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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동한(東漢)의 유씨성의 5대주목(州牧)

by 중은우시 2023. 1. 31.

글: 심근배조(尋根拜祖)

 

유표(劉表), 유언(劉焉)/유장(劉璋), 유우(劉虞), 유요(劉繇)/유대(劉岱)는 동한말기 지방에 할거한 4대주목(四大州牧)이다. 유비(劉備)가 나중에 유표와 유언의 자리를 차지한다.

 

동한말기에 유씨성의 관리는 아주 많았는데,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한고조 유방(劉邦)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먼저 그들의 혈연관계를 소개한 후, 다시 정치관계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여러 유씨주목들간의 혈연관계

 

1. 유대, 유원: 유방의 서장자(庶長子) 제왕(齊王) 유비(劉肥)의 후손

 

유대와 유요는 친형제이고, 유대는 관직이 연주자사, 유요는 양주자사에 이른다. 나중에 '양주목(揚州牧)'을 받아 동한말기 4대종실주목중 한명이 된다.

 

혈연관계로 보면, 이들은 황실과의 관계가 가장 소원했다. 그의 선조는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인 제왕 유비이다.

 

2. 유언, 유장: 유방의 손자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의 후손

 

유방은 아들 8명을 낳았다. 그중 넷째아들 유항(劉恒)이 '제여지란(諸呂之亂)'이후 황위를 계승하니 바로 한문제(漢文帝)이다. 한경제 유계는 한문제의 적장자이다.

 

우리는 한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되믄데, 양한의 황실, 제후왕 그리고 정계의 거물들중 대다수는 한경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원인은 한경제와 그의 아들들이 자식을 너무 잘 낳았기 때문이다.

 

한경제에게는 14명의 아들이 있다. 본문과 관련있는 아들은 넷째아들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는 생모가 정희(程姬)이다; 여섯째아들 장사왕(長沙王) 유발(劉發)은 생모가 당희(唐姬)이다; 아홉째아들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은 생모가 가부인(賈夫人)이다.

 

유언, 유장 부자는 바로 노공왕 유여의 후손이다. 부자는 '익주목(益州牧)'의 신분으로 지방에 할거했다.

 

3. 유표: 유방의 손자 한경제 유계의 후손

"형주목(荊州牧)" 유표도 서한의 노공왕 유여의 후손이다. 다만 연대가 오래되어 구체적인 세계는 이미 확인하기 곤란하다.

 

4. 유비: 유비의 손자 한경제 유계의 후손

 

유비는 중산왕 유승의 제16대손이고, 한경제의 제17대손이며, 유방의 제19대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승은 모두 12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유비가 유승의 후손중 어느 갈래인지는 기실 불명확하다. 그래서 후인들은 계속 유비가 가짜황손이라고 의심해왔다.

 

이런 추측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예(尹燁)이라는 인터넷인기인은 일찌기 강좌에서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하북일대의 일부 유씨성은 DNA서열상 유방과 혈연관계가 없다고 했다. 즉, 유승의 아들들 중에서는 아마도 가짜가 섞여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5. 유우: 유방의 팔대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후손

 

위의 몇명은 모두 서한의 종실이지만, 유우는 동한의 종실이다. 황실과의 혈연관계가 비교적 가깝다. 그는 광무제 유수의 장자인 유강(劉强)의 후손이다.

 

유수는 한고조 유방의 8대손이고, 한경제의 6대손, 장사왕 유발의 5대손이다.

 

한경제가 정희(노공왕 유여의 모친)를 총애했는데, 한번은 우연히도 정희의 몸이 좋지 않아, 자신의 시녀인 당희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한경제를 모시게 한다. 

 

이 한번으로 당희는 여섯째아들 유발을 낳는다. 그리하여 나중에 유수가 태어날 수 있었고, 동한제국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정희가 한번 몸이 좋지 않음으로 인하여, 한나라는 200년이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여러 유씨들간의 정치관계

 

1. 유주목(幽州牧) 유우

 

위에서 소개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유우는 동한황실과 혈연관계가 가장 가깝다. 그의 선조인 유강은 광무제의 적장자이다. 생모는 황후 곽성통(郭聖通)이다.

 

나중에 유수는 곽성통을 폐출시키고, 음려화(陰麗華)를 황후에 앉힌다. 유강은 놀라고 두려움에 여러번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여, 발해왕(渤海王)으로 다시 봉해진다. 그리하여 황위는 음려와의 장남인 유장(劉莊, 한명제)에게 넘어간다.

 

혈연관계가 황실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동탁이 소제(少帝) 유변(劉辯)을 폐위한 후,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 발해태수(渤海太守) 원소(袁紹)등이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여, 동탁(董卓)과 맞서자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유우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다시 원소가 '영상서사(領尙書事)'를 맡아달라는 요청도 거절한다. 그는 한마음으로 한헌제를 받든다.

 

유우의 이런 행동은 현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주에서 기실 반괴뢰였기 때문이다. 군사대권은 현지군벌인 공손찬(公孫贊)이 장악하고 있어, 유우로서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어서 황관을 써봐야 제2의 한헌제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우는 북방에서 민심을 많이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민심이 그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공손찬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2. 양주목 유요

 

유요의 운명은 유우보다 비참했다. 그는 조정에서 낙하산으로 수춘(壽春)에 내려보내 양주목을 맡게 한다. 그러나 수춘은 일찌감치 원술(袁術)이 점령하고 있었다. 세력도 없고 고립된 유요는 할 수 없이 단양(丹陽)에 머문다.

 

유요는 정치적으로 강남호족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고, 군사적으로도 원술, 손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여러번 대패한 후, 어쩔 수 없이 유표(劉表)의 아래로 들어간다. 그후 양주목의 명호도 원술이 빼앗아간다.

 

건안2년, 유요는 사망한다. 향년 41세이다.

 

유요의 형인 유대는 당시 연주자사로 있었다. 일찌기 원소가 조직한 '관동토동연군(關東討董聯軍)'에 참가한 바 있다. 유대는 원래 청주(靑州)일대에서 아주 중요한 군사역량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마구잡이로 황건군(黃巾軍)을 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축록중원의 대열에서 빠지게 된다.

 

3. 형주목 유표

 

유표는 <삼국연의>에서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다만 그는 기실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고, 태학생들에 의해 청류팔준(淸流八俊)중 한명으로 떠받들어졌다.

 

형주자사를 맡은 후, 유표는 유요와 같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단창필마로 형주로 들어가서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현지호족 채씨(蔡氏), 괴씨(蒯氏), 장씨(張氏)의 지지를 이끌어내 기적적으로 형주에 뿌리를 박게 된다. 

 

이들 호족은 유표를 옹립한 세력이면서 또한 유표를 옥죄는 완고한 세력이기도 했다. 게다가 유비는 천하를 내려다보는 큰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점차 수성에 머무르게 된다.

 

건안12년, 조조의 군이 쳐들어올 때, 유표는 병사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은 형주를 조조에게 바친다.

 

4. 익주목 유언

 

유언은 동한의 난국을 만들어낸 인물중 하나이다. 그가 한영제에게 '주목제도'를 시행할 것을 건의했고, 그로 인하여 군벌할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당연히, 유언은 이 제도의 수혜자이고, 그는 기꺼이 '익주목'의 인장을 받아 토황제가 된다.

 

그러나, 유언도 다른 유씨들과 마찬가지의 곤경에 처한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에서 들어온 외래인이다. 그리하여 익주 현지호족들의 저항에 부닥친다. 이에 대하여 유언은 군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우수한 품성' 즉 진압을 시행한다.

 

폭력적인 수단으로 유언은 현지에 발을 붙인다. 그리고 야심만만하게 한중에서 관중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하고 그의 두 아들은 조정에서 처형당한다. 유언은 이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고, 병이 발발하여 죽고 만다.

 

유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유장이 익주목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유장은 그의 부친과 달랐다. 그는 재주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아주 인자했다. 최대한 익주사족집단과의 갈등을 완화시킨다.

 

익주를 유비가 점령한 후, 유장은 형주로 옮겨가 거주하게 된다. 관우가 익주를 잃은 후, 유장은 손권에 투항하고, '형주목'이라는 허울뿐인 직위를 받는다. 나중에 형주에서 병사한다.

 

5. 서주목 유비

 

기실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기 십여년전에, 유비는 '서주목'에 오른 바 있다. 그때 유비는 서주목 도겸(陶謙)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도겸, 진등(陳登), 공융(孔融)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도겸의 병이 위중해지자, 그는 정중하게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진등, 공융등의 지지를 받아 서주목이 된다.

 

다만 횡재는 얻기도 쉽지만 잃기도 쉽다. 얼마 후 여포가 쳐들어온다. 이어지는 일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테니 여기서 더 말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