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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두두(林豆豆)는 부친 임표(林彪)의 9.13사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by 중은우시 2021. 12. 22.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공당장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명시되었던 임표가 그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하북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했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국의 십대원수중 한 명이다. 1949년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를 맡았다. 문혁때,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에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올랐다. 임표의 사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 모택동의 암살을 기도한 원흉으로 규정된다. 문혁이 끝난 후에는 "임표.강청반혁명집단"으로 규정된다.

 

임표가 산해관공항을 이륙하기 전에, 그의 딸인 임두두는 이 소식을 당시의 중국총리 주은래(周恩來)에게 보고한다. 임두두는 이로 인하여 한때 "당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치켜세워졌었다.

 

임두두가 주은래에게 전화하다.

 

임두두의 본명은 임입형(林立衡)이다. 1944년 8월 31일, 연안에서 태어났고, 임표와 섭군 사이의 유일한 딸이다. 6살때, 임표는 모스크바로 가서 요양하는데, 그녀도 함께 간다. 1962년 청화대학 전자공정계에 입학했고, 그후 북경대학 중문계로 전학간다. 문혁때, 나이 겨우 23살의 임두두는 <공군보(空軍報)>의 부총편집인이 된다. 

 

1971년 9월 12일, 임표의 일가족은 북대하(北戴河)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임두두와 장청림(張淸林)은 약혼식을 거행한다. 이는 임표 일가족이 북대하에서 보낸 휴가 7일째였다. 그때 임두두는 집안의 분위기가 정상적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날 저녁 11시경 임두두는 북대하의 중앙경위단을 통하여, 주은래에게 전화로 보고한다. 섭군, 임입과등이 자동차를 타고 부친 임표를 데려가려고 한다. 당시 임표는 이미 수면제를 먹었고, 북대하에서 자동차에 탈 때, 두 사람이 부축을 해서 올랐다.

 

임두두는 섭군, 임입과의 '음모'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중앙경위단에 4가지 건의를 한다. 첫째, 대형트럭 1대를 동원해서 도로를 막는다. 둘째, 큰 나무를 잘라서 도로를 막는다. 쌍봉산의 도로는 넓지 않고, 양측에는 큰 소나무들이 많으므로, 한 그루 잘라내는 것은 간단할 것이다. 셋째, 20명의 경위전사를 동원해서 차량통행을 막는다. 넷째, 공항도로를 봉쇄한다. 그러나, 중앙경위국이 주은래에게 보고했으나 주은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임두두가 전화를 받아들고 직접 주은래에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반대의 '지시'였다. 그녀는 주은래의 지시를 듣자 화가 나서 수화기를 집어던진다. 이때 밖에는 총성이 이미 울렸다.

 

그후, 임표는 순조롭게 산해관공항에 도착했고, 순조롭게 이륙한다. 보도에 따르면, 임표는 원래 남으로 날아가서 광주로 가고자 했다. 다만, 비행기는 북으로 날아가서 몽골경내로 간다. 그후 몽골에서 비행기는 추락하고 탑승자들을 모두 사망한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건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사건발생후 모택동은 그의 기요비서 사정의(謝靜宜)를 보내 임두두에게 구두로 전한다: "너는 큰 공을 세웠다!"

 

임두두의 소위 '진술'

 

1971년 10월 4일, 임두두와 그의 약혼자 장청림은 북대하에서 북경 옥천산(玉泉山)으로 끌려가서 중앙전안조(中央專案組)의 조사를 받았다. 그후 북경위수구 모 사단본부의 주둔지로 옮겨진다. 전안조의 책임자는 모택동의 기요비서 사정의였다. 사정의는 임두두가 진술하여야할 리스트를 제시한다. 그 리스트에는 "9.13사건의 경과, 임표와 유소기, 등소평등과의 관계, 특별히 9월 12일 저녁 섭군과 주은래의 통화내용이 들어 있었다.

 

임두두는 계속해서 말했다: 임표는 섭군, 임입과에서 속아서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다만 그것은 모택동이 듣고싶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정의는 반복하여 그녀를 설득한다. 때로는 네가 제대로 진술을 잘 하면 너의 <공군보> 부총편집인의 자리를 유지하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때로는 너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말라. 반드시 가족들과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 임표의 음모를 사실대로 진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고 저쩌고....

 

사정의로부터 반복되는 비판을 받은 후, 임두두는 임표가 일찌기 말한 바 있는 모택동에 관한 '나쁜 말'을 진술하고, 또한 "모주석 신변에도 섭군과 같은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진술서를 상부에 보고한 후, 전안조는 비판을 받는다. 임두두는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그녀가 일부러 '독을 넣어' '위대한 지도자'를 공격했다고 말한다. 그후 그녀의 처지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신분은 '9.13사건'의 공신에서 '임표가 남겨둔 비선'으로 바뀐다.

 

임두두에게 진술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사정의는 그녀와 장청림에 대한 '육채일탕(六菜一湯)'의 식사대우를 일일 삼천으로 그저 보통병사식당에서 해주는 식사를 하도록 바꾼다. 그후 매일 그녀를 압박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임두두는 모택동이 원하는 내용을 얻어내지 못한다. 사정의는 그래서 방법을 바꾼다. 장청림을 회유하기 시작한다. 그들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그들에게 각각 다른 건물에 거주하게 한다. 그후 사정의는 장청림을 설득해서 그에게 모택동의 편에 서도록 요구한다. 잘 협력해야만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압박한다.

 

사정의는 임두두, 장청림을 반년가량 압박한 끝에 장청림이 마침내 사정의가 원하는대로 진술서를 초안한다. 사정의가 내용을 수정한 후, 다시 임두두에게 베껴쓰도록 시켰다. 그후 모택동에게 보내어 살펴보게 한다. 모택동은 만족했고, 이 사건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임두두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1972년 8월 26일 저녁, 주은래는 인민대회당에서 임두두, 장청림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 임두두는 다시 한번 임표는 섭군, 임입과에게 속아서 비행기에 오른 것이라고 말하고, 주은래에게 혼이 난다. 주은래는 그 자리에서 선언한다. 자신이 직접 임두두를 관속(管束)하겠으며, 임두두에게는 공군으로 돌아가 군중운동에 참가하며 '재교육'을 받도록 요구한다.

 

임두두가 공군으로 돌아간 후, 공군은 유명한 여성조종사 제혜분(諸惠芬)등을 보내 소위 '교육'을 실시한다. 중앙조직부의 책임자인 곽옥봉(郭玉峰)과 공안부 부부장 이진(李震)도 삼일이 멀다하고 와서 내용을 살펴본다. 고압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임두두는 수면제를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301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후 다시 살아난다. 그후 임두두는 공군보사로 보내어지고 다시 격리심사를 받는다.

 

공군보사에서 임두두는 비투를 당한다. 그녀가 다시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녀는 겨우 8평방미터의 조그만 방에 가두어두고, 24시간 감시했다. 방의 창문은 신문으로 막아놓았으며, 방안에는 밤낮으로 불이 켜져 있었다. 모기장을 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모기에게 물려서 온몸이 부풀어 올랐다. 간수는 매일 희석시킨 농약 디디티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뿌렸다. 방안의 공기는 탁했고, 수개월동안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팔이었다. 간수는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매일 그녀에게 팔을 내밀도록 해서 반시간동안 태양을 쬘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이빨 6개가 빠지고, 머리카락은 절반정도 빠졌으며, 체중은 겨우 35킬로그램이 남았다.

 

1974년 7월 31일,공군정위 고후량(高厚良)이 임두두에게 모택동의 '최고지시'를 전달한다: 감호를 해제하고, 그녀가 장청림과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낟. 중공정치국에서 토론을 거쳐 임두두를 농장으로 내려보내 노동개조시키기로 결정한다. 1974년 8월초, 임두두와 장청림은 황하가의 한농장으로 보내어진다. 농장은 처음에 그녀에게 과수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맡겼다. 그녀의 피부는 농약에 과민반응을 보여, 온몸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간지러웠다. 나중에 그녀는 소를 끌고 농사짓는 일을 한다. 그후에 그녀는 풀을 뽑고, 돼지를 먹이며, 술을 양조하는 일을 한다.

 

임두두는 정주(鄭州)로 하방되다.

 

1975년 10월, 문혁때 "당내제2호주자본주의도로의 당권파"로 타도된 등소평이 다시 등장해서, 병중인 주은래를 대신하여 중앙업무를 주재한다. 등소평은 임두두를 부대에서 퇴역시켜 지방에서 일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임두두는 북경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거절당하고, 최종적으로 하남 정주로 보내어진다.

 

임두두는 정주자동차제조공장으로 배치되어 1분공장에서 과장급간부인 공장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하급관리이지만, 실제로는 '공안부중점감시대상'이었다. 하남성 공안청은 그녀의 안전을 엄격하게 제약했다. 그녀의 일상행동은 공장혁명위원회에서 파견된 사람이 '보호'했다. 허가없이는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허가를 받아 외출할 때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1976년 5월 등소평이 다시 타도된다. 임두두가 정주로 온 것은 등소평이 동의해서였다. 등소평이 낙마한 후, 임두두에게도 악운이 닥친다. 그녀의 혁명위원회 부주임의 직위가 취소되고, 공장의 일반노동자로 보내어진다. 노동하면서 그녀는 무거운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불행히도 오른발의 4개의 발가락이 골절된다. 그녀가 사는 낡은 집은 농약공장에 붙어 있었다. 농약공장에서는 계속 농약냄새가 퍼져나와서 그녀의 약물과민반응은 더욱 악화된다. 약냄새만 맡아도 몸이 붉게 부어오르고,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설사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과민성결장염과 십이지장설사증이 발작한다. 그녀의 병은 매일 발작했고 몸은 쇠약해진다. 그래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1984년 2월이 되어서 더 이상 힘들게 되자 병원에 입원시킨다. 노동자로 일하는 동안 그녀는 출근퇴근하는 외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가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받아왔고 다른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1978년 12월 중공11기 3중전회부터 '개혁개방'을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었다. 임두두의 매달 급여는 겨우 76위안이었다. 그녀의 남편 장청림의 월급은 90위안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작은 집에는 가구를 살 수도 없었고, 목판과 종이상자에 물건을 놓아두었다. 가장 사치스러운 물건이라면 작은 흑백TV였다.

 

임두두는 계속 상방(上訪)한다.

 

10년문혁이 끝난 후, 북경에는 많은 상방호가 나타난다. 임두두도 상방대군중의 일원이었다. 계속하여 상방, 신소하며 북경으로 돌아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1981년 11월, 임두두와 장청림은 함께 북경으로 상방을 간다. 그녀는 총정치부를 찾아갔고, 다시 중앙군사위원회 접대처를 찾아간다. 그날은 이미 저녁 10시였고,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그들은 빙천설지에 서서 아직 식사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접대소에서 중앙군사위에 보고한 후, 그들을 부근의 창교여관(廠橋旅館)에서 자비로 하룻밤 머물도록 안배해주었다. 마지막에 그들을 접대한 단위는 중앙조직부였다.

 

1980년대중반, 임두두는 북경에서 당시 중공총서기인 조자양(趙紫陽)에게 편지를 쓴다. 임표의 부하였던 도주(陶鑄)의 부인이며 당시 중앙조직부 부부장으로 있던 증지(曾志)의 도움으로 그녀의 신소서가 마침내 상부로 올라간다. 얼마 후, 조자양이 지시를 내린다. 개략적인 내용은 XX에게 그녀를 찾아가서 얘기하고, 상황을 알아본 후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이다.

 

다시 여러 사람의 노력을 거쳐 1987년 임두두는 마침내 북경으로 돌아와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일하게 된다. 1989년임두두는 "중국현대문화학회"라는 기구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나중에 이 학회의 아래에 기업문화전문위원회와 구술역사전문위원회를 설치한다. 임두두는 많은 노력을 들여서 '구술역사'분야의 일을 한다. 2002년에 은퇴할 때까지.

 

임표사건의 진상은 드러나는 중이다.

 

임표사건에 관하여,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표한 것은 많은 내용이 거짓이다. 예를 들어, 1971년 9월 18일 반포한 중앙57호문건에서 임두두는 "긴요한 순간에 임표, 섭군, 임입과가 사적으로 비행기를 구해서 나라를 배신하고 적국에 투항하려는 음모를 고발해서 당에 공을 세웠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임두두는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염황춘추(炎黃春秋)> 부주편 유가구(劉家駒)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중국 "해방군출판사" <성화요원(星火燎原)>편집부의 요청을 받아 <임표전>을 쓴 바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근 백명을 인터뷰했고 많은 신뢰할만한 사실을 얻어낸다. 결국 "임표반당집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임표는 "9.13사건"에서 무죄이다. 임표는 무슨 모택동을 모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괴수가 아니다.

 

결론

 

중공의 주장대로라면, 임두두는 당에 큰공을 세웠다. 그렇다면 당은 마땅히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어야 한다. 왜 당은 임두두를 그렇게 힘들게 괴롭혔을까? 왜냐하면 중공은 서방에서 온 '공산주의유령'이 지배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류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강을 건너면 다리는 철거한다. 맷돌을 다 돌리면 나귀는 죽인다. 이것이 중공의 관용수법이다. 네가 쓸모있을 때는 네가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해주지만, 네가 쓸모없을 때면 너는 낡은 걸레만도 못하다. 네가 걸리적거리게 되면 너는 어김없이 숙청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