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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순욱(荀彧)의 죽음 배후의 진정한 원인은...?

by 중은우시 2023. 2. 1.

글: 수호독서(繡虎讀書)

 

건안16년(211년) 십이월, 조조는 업성(鄴城)으로 회군하고, 하후연(夏侯淵)을 남겨 장안을 지키도록 한다.

212년 정월, 조조가 업성에 도착하고, 한헌제(漢獻帝)는 특별히 조조에게 "참배불명(參拜不名), 검리상전(劍履上殿)"(황제를 배알할 때 이름을 외치지 않아도 되고, 검을 차고 대전에 들어올 수 있음)"하도록 허락한다.

그후, 조조는 점차 한나라로부터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을 진행시킨다. 국공(國公)에 봉해지고 구석(九錫, 구석은 고대 제왕이 대신에게 내리는 9가지 상사물로서 차마, 의복, 악기, 무사, 궁시등이 있다. 이는 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다)을 받는다.

서한에서 구석을 받은 자가 마지막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서한을 찬탈한 왕망을 말함).

 

이인자인 순욱은 부득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순옥은 "(조조)는 원래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잡고, 평안하게 했으며 충성하는 마음이 있고, 물러나는 모습이 있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덕으로 삼아야 하고,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조조는 "마음이 좋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는 거병후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자신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조는 순욱을 계속하여 회유해왔다.

204년, 조조는 업성을 취하고, 대거 상을 내릴 때, 순욱을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하고, 식읍(食邑) 천호(千戶)를 내려 모든 공신들 중에 으뜸가는 대우를 했다.

207년, 다시 논공행상을 할 때, 여전히 천호를 추가로 내려서 역시 공신들 중 으뜸가는 대우를 했다.

그후, 연속 수십차례에 걸쳐 순욱을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히려 했으나, 순욱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조조도 포기한다.

두 집안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조조는 딸을 순욱의 장남 순운(荀惲)에게 시집보냈다.

 

다만 원칙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 간에는 이견이 있었다.

순욱의 꿈은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대한(大漢)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조가 대권을 독점하고 권신이 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황실을 무너뜨리는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순욱의 이런 태도로 조조집단에는 심각한 의견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순욱은 모략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조조의 창업에 여러번 큰 공헌을 했다.

1. 여포반란때 연주의 세개 성을 지켜낸다.

2. 한헌제를 모셔오자고 극력 주장한다.

3.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 때, 완, 엽의 사이에 있는 지름길로 가서, 불의에 형주를 기습하도록 건의한다.

 

그리고 여러번, 조조의 전략방침을 수정해주었다:

1. 조조와 여포가 대치하던 기간에 한때 서주의 유비를 치려고 했으나, 순욱이 제지한다.

2. 관도에서 하마터면 버티지 못하고 허창으로 물러나야 했을 때, 다시 순욱이 서신을 써서 격려하는 바람에 결국 전황이 역전될 떄까지 버틸 수 있었다.

3. 원소를 무너뜨린 후 조조는 다시 남하하고자 하나, 역시 순욱이 말려서 하북을 통일하는 선에서 멈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조조에게 종요(鍾繇), 순유(荀攸), 진군(陳群), 두습(杜襲), 곽가(郭嘉)등 많은 인재를 추천해주었다. 그중 아무렇게나 한 사람을 얘기해보자. 순욱이 추천해준 서평태후(西平太守) 두기(杜畿). 그는 용맹함으로도 능히 감당할 수 있고, 지혜로도 충분히 임기응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동군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널리 덕정을 베풀어 16년간 그 직위에 있으면서 업적이 천하제일이라고 칭송받는다. 바로 하동군의 강력한 물자공급이 있었기 떄문에 조조는 관중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고, 마초와 싸울 수 있었고, 가볍게 양주의 십만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 봉강대리(지방장관)이거나 중앙정부의 핵심직위에 있다. 순욱의 태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때 양주의 마초가 권토중래했지만, 조조는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내부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조조 본인이 직접 양주를 친히 나서서 정벌하지 않았지만, 짧은 1년만에 양주의 국면은 역전되어, 마초가 남으로 도망쳐 한중으로 간다. 이것은 당시에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인물 양부(楊阜)의 덕이다.

건안17년(212년) 정월, 마초는 동관(潼關)전투에서 패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속히 농상(隴上)의 여러 군현을 병합한다(농서, 남안, 한양, 영양등). 장로(張魯)도 대장 양앙(楊昻)을 보내어 마초를 도왔으며 모두 만여명이 결집한다. 그리하여 양주자사 위강(韋康)이 있는 양주의 치소(治所)인 기성(冀城)을 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6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많은 고대지도를 살펴보았으니, 아마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만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지도가 아주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부분은 손으로 그린 것이다. 왜 그럴까?

역사를 좋아하는 여러분들이 혹시 이런 느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매번 군사전투부분을 읽을 떄면 아주 곤혹스럽다. 지도가 없으면 직관적이지 않고, 당시 전투쌍방의 어떤 의사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문자만 가지고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다만 지도를 한번 보면 바로 깨닫게 된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이런 부분을 고쳤다. 역사를 읽는데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하류(河流)이다. 파란색 부분은 농서의 교통노선이다.

기현에서 진창(陳倉)으로 가는 구간은 관농대도(關隴大道)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노선은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다. 그래서 가정(街亭)은 중요한 위치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는 관중으로 진입하는 또 다른 중요도로이다.

이 지도는 아주 중요하다. 승상(제갈량을 가리킴)의 이후 북벌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된다.

 

위강은 양부가 적극적으로 건의함에 따라 전체 성의 군민을 이끌고 결사항전한다. 조정의 원군이 올 때를 기다리며.

기현보위전은 건안18년(213년) 정월부터 팔월까지 벌어진다. 반년여동안 싸웠고, 아주 참혹했다. 수성하는 사병들은 겨우 1천여명인데, 마초는 함락시키지 못했다(고대에 가장 어려운 전투는 공성전이다. 승상도 진창성의 아래에서 여러 하이테크수단을 펼쳤지만,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그 방증이다)

조조는 마초에 대하여 인내심을 철저히 잃어버리고, 업성에 있는 마초의 가족(부친 마등과 두 동생 마휴, 마철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동시에 하후연을 기성에 원군으로 파견한다.

팔월, 하후연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위강은 이미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마초는 기성을 점령한 후, 장로의 부장 양앙을 시켜 위강을 죽여버린다.

하후연의 원군이 늦게 도착하자, 마초는 고지를 점령한 상태에서 가볍게 하후연의 원군을 물리친다(농서를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광무제도 농서를 점령하는데 고생을 했다)

그후 백경(百頃)의 저왕(氐王) 양천만(楊千萬)과 흥국저왕(興國氐王) 왕아귀(王阿貴)도 병력을 일으켜 마초에 호응하여(저족이 역사무대에 출현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흥국에 주둔한다.

마초는 기성을 근거지로 하여, 농상(隴上)에 할거하며 자칭 정서장군(征西將軍), 영병주목(領幷州牧), 독양주군사(督凉州軍事)라 했다. 

 

양주의 국면이 다시 수습불가능한 국면에 접어들자, 일찌기 조조에게 마초를 끝까지 치라고 권했던 양부가 들고 일어선다.

양부에게는 사촌형이 있는데 이름이 강서(姜敍)이다. 역성(歷城)에 주둔하고 있으며 약간의 병마를 가지고 있었다.

양부는 기회를 살펴 기성에서 도망쳐, 강서에게로 가서 마초에 항거하도록 권유한다: "수성하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다. 군장이 이미 죽었으니 같이 죽지는 못할지언정 우리가 무슨 낯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마초는 부친을 배반하고, 나라를 배반하고 장병을 방화살인했다. 이게 어찌 나 개인이 욕먹을 일인가. 전체 사대부가 치욕을 당한 것이다. 당신이 병력을 이끌고 한 지방을 지키면서, 역적을 토벌하여 죽일 생각이 없다면, 그것은 사서에서 말하는 '조순(趙盾)이 그의 임금을 죽인' 경우와 같은 경우이다. 마초가 비록 강하지만, 신의가 없고, 부하들간에 갈등이 심하다. 그래서 그를 쳐서 이기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강서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두 사람은 강은(姜隱), 조앙(趙昻), 윤봉(尹奉), 요경(姚瓊), 공신(孔信)등과 연락하여 공동으로 마초에 항거하게 된다.

구월초, 양부, 강서가 거병하니, 마초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러 나선다.

마초가 떠나자, 조앙등은 바로 기현성을 장악한다. 마초는 대노하여 군대를 돌려 기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러자 역성을 기습하여, 역성에 있던 양부의 친족을 모조리 죽인다.

그후 쌍방은 결전을 벌이는데, 양부등 팔형제가 마초를 포위공격했으나, 모두 마초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부도 중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싸운다.

 

중요한 순간에 하후연의 원군이 마침내 전장에 나타난다(관농대도는 다니기 불편하다. 다시 위의 지도를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후연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지였다면 하후연의 평소 성격으로 봐서 일찌감치 도착했을 것이다). 마초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고, 근거지도 잃었다. 진퇴양난의 낭패한 입장이 된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한중의 장로에게 투항한다. 전투가 끝난 후, 양부등 11명은 마초를 토벌한 공로로 후(侯)에 봉해진다. 양부는 상소를 올려 사양했지만, 조조는 허락하지 않고 직접 그에게 편지를 써서 봉작을 받으라고 한다(동관전투에서 양조본토호족의 예기는 철저히 꺽어버렸다. 그들은 직접 조조군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았고, 할거파가 설 자리는 이미 없어졌다).

양주가 안정되면서 조조는 더욱 정력을 순욱을 처리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순욱은 계속하여 허현(許縣)에 머물렀다. 주위에는 그의 지지자가 적지 않았다. 만일 허현에서 그를 처리한다면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허현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럼 무슨 이유를 대야 할까?

남쪽의 손권이 핑계거리를 가져다 주었다.(유비는 이때 사천에 들어가서 익주를 차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권은 형주의 주도권을 잃은 후에도 쉬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 큰 일을 했다:

1. 대본영을 말릉(秣陵)으로 이전한다.

2. 장강에 요새를 쌓는데, 이름이 유수오(濡須塢)이다.

 

강동정권의 최초의 대본영은 오현(吳縣)이었다. 즉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이다. 그후 강동세력이 계속 서쪽으로 발전하면서, 대본영을 계속 서쪽으로 옮기게 된다. 그후 경구(京口)로 옮기니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이다.(지난 번에 유비가 단도부회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손권은 경구의 위치가 너무 외지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말릉으로 이전할 것을 극력 주장한다(말릉은 처음에 전국시대 초무왕이 설치했고, 나중에 진시황이 동순때 회계를 가면서 이곳을 지나간다. 어떤 사람이 진시황에게 금릉의 지형은 왕자지기가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명을 내려 풍수를 끊도록 하고 금릉을 말릉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이곳으로 천도한 후, 방위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손권은 두 개의 요새를 짓도록 명한다: 석두성(石頭城)과 유수오.

1. 석두성. 장강남안의 석두산에 축성하여 석두성이라 한다. 이곳은 장강의 목줄을 누르고 있다.

2. 유수오. 합비에서 장강으로 내려오다보면 중간에 호수 하나가 두개의 하(河)의 사이에 있다.

여기의 호(湖)는 소호(巢湖)를 가리킨다. 시수(施水)는 합비와 소호를 연결시키고, 유수오는 소호와 장강을 연결시킨다.

 

유수오는 장강의 북안에 있다. 손권이 처음에 이곳에 군사요새를 짓자고 했을 때, 대부분의 장수들은 반대의견을 낸다. 그들의 이유는 이러했다. 남군은 수전에 능하므로 육지에서 이기지 못하면 배에 올라타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인력, 물력을 들여 요새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여몽(呂蒙)만이 이 군용부두를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싸움에서는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다. 누구도 백전백승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만일 패배하면 적의 기병이 추격해 올 것인데, 급한 와중에 어떻게 배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손권에게는 더욱 깊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강동의 전선은 장강에서 출발하여 유수하, 소호, 시수를 거치면 쉽게 합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조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다(강물의 흐름떄문에)

그리고 유수오는 마치 자물쇠와 같다. 조조군대가 강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을 뿐아니라, 이곳에 병사를 주둔시키면, 무형중이 쌍방이 공유하던 장강의 천험이 오나라의 독자적인 소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동은 전략적으로 완전히 주도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태세가 된다. 가장 좋은 방어는 영원히 공격, 공격, 또 공격이다.

여몽의 지지를 받아, 손권은 큰 노력을 들여 유수오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동시에 대량의 군용물자를 보관한다.

 

조조는 동관전투를 마친 후, 손권이 그의 눈아래에 엄청난 요새를 짓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조조의 수군은 강을 건너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장강까지도 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조조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유수오를 반드시 차지해야겠다!

 

건안17년(212년) 십월,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간다. 손권과 장강의 천험을 다툴 생각이었다.

이 전투는 적벽대전이후 조조와 손권간의 최대의 전투이다(어떤 역사서에는 심지어 조조가 이번에 40만명을 이끌고 갔다고 말한다)

조조는 이 기회에 순욱을 허현에서 끌어내고자 한다

지난번 적벽대전에 너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손권을 치는데도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순욱도 남하대군에 가담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신비스럽게 사망한다.

 

사망방법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우울과 분노로 사망했다는 것이다(彧疾, 留壽春, 以憂薨)

2. 조조가 뜻이 담긴 빈 도시락을 보냈고, 순욱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다(太祖饋彧食, 發之乃空器也, 於是飮藥以卒)

앞에 조조와 원칙에 대하여 이견이 발생한 것을 보면, 두번째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조조는 몰래 순욱을 죽였다! 

순욱은 이때 조조집단의 2인자였다. 그는 조조가 그에게 이렇게 악독하게 대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와의 정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죽여버릴 줄은. 강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적벽대전때 손권과 2인자인 장소간에 분열이 발생한다. 장소는 이때부터 손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이는 더더욱 촉한정권의 따스함을 드러내준다. 유비,관우,장비간의 형제의 정이 아무리 깊다고 하더라도, 황숙은 승상에게 죽으면서 후사를 부탁하고, 전체 촉한의 고위층은 영원히 충성하며 간담상조했고, 절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바라는 창업그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순욱은 왜 반항하지 않았을까?

1. 그는 조조의 군대내에 있었고, 그가 수중에 지닌 역량은 머나먼 허현에 있어서, 쓸 수가 없었다.

2. 순씨가족의 분열이다. 순씨집안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인 순유는 일찌감치 조조에 철저히 투항했다. 더 이상 군대를 따라 전투에 나서지 않고, 조조를 위해 후방에 남아서 지켰으며, 형벌을 관장했다. 위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순유는 상서령을 맡는데, 바로 이전에 순욱이 앉았던 2인자의 자리였다.

3. 가장 중요한 점은 후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순욱의 자식대의 관직을 보도록 하자.

순운(荀惲), 순욱의 장남, 관직이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순오(荀俣), 순욱의 차남, 자는 숙천(叔倩), 어사중승(御史中丞)

순선(荀詵), 순욱의 아들, 자는 만천(曼倩), 대장군종사중랑(大將軍從事中郞)

순의(荀顗), 순욱의 육남, 자는 경천(景倩), 산기상시(散騎常侍), 상서(尙書). 나중에 진나라에서 태위(太尉)에 오르는 서진의 개국공신중 한명.

순찬(荀粲), 순욱의 막내아들, 자는 봉천(奉倩), 위진 현학(玄學)의 대표인물로 왕필(王弼)과 나란히 이름을 떨침.

 

만일 순욱이 무력으로 항거했다면, 조조가 이전에 서주를 도살한 사례를 보더라도 그가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음에 맞으면 나가서 관직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서 은거한다. 다만 관료의 길을 들어서게 되면 역사상 몇명이나 선종(善終)할 수 있었던가? 현대사회는 사장과 부딛칠 권리는 있고, 사장이 쓰레기라면 떠나면 그만이다. 다른 회사로 가면 된다. 

순욱은 죽기 전에 한 가지 일을 해놓는다. 모든 조조와 관련된 서신등 문자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후세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조조를 위하여 책략을 기획하고 건의한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후인들에게 자신의 면모를 한나라의 신하이지 조조의 개국공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조조의 2인자가 이렇게 조조와 갈라선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헌제 주위의 신하들에게 꿈을 잃지 말고, 한황실을 부흥시켜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욱의 수완과 능력은 저평가될 수 없다. 나중에 위나라를 빼앗은 사마의도 그를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서중의 인물로 내가 직접 보고 글로써 들은 사람중에서 근 백몇십년동안 순령군(荀令君, 순욱)만큼 현명하고 재능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조조는 내심 부끄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후 조조가 나라를 빼앗는 길에서 더 이상 길을 막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삼국지에서는 순욱이 죽은 후 화룡점정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다음 해, 태조는 마침내 위공이 된다(太祖遂爲魏公)". 여기서 '수(遂, 마침내, 드디어)' 한 글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