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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2. 3. 7.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통감>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엄의 흥폐와 제갈의 용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지 않는다. 전혀 '재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고(以才幹稱)," "능력있는 것으로 이름났으며(有能名)" "일들을 물흐르듯이 처리하며, 버리고 취하는 것에서 지연됨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에 전혀 맞지 않았다. 촉국의 섬서성에 나뉘어 살고 있던 사람의 소행이나 거기에 무슨 숨은 사정이 있지 않은지 의심스럽다. 전여경 선생의 의견은 개략 다수의 역사학자의 견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제갈량이 이엄을 축출한 원인은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이엄이 축출된 심층적인 원인은 아마도 촉국 정권내부의 정치적 힘겨루기였을 것이다.

일찌기 수백건의 옛날 사건들을 조사해본 사람의 입장에서 필자는 이엄사건의 관련자료를 자세히 연구해 보았다. 그리고, 조사결과는 사실이었고, 조사결과도 믿을만하고, 처리의견도 적절했다고 보인다. 다만 하자가 있었다. 당사자인 이엄의 진술이 없다. 즉 내가 본 것은 모두 조사자의 의견뿐이었다. 이엄이라는 피조사자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단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건 아주 의심스럽다.

 

<통감>의 이엄사건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간략하다. 우리는 <삼국지. 이엄전>부터 보기로 하자. 

이엄은 자가 정방(正方)이고, 남양(하남성 남양시)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에서 관료로 있었고, 재능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형주목 유표는 이엄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를 군내의 여러 현에 재직하게 하면서 단련시켰다.

208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한다. 이엄은 당시 자귀현(秭歸縣)에서 현령으로 있었다. 그는 조조에 투항하길 원치 않아, 서쪽으로 도망쳐 촉으로 간다. 익주목 유장은 그를 성도현(成都縣) 현령에 임명한다. 이엄은 성도에서 일을 잘 했고, 명성을 내외에 떨친다.

213년, 유장은 이엄을 호군(護軍)에 임명한다. 면죽(綿竹, 사천성 덕양시북쪽 황허진)에서 유비를 막도록 한다. 이엄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려, 무리를 이끌고 유비에 투항한다. 그리고 유비에 의해 비장군(裨將軍)에 임명된다. 유비가 익주를 취한 후, 이엄을 건위군(犍爲郡, 사천성 팽산현) 태수, 흥업장군(興業將軍)에 봉해진다.

218년, 도적 마진(馬秦), 고승(高勝)등이 처현(郪縣, 광한군에 속함. 지금의 사천성 삼태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무리는 수만명에 이르렀고, 병력을 이끌고 자중현(資中縣, 건위군에 속함. 지금의 사천성 자중현)에 이른다. 당시 유비는 한중에서 조조와 싸우고 있어서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엄은 유비의 지원을 받지 않고, 군의 장사 오천명을 이끌고 반군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진, 고승등을 참한다. 그후 월전군(越巂郡, 사천성 서창시)의 오랑캐두목 고정(高定)이 군대를 신도현(新道縣, 월전군에 속함. 월전군, 건위군의 교차지점에 위치함)으로 보낸다. 이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반군을 격패시킨다. 유비는 이엄을 보한장군(輔漢將軍)에 임명하고 여전히 건위태수로 재직시킨다.

222년, 상서령 유파(劉巴)가 사망한다. 유비는 이엄을 영안(永安, 중경시 봉절현 동쪽, 즉 백제성)으로 불러 상서령에 앉힌다.

223년, 유비의 병이 위중해지고, 이엄과 제갈량은 나란히 유조를 받아 소주 유선을 보좌하게 된다. 유비는 이엄을 중도호(中都護)에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를 통할하게 했고, 영안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사망하고, 유선이 즉위한다. 이엄을 도향후(都鄕侯)에 봉하고, 가절(假節), 광록훈(光祿勳)을 추가한다.

226년, 이엄은 전장군(前將軍)이 된다. 제갈량은 군대를 한중으로 출동시킬 생각을 하며, 이엄이 후방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엄을 강주(江州, 중경시 파군 지방정부소재지)로 옮겨 주둔하게 하고, 호군(護軍) 진도(陳到)를 영안에 주둔하게 하며, 이엄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230년, 이엄은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한다. 당시 조위의 대사마 조진(曹眞)이 대군을 이끌고 몇로로 나누어 촉을 공격해 들어왔다. 제갈량은 이엄에게 2만명을 이끌고 한중으로 가게 한다. 그리고 후주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이엄의 아들 이풍(李豊)을 강주도독(江州都督)으로 임명하게 하여, 이엄이 남긴 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제갈량은 다음 해에 위나라를 토벌할 계획이었다(즉 제4차북벌), 이엄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사무를 관장하게 한다. 이엄은 이름을 이평(李平)으로 개명한다.

 

[의사리] 유비가 서거할 때, 이엄은 중도호였다. 제갈량이 이엄을 중도호로서(표기장군의 신분이 아니라) 승상부의 일을 하게 한 것은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주의, 주의, 주의. 승상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제갈량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엄이 이 임무를 잘 하기 쉬울 것같은가

그외에 이엄은 이름을 이평으로 개명한다. 사서에는 이유를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엄(嚴)"과 "평(平)"의 뜻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엄"은 엄격하고 엄숙하고 대단하다는 뜻이다. 평은 평화롭고 평범하다는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엄은 아마도 제갈량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약함을 보이려 한 것같다. 자신은 이미 제갈량에게 복속했고, 더 이상 대단하지도 않으며 이제는 평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231년, 봄, 제갈량은 다시 기산(祁山)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糧草)의 운송을 맡았다. 여름,가을이 교차할 때,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양식운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엄은 참군 호충(狐忠, 즉 馬忠), 독군 성번(成藩)을 보내 제갈량에게 말을 전하고, 그에게 철군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제갈량이 군대를 돌린 후, 이엄의 태도는 아주 재미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군량이 충분한데 승상은 왜 회군하셨는지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엄이 누구에게 물었는지는 사서에 나와 있지 않다. <삼국지>에는 이엄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양초를 운송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면하고자 해서이고, 제갈량이 전쟁에서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더욱 기괴한 것은, 이엄이 곧 후주 유선에게 이렇게 보고한 것이다. 승상은 거짓으로 철군한 것이고, 조조의 군대를 유인한 다음 섬멸시키기 위함이라고.

제갈량은 이엄이 앞뒤로 쓴 서신, 상소등을 모두 모아서 보여주면서 이엄과 대질한다. 이렇게 많은 증거자료 앞에서 이엄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죄를 인정한다.

 

[의사리] 앞에도 말했지만, 전여경 선생은 이엄의 거동이 괴류하고 상정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일이다. 이엄은 유선의 뜻이라며 제갈량에게 철군하라고 말하고, 제갈량이 철군하자, 이엄은 양식도 충분한데 왜 철군했느냐고 말하고, 다시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제갈량은 거짓으로 철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엄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확실히 이해가 도지 않는다. 괴류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그의 이런 거동이 모두 자신의 친필문건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모조리 확실한 증거로 남겨둔 것이다. 제갈량은 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마치 살인혐의자가 붙잡혔는데 온 집안에 싸운 흔적이 있고, 도처에 그의 지문이 묻어 있으며, 그의 온몸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고, 손에 든 칼에도 핏방울이 묻어 있다. 그런데 혐의자는 경찰에게 나는 죽이지 않았다. 나는 죽이지 않았다. 능력이 있으면 나를 잡아넣어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황당하다기 보다는 멍청하다.

 

이어서 살펴보자.

제갈량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선제가 붕어한 후 이엄(글의 편의상 특별히 필요가 없으면 이엄이라고 부르고, 이평으로는 부르지 않기로 한다)은 어디에서 관직에 있든, 항상 작은 은혜 작은 이익을 신경쓰며 자신의 명성과 이익만을 추구했다. 한번도 국가대사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북벌을 생각한 이래, 이엄의 병력을 데려와서 한중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만 이엄은 어려움을 만나자 오지 않았다. 오히려 5개군으로 파주(巴州)를 성립해서 자신을 파주자사로 앉혀달라고 요구했다. 작년(231년, 제4차북벌이전), 나는 서정을 계획했고, 이엄에게 한중을 지키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의 사마의도 개부(開府, 승상부를 열다)했다.(제갈량의 뜻은 이엄도 개부하고 싶다는 뜻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마음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가 대군을 이끌고 출발하려할 때, 나에게서 이득을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국을 고려하여 나는 그의 아들 이풍에게 강주도독의 직위를 맡기도록 요청하고, 또 이엄에 대한 각종 대우를 올려주었다. 목적은 그가 국사를 중시여기길 바라서였다. 이엄이 한중에 도착한 후, 나는 많은 중요한 일들을 그에게 위임했다. 여러 신하들도 내가 이엄을 이렇게 중요하게 대우하는 것에 대하여 기이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대사를 아직 이루지 못했고, 한황실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엄의 단점을 공격하기 보다는 그를 칭찬해서 다독이는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엄이 기껏해야 명리를 구한다고 여겼다. 다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내심은 이렇게 악독했다.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일 이엄을 처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에 화가 닥칠 것이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정치적 민감성이 없었다. 너무나 부끄럽다.

그리하여 유선은 조서를 내려, 이엄의 관직을 폐하고 평민으로 내린다. 그리고 재동군(梓潼郡)으로 귀양보낸다.

 

[의사리] 모두 여기까지 읽으면, 좀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제갈량은 이엄을 이렇게 나쁜 놈으로 몰아갔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사건처리의 안목으로 볼 때 이 상소문은 좀 이상하다.

어디가 이상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엄의 군량운송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졌다.

진수는 이엄이 양식운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고 아래 위를 속인 일을 얘기했는데,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올린 상소에는 이엄이 파주자사가 되고 싶어하고, 개부하고 싶어한다는 말 뿐이다. 유일하게 양식운송과 관련이 있어보이는 말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는 정도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엄을 처벌한 죄는 근본적으로 양식운송과는 관련이 없다.

그외에 제갈량은 이엄의 죄를 확실하게 못박아서 그가 다시 관직에 나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한 무리의 사람들은 모아서 이엄을 비판한다. 우리는 상소문에 어떻게 썼는지 보자.

 

<삼국지.제갈량전>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양공문상상서(亮公文上尙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엄은 대신으로서 황은을 두텁게 받았다. 그러나 진충보국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함부로 없는 일을 조작했다. 위기에 처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상하를 속였다. 사람됨이 간사하고 마음인 좁고 뜻은 광망하여, 천지가 없는 것같았다. 그는 간계가 이미 들통난 것을 보고, 그릇된 마음을 품어, 병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을 이끌고 서쪽으로 저현(沮縣, 섬서 면현 차점진), 장현(漳縣)으로 도망갔다. 저현에 도착한 후에 다시 강양(江陽, 사천성 노주시)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참군 호충(마충)이 계속 권해서, 이엄은 더 이상 계속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 반적을 아직 토벌하지 못했고, 사직이 어려우며, 국가는 상하로 한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는데, 이런 죄행은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면 대업이 위험해진다. 나는 그리하여 행중군사 거기장군 도향후 유염(劉琰), 사지절 전군사 정서대장군 영양주자사 남국정후 위연(魏延), 전장군 도정후 원림(袁琳), 좌장군영형주자사 고양후 오일(吳壹), 독전부우장군 형향후 고상(高翔), 독후부후장군 안락정후 오반(吳班), 영장사수군장군 양의(楊儀), 독좌부행중감군양무장군 등지(鄧芝), 행전감군정남장군 유파(劉巴), 행중호군편장군 비위(費褘), 행전호군편장군 한성정후 허윤(許允), 행좌호군독신중랑장 정함(丁咸), 행우호군편장군 유민(劉敏), 행호군정남장군 당양정후 강유(姜維), 행중전군토로장군 상관옹(上官雍), 행중참군소무중랑장 호제(胡濟), 행참군건의장군 염안(閻晏), 행참군편장군 찬습(爨習), 행참군비장군 두의(杜義), 행참군무략중랑장 두기(杜祺), 행참군수융도위 성발(盛勃), 영종사중랑무략중랑장 번기(樊岐)등과 상의하여 이엄의 직무를 박탈하고, 일체의 대우를 취소하고 그의 작위와 봉지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의사리] 재미있다. 제갈량은 이엄을 제거하기 위해, 정말 신경을 많이 쓴 것같다. 22명에게 연락했고, 이들의 구성도 매우 광범위하다. 촉한의 3대정치집단인 형주집단, 동주집단, 익주집단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었다. 즉, 이엄의 정치생명은 모든 정치집단에 의해 일치된 의결로 '참입결(斬立决)'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소문을 보면 이엄의 구체적인 죄행이 드러나는가?

한가지 있는 것같다. 즉 이엄이 왜 그랬는지 몰라도 도망쳤다. 한중에서 강양까지, 강양은 현재의 노주이다. 성도의 동남쪽 방향이고, 중경의 서남쪽 방향이다. 한중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수백리는 될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의 본거지인 강주(중경)으로 가서 아들 이풍과 회합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강양으로 도망쳤을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소문에 이엄이 군량미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엄이 처벌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나는 당초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조사보고서에는 마땅히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명확히 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저, "이엄은 대신으로서 황은을 두텁게 받았다. 그러나 진충보국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함부로 없는 일을 조작했다. 위기에 처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상하를 속였다. 사람됨이 간사하고 마음인 좁고 뜻은 광망하여, 천지가 없는 것같았다."라고만 했다. 이런 말도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조사보고서의 내용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무엇을 위반했는지가 나와야 하고 구체적인 위법사실이 기재되어야 하고, 실질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세히 두 상소문을 보면 크게 사건을 만들었고, 참여인원이 아주 많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엄에게 실질적인 위법사실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가 파주자사를 하고 싶어했고, 개부하고 싶어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포부이다. 누가 승진을 바라지 않겠는가. 누가 개부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엄의 유일한 죄라고 볼 수 있는 군량운송문제는 그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군량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군대가 철군했다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할 때도 군량이 제대로 운송되지 않아 철군하지 않았던가. 그때 누구를 처벌했던가? 아니다. 다만 이엄이 군량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지를 거짓으로 전하고, 상하를 속인 것은 기군지죄이다. 이는 목숨을 거둘 일이다. 심지어 삼족을 멸해도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좋은 범죄사실이 있는데, 왜 두 개의 상소문에는 그것을 쓰지 않았을까?

내 생각에 이엄이 쫓겨난 것은 반드시 다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군량운송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만일 이엄이 강음까지 도망쳤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천년동안 거의 모든 사람이 이엄이 처벌받은 직접원인을 군량운송문제라고 여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삼국지>에 그렇게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두 건의 상소문에는 그 말이 없을까?

그 일은 아마도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진수가 들은 거짓선전일 것이다. 그리고 진수가 군량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후, 이어서 제갈량의 상소문을 적었다. 이렇게 하면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두 개를 같은 사건의 원인과 결과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각도를 바꾸어서, 만일 이엄이 기군지죄를 저질렀다면, 제갈량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서 그를 처벌하자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당연히 필요없다. 그렇다면 왜 스물몇명이나 되는 사람을 끌어모아 공동으로 상소를 올린 것일까? 제갈량이 이엄에게 뒤집어 씌운 죄가 실제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부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포부가 있다는 말이고, 그는 야심이 너무 크다는 말도 되고, 결국 나중에 정국을 혼란시킬 것이라고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제갈량은 사람을 많이 모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위세를 보이는 것이다. 이엄의 배후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조용히 하고 시끄럽게 나서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