조의 종이 될 지언정, 유비의 귀빈은 되지 않겠다!(寧爲曹公作奴, 不爲劉備上客)"

 

이 말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장로는 왜 유비에 대하여 이렇게 반감을 가지고, 조조에 대하여는 이렇게 호감을 가졌을까. 그렇게 과장되게 조조의 종이 될 지언정 유비의 귀빈은 되지 않겠다고까지 한 것일까? 그리고 실제로 장로는 확실히 조조에 투항한다. 비록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려는 목적은 실현되지만, 한중의 인구 대부분은 조조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것도 아주 기이한 일이다. 장로와 조조간에는 무슨 친척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장로가 한중에 할거한 것은 조조가 도와주어서도 아니다.오히려 장로가 한중에 할거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때문이었다.

 

장로가 왜 이렇게 조조에 친근감을 보였는지를 설명하려면, 동한말기의 한 사건부터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황건적의 난이다. 바로 이 난으로 인하여 지방군대의 군벌화가 조성되게 된다.

 

황건적은 당시에 도교(道敎)를 기반으로 했다. 고대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종교에 의존하는 것은 아주 통상적인 경우이다. 당시의 도교는 중국내에 두개의 큰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황건적의 장각(張角)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장로이다.

 

사실 장로의 한중정권은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정권이다. 장로는 도교의 조직형식에 의존하여, 한중에 왕으로 할거했다. 그는 세숙정권의 영수이면서, 도가의 최고조사였다.

 

조조가 도교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조조가 대량의 청주병(靑州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청주병은 황건적의 한 갈래이다. 조정은 조조를 보내 진압하게 했는데, 나중에 조조는 황건적 중에서 전투력이 강한 자들을 모아서 자신의 수하로 삼는다. 이 청주병은 나중에 조조의 가장 핵심적인 무장역량이 된다.

 

조조가 청주병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조가 도교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부대는 조조를 교주로 대했다. 그들은 완전히 조조 한 사람의 명령만을 들었다. 그들의 눈에, 그들은 국가정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조조라는 교주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나중에 조조가 죽은 후, 조비(曹丕)는 이 군대를 완전히 지휘할 수 없었다. 조비에게는 다른 자원도 많아졌으므로, 더 이상 도교에 의존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자, 청주병을 해산시켜버린다. 이후에 발생한 사태를 보더라도 조조의 당시 수완은 완전히 종교적인 통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가 청주병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장로는 그를 다르게 보게 된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로가 이처럼 굳건하게 유비가 아닌 조조에 투항한 것은 바로 장로가 조조를 자기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조도 장로에게 아주 잘 대해준다. 장로에게 적지 않은 작위와 봉지를 내린다. 장로와 그의 가족이 조조에 투항한 후, 장로를 낭중후(閬中侯)에 봉하고, 식읍1만호를 내린다. 조조는 그와 가족을 업성으로 데려와 장로의 다섯 아들과 부하 염포(閻圃)등을 열후로 봉한다.

 

많은 경우 인품이 좋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특수한 관계가 있다면, 인품이 좋다고 하여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조와 장로는 바로 이런 특수한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장로는 이처럼 확실하게 유비를 거부하고 조조를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