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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문제)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자손을 남겼을까?

by 중은우시 2021. 12. 1.

글: 원재예(袁載譽)

 

1398년, 주윤문이 황제에 등극하여, 주씨 명왕조의 두번쨰 황제가 되었다. 다만, 황제의 자리가 안정되기도 전에 그의 숙부인 주체(朱棣)가 1399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을 기점으로 당시의 수도인 남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주체의 군대는 파죽지세였고, 주윤문의 군대는 계속 패퇴한다. 1402년, 남경성이 함락되고, 황궁에서는 불이 나고, 주윤문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얼마 후, 주체는 남경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에서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전체 정난지변때 대부분의 역사애호가들은 주체의 반란이 4년의 시간을 들여서 건문제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에 탄식하는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은 주윤문이 도대체 죽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당사자인 주체는 건문제가 불에 타서 죽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주윤문이 지하도로 도망쳐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천하를 운유(雲遊)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에는 "무후위대(無後爲大)" 자손을 두어 후대를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여겼다. 주윤문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역사애호가들이 명나라역사를 토론할 때 가장 중요한 핫이슈이다. 다만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하나의 이슈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건문제가 혈맥을 남겼는지 아닌지이다.

 

답은 아마도 예상밖일 수 있다. 고대의 관례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자는 왕왕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대상을 모조리 죽여버려 참초제근하게 된다. 나중에 누군가 다시 복수하겠다고 나서지 못하도록. 그래서 건문제의 일맥은 반드시 모조리 죽여버려야 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명나라 내각수보 이현(李賢)이 쓴 <천순일록(天順日錄)>, 명나라역대왕조에 관한 사서 <명실록>을 보면, 반란자인 주체는 조카의 일맥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 아니라, 잘 먹이고 보살펴주었다.

 

주체가 남경성에 진입했을 때, 건문제 주윤문과 아들 주문규(朱文奎)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러나 주윤문의 혈맥이 모조리 없어진 것은 아니다. 주문규(朱文奎)의 동생인 주문규(圭)는 아직 살아 있었다. 궁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살이었고, 아직 강보에 쌓여 있던 주문규(圭)는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마도 약간의 참회하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혹은 자신의 조카 주윤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주문규(朱文圭)를 병사들이 주체에게 보내자, 주체는 집안어른으로서의 '따스한 정'을 보이며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주문규(圭)는 주체의 칼날아래에서 살아남았고, 금방 정치중심 남경에서 내보내, 주씨집안의 발원지인 중도(中都) 봉양(鳳陽)으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광안궁(廣安宮)에 연금된다. 그후 수십년간 연금상태로 지낸다. 주문규(圭)는 어른이 된 후에 건서인(建庶人)으로 불린다. 주문규(圭)는 먹고 입고 사는데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해주었다. 다만 외부와 연락할 수는 없었다.

 

<천순일록>: 천순초(天順初), 영묘(英廟)는 다시 건문제의 아들 서인(庶人)의 무고함을 연민하여, 그를 연금에서 풀어주고 자신의 뜻대로 결혼할 수 있게 했으며, 출입을 자유롭게 해준다.

 

천순은 바로 명영종의 연호이다. 그는 토목보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구금된 바 있고, 명대종 주기옥에게 여러 해동안 연금되어 있던 황제이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연금의 고통을 겪어서인지 계속 갇혀 있는 주문규(圭)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것같다. 황제로 복위한 후, 명을 내려 주문규(圭)를 풀어주고 그가 마음대로 결혼하고 출입에 제한을 받지 않게 했다.

 

<천순일록>: 당시 서인의 나이 오십육,칠세였다....서인이 연금될 때 막 두살이었다. 나와서 소와 말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했다.

 

2살때부터 연금되어, 56세경에 석방된다. 반백년간 감금되어 있다보니, 막 풀려났을 떄 주문규(圭)는 외부세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백성의 집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는 소, 말도 주문규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주문규는 정식 '출옥'한 후, 비록 높은 작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황족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대우는 받았다. 노동을 할 필요없이 매달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명실록>: 매월 관할부서에서 식미(食米) 이십오석, 땔감 삼십근, 목탄 삼백근을 지급했다.

 

명헌종때, 주문규(圭)의 후손은 잡안에 입을 옷이 부족했다. 명헌종이 이를 알고는 특별히 공부에 명하여 공급하게 한다. 심지어 명효종시기에는 주문규의 후손을 왕(王)에 봉해달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주윤문의 혈맥은 주문규(圭)라는 베이징이 밀착감시하는 인물을 제외하고,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양씨(讓氏)"가 있다. <양씨가보(讓氏家譜)>에 따르면, 주윤문은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장을 하고 도망쳐 나왔고, 후손을 낳았다.

 

도망친 주윤문은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이름을 양란(讓鑾)으로 고친다. "양", "란"은 황위를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양씨가보>에서 양란은 젊었을 때 사방을 돌아다녔고, 말년에는 호북에 정착한다. 그래서 현재 호북에서 온 "양씨"들은 스스로 주윤문의 후예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양"씨들은 자신들이 주윤문의 후손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하지만, <가보> 한권만으로 증거를 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현재 사학계는 여전히 주문규(圭)의 일맥만을 고증이 가능한 주윤문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나 충분한 논증을 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