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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관우의 후손이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1. 12. 25.

글: 선한(宣漢)

 

중국인에게 "의용(義勇)" 두 글자의 화신인 관우는 성공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동맹군에게 성을 빼앗기고 도망치다가 죽는다. 그의 최후는 역대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관우의 장남 관평은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맥성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붙잡혀 부친과 함께 죽는다. 차남 관흥은 제갈량이 중시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띨 관씨는 여몽의 손에 붙잡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관우의 혈맥은 그리하여 더욱 희박해지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수백년 천여년이 지나는 동안 관우는 역대군왕, 무인,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신으로까지 모셔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일부 관우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정부의 녹봉과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우의 후손은 이어져 내려왔던 것일까?

 

아주 유감스럽지만,

필자가 현재 볼 수있는 자료들로 분석해보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없다"는 것이다.

 

먼저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촉기(蜀記)>의 다음과 같은 기재이다:

 

"방덕의 아들 회는 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한다. 촉을 멸망시키고 관씨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龐德子會, 隨鍾,鄧伐蜀, 蜀破, 盡滅關氏家)

 

방덕의 아들로서, 방덕이 이렇게 할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나라때 사람들의 효도는 후세의 사람들처럼 형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혈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은 전국시대 이래 전해내려온 대효(大孝)이다.

 

방회가 손을 쓴 것은 분명 종회, 강유가 죽은 후, 성도가 대란에 빠졌을 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사마소(司馬昭)가 감독을 위해 파견한 진서장군(鎭西將軍) 위관(衛瓘)은 국면을 통제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방회의 행동을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란의 시대에 이렇게 정확하게 행동하는 것은 난이도가 높고, 위험이 따른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빠르게 시작해서 빠르게 물러나며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요결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관씨일족을 멸족시키는 것에 방회는 일찌감치 계획을 세워놓았고, 시기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회는 그가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종회가 사마소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위나라장수들을 촉한의 조정에 불러모았고, 종회의 심복장수와 촉한의 장수를 제외한 나머지 위나라장수들은 종회에 의해 감금당한다. 방회는 사마소가 종회에게 배속시킨 장수이다. 분명 하후화(夏侯和), 호열(胡烈), 양수(羊琇)등과 함께 촉한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감옥을 빠져나와 종회, 강유를 죽인 후, 큰 혼란에 빠졌고, 그 기회를 틈타 방회는 관씨일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사전에 준비가 없었다면 그렇게 깨끗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촉기>에는 "방회가 관씨일가를 멸족시켰다"고 하였지, "혼란을 틈타 관씨를 죽였다"든지, "방회의 병사들이 관씨를 죽였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역사서에 관우의 후손의 최후에 대하여 이렇게 한 마디로 기재되어 있지만, 기실 너무나 분명하게 적어놓았다. 관씨는 멸문을 당한 것이다. 관우의 후손은 살아남지 못했다.

 

후세의 지방지에서 관평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필자는 감정적으로는 믿고 싶지만, 지방지를 살펴본 결과 이는 그저 바램일 뿐이다.

 

주요증거는 이미 얘기했고, 간접증거를 얘기해보자.

 

첫째, 1차샤료인 <삼국지> 그리고 다른 중요한 사료인 <진서>, <영웅기>, <촉기>등등에 관씨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진수는 비록 가난했고, 직업적인 소양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그의 문필과 능력은 인정한다. 만일 관우에게 관평, 관흥외의 아들이 있었다면 분명히 써두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우, 관씨는 촉국에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써놓지 않았다.

 

둘째, <진서>를 보면, 사마염은 수집광이다.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제갈가를 좋아했으며, 새로 거둔 한나라의 유로들에게 잘 대해준다. 제갈경(諸葛京), 장소(張紹)도 모두 잘 대우받았다. 그래서 만일 관씨의 후손이 남아 있다면 그가 빠트렸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없다.

 

셋째, 한조(漢趙)의 건립자이자 유씨성의 외손이며 '소수민족집단남하'의 대표인물인 유연(劉淵)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유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연이 아주 정명하고 한나라와 흉노의 스토리를 잘 알고 있으며, 세력을 얻은 후에는 자신의 혈연을 이용하여 패국(沛國) 유씨들과 관계를 맺어 자신을 유씨의 합법적인 승계자로 포장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를 통해서 진(晋)을 대체하는 합법성을 취득하고자 했다.

 

그래서 만일 촉한중신의 후손을 찾을 수만 있으면 관직과 작위를 내렸다. 그래야 한조의 합법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한나라의 유신들은 집단적으로 하동(河東)에 안치했고, 거기는 유연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곡부 공씨에 대한 조작을 본받아, '무안왕'가족을 봉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 그런 기록이 없다.

 

넷째, 남조 송(宋)나라의 관방에도 관씨후예에 대한 기록이 없다.

 

왜 이렇게 얘기하는가? <촉기>의 그 관씨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원문이 아니라, 배송지가 주석할 때 들어간 내용이다.

 

즉, 배송지의 이 사건에 대한 견해를 보여준다.

 

배송지의 신분, 관직을 보면 그는 국가의 관련자료들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남조 송에 여전히 관씨후손에 대한 공식기록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때는 한나라말기에서 그다지 많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남조송의 황제는 성이 유씨이다. 유비와 같은 한나아황실의 혈맥이다. 관씨후손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관우의 후손이라면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도 간접적으로 후세 형주지방지의 그 문씨(門氏)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섯째, 익주에서 찾을 수 있다.

 

서진 중후기, 익주가 전란에 휩싸인다. 반군의 우두머리 이씨가 성한(成漢)을 건립한다. 성한의 군신들의 자질과 정치적 수준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고 한나라에 호감이 있었다. 이 짧은 4,5십년의 평화로운 기간동안 263년에 촉한의 멸망시 훼멸되지 않은 사료들은 보존될 수 있었다.

 

나중에 동진의 대장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고, 이들 자료를 접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환온은 동진 사림의 낡은 기운을 싫어하는 실질파였고, 촉한, 제갈량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조송은 동진의 찬탈자이자 계승자이니 당연히 환온이 서진할 때의 1차사료를 획득했을 것이다.

 

비록 동진의 황실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삼국의 사료는 분명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풍부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방회가 관씨일가를 멸족시켰다'는 이 중요사건에 대하여 배송지가 내놓은 답안은 여전히 <촉기>원문의 그 부분뿐이다. 

 

일부 관색에 대하여 관심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천년이후, 중국의 백성들이 관우와 일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것이어서 사실이 아니다. 마치 <양가장>에서 "아들이 다 죽고 나서 손자가 나서고, 손자가 다치고 나서 과부가 나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웅절사(英雄絶嗣), 영인신상(令人神傷)

화하득속(華夏得續), 보천지행(普天之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