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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220

정사(正史)기록상 관우가 죽인 장수는 단 두명이다.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명소설 에서 작자 나관중(羅貫中)은 관우를 충의인용(忠義仁勇)의 청룡언월도를 든 무장의 이미지로 그렸다. 고대위맹(高大威猛)하며 무예가 비범하다. 첫부분에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하고, 병기를 만든 후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전쟁에 참가한다. 18로제후가 동탁을 토벌할 때, 관우는 온주화참웅(溫酒斬華雄)하고,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한다. 유비가 서주에서 패전하고나서는 세 가지 일을 약속받고 항한불항조(降漢不降曹)한다. 조조를 위하여 백마의 포위를 해결해주고, 안량, 문추를 참한다. 유비의 행방을 알고난 후에는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로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한다. 채양(蔡陽)을 죽이고, 고성에서 삼형제가 다시 만난다. 적벽대전때는 화용도(華容道)에서 차마 조조를 죽이지 못하.. 2020. 6. 30.
촉(蜀)이 멸망한 후 관우의 후손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장비의 후손은 살아남았던 이유는...? 글: 원재예(袁載譽) 에서 주유(周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비는 효웅의 모습이고, 관우, 장비와 같은 곰,호랑이같은 장수를 가지고 있어, 절대로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지 않을 것이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결의형제이다. 형님인 유비를 도와 강산을 취할 때, 관우는 적인 오나라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유비가 죽은 후, 관우의 처와 자식은 모조리 원수의 아들인 방회(龐會)에게 살해당하고, 멸문당한다. 그러나 장비는 건안24년에 죽었고, 둘째형인 관우가 죽은후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관우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같은 지위, 같은 처지인데 왜 그의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관우는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던 인물이다. 큰형 유비도 그를 중용했다. 촉의 대업을 위.. 2020. 6. 17.
유선이 장비의 두 딸을 취하면서, 관우의 딸은 취하지 않은 이유는...? 글: 지역사(知歷史) 아마도 유선(劉禪)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이릉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劉備)는 일생동안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유선, 유봉(劉封), 유리(劉理), 유영(劉永)이다. 그런데, 유비는 굳이 성격이 유약한 유선에게 황위를 넘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비의 이런 결정을 기이하게 여긴다. 유비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 기실 사서 에는 이미 명확하게 답을 제시해 놓았다. 유비의 유조(遺詔)에는 일찌기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제갈량이 예전에 사원의 앞에서 유선이 지혜도 있고 도량도 있다고 칭찬한 바 있는데, 사원은 그 말을 유비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유비는 비로소 유선을 후계자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일생동안 제갈량을 신임했고, 그는.. 2020. 4. 27.
유비(劉備)가 건립한 정권은 분명 "한(漢)"인데, 왜 "촉(蜀)"이라 부르는 것일까? 글: 장생전(張生全)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 국호로 선정한 것은 "한(漢)"이었다. 다만 후세에 이르러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비가 건립한 이 국가를 '촉(蜀)'이라 부르거나, '촉국(蜀國)'이라 부른다. 기껏해야 '촉한(蜀漢)'으로 불러준다. 결국 유비가 당초 건국할 떄 정한 국호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만일, 이렇게 부른다면 목적은 한왕조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인데, 그것도 아닌 것같다. 역사상 건국때 '한'으로 지은 왕조는 아주 많다. 그러나 후인들은 그들이 취한 국명과 한왕조의 '한'이 중복된다고 여겨서 '한'이라는 국명을 빼버리지는 않았다.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의 사이에 유현(劉玄)이 건립한 '한'이 있는데, 구분을 위하여 우리는 "현한(玄漢)"이라 부른다... 2020. 4. 10.
유비는 익주(益州)를 취한 후 한중(漢中)을 형주(荊州)보다 중시했다. 글: 지역사(知歷史) 유비는 214년 익주를 취한다. 그후 215년 제1차 형주위기가 발생한다. 즉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한중의 장로(張魯)에 군사행동을 취한다. 유비는 익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동오의 요구를 받아들여 형주를 재분배하고, .. 2020. 4. 2.
삼국시대 가장 광망(狂妄)한 6 마디의 말: 조조, 관우, 전위 글: 전복역사(顚覆歷史) 자고영웅출아배(自古英雄出我輩) 융중결책천하분(隆中決策天下分) 다소고금쟁패사(多少古今爭覇史) 난평청사삼국쟁(難平靑史三國爭) 이 가사는 삼국의 광망과 패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광망한 것은 삼국에 나오는 이 몇 마디 말일 것이다. 첫째는 .. 2020. 1. 9.
왜 유비의 촉한진영에 반도가 가장 많았을까?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삼국지>에서 유비에 대한 평가는 "홍의관후(弘毅寬厚), 지인대사(知人待士)"였다. 그에게 "한고조의 풍이 있고, 영웅의 그릇이었다." 조조도 유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늘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 조조뿐이다." 손권은 이렇게 말한다: "유예주(유.. 2020. 1. 3.
유표(劉表) 휘하의 7대맹장은 위,촉,오로 어떻게 나누어졌는가? 글: 취관역사(趣觀歷史)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삼국은 군웅이 다투던 시기이다. 저명한 모신(謀臣), 무장(武將)이 많이 나타났다. 동한 말기에 굴기한 각로의 군벌을 살펴보면, 그들의 휘하에 인재들이 아주 많았다. 형주(荊州) 일대는 당시 부유한 곳으로 병가의 필쟁지지이다. 자연히 능력.. 2019. 10. 11.
촉한(蜀漢)이 멸망한 후 유선(劉禪)의 아들 7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선(207-271)은 형주 강릉 사람으로, 촉한 회제(懷帝(재위223-263)이다. 후주(後主)라고도 부른다. 자는 공사(公嗣)이고, 아명은 아두(阿斗)이다. 촉한 소열제 유비의 아들이다. 모친은 소열황후 감씨(甘氏)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제2대황제이다. 재위41년으로 삼국시기.. 2019. 7. 5.
역사상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글: 야독사서(夜讀史書) <삼국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유비와 제갈량이라는 군신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을 것이다. 유비는 일찌감치 사람들에게 '유황숙'으로 불리웠지만, 처지는 비교적 비참해서, 반평생을 여기저기 떠돌며 지냈다. 그리고 시종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 2019.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