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황설사(老黃說史)
장개석(蔣介石)이 장경국(蔣經國)을 위해 길을 깔아준 것과 마찬가지로, 장경국도 아들이 순조롭게 자리를 넘겨받게 하기 위하여 고심을 해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의외의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되어, "장가왕조" 제3대후계자의 "등극의 길"을 끊어지게 된다. 바로 "강남명안(江南命案)"이다.
장경국에게는 4남1녀가 있다. 그중 장효문(蔣孝文)과 장효무(蔣孝武)이 장방량(蔣方良)의 소생이다. 다만 장효문은 신체가 허약하여 중임을 맡기 힘들었기 때문에, 장효무가 중점배양대상이 된다.
장효무의 인생이 부친의 안배하에 궤도에 들어가고 있을 때, "강남명안"이 발발하여, 이 유력했던 "이태자(二太子)"는 쓸쓸히 무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효무가 물러나면서, 결국 장씨가족은 정식으로 정치무대에서 퇴출된다.
-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강남명안"
강남명안이 피해자는 중국계미국작가 강남(江南)이다.
강남의 본명은 유의량(劉宜良)이고, 조적(祖籍)은 강소(江蘇)이다. 1949년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도망치고, 유의량도 대만으로 따라와서 대만 국방부의 정치간부반에서 공부하고, 타이페이정공간교(政工干校)(지금의 부흥강정전학원(復興崗政戰學院))에서 훈련받아, 제2기로 신문학과를 이수한다(다만 부대에 지도원으로 파견나가는 것을 거부하여, 학교측에 의해 퇴학당한다).
학교를 나온 후, 언론계에 투신한다. 강남은 그의 뛰어난 글솜씨와 영향력있는 문장으로 <대만일보>의 유명기자의 반열에 들어간다.
강남은 대만당국의 강권정치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몇년간 신문기자를 한 후에, 1967년 <대만일보>특파원 신분으로 미국에 주재하며 미국국적을 취득한다.
강남은 전후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등지에서 공부하고,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계혹하여 필명 "강남"으로 미국의 몇몇 주요 신문잡지에 각종 글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일시에 미국의 중국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84년 10월 15일, 강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교외의 집에서 암살당한다.
만일 보통의 형사사건이라면,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특수한 신분(강남은 FBI의 정보원이었고, 3중간첩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수사했다)과 특수한 저작(미국에서 공개적으로 <장경국전>을 발표했다)으로 인하여 전체 미국신문계를 뒤흔들게 된다.
1960년부터, 강남은 미국에서 <장경국전>을 쓰는 것을 기획했다. 10여년의 준비기간동안 그 본인이 여러번 중국대륙을 다녀오고, 자비로 장경국의 이전 족적이 닿은 곳을 다니면서, 수천킬로미터에 달하는 장거리 취재를 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80년대초반, 대량의 원시자료를 모아 <장경국전>의 초고를 완성한다.
1980년, <장경국전>이 뉴욕의 한 영향력있는 중문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영향이 매우 컸고, 국내외에서 모두 깜짝 놀란다. 당시 장경국은 여전히 신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기가 출판되었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하물며 강남이 책에서 쓴 내용은 당시 독자들이 거의 모르고 있던 것들이었다.
대만당국은 원고의 판권을 매입할 수 없게 되자 사람을 비밀리에 샌프란시스코로 보내, 강남과 공개적으로 발표할 때, 책에서 언급된 장경국의 애정관계내용은 삭제해달라고 협의했다. 거기에는 장효문 및 장효무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해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구들의 권유하에, 강남은 필요한 범위내에서 타협하고, 일부 민감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동의한다. 다만 그는 여전히 이 책의 원고를 거액의 달러에 팔고,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은 거부했다.
얼마 후, 미국출판계에서 일하는 친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장경국전>의 영문판이 미국에서 출판된다. 이렇게 하여 그는 대만당국과 원한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대만의 국방부정보국국장 왕희령(汪希苓)은 제3처처장을 죽련방(竹聯幇) 두목 진계례(陳啓禮)와 연락하여 죽련방의 킬러 오돈(吳敦), 동계삼(董桂森) 2명을 보내, 샌프란시스코의 강남의 집 차고에 잠입하여 강남을 총으로 쏘아 죽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강남명안"이다.
중국외교부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강렬하게 이런 테러리즘의 비열한 짓을 견책한다." 그리고 미국정부 대변인도 성명을 내고, "대만정보기관의 요원이 이 사건에 참여했다. 미국의 영토에서 미국공민을 살해했으니, 이는 아주 엄중한 사건이다."
조사를 거쳐, 미국의 FBI는 죽련방의 킬러를 직접 살인을 집행한 흉수라고 찾아낸다. 미국측은 진, 오 두 사람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대만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언론계에 진계례가 만일을 위해 녹음해둔 녹음테이프를 공개하고, "국민정부"의 정보요원이 개입되어 있음을 입증했다.
장경국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아마도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1985년 1월 10일, 정보국장 왕희령, 부국장 호의민(胡儀敏), 제3처 부처장 진호문(陳虎門)을 체포한다. 그리고 1월 13일 정보국관리가 사건에 관여했다는 점을 시인한다.
3월 1일, 진계례의 가까운 친구로 별명이 "백랑(白狼)"인 장안락(張安樂)은 진계례를 대신하여 녹음테이프를 보관하고 있던 "배영(背影)"(익명)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의 대만인조직이 개최한 "강남명안좌담회"에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소식을 폭로한다. 장효무가 강남을 암살한 원흉이라는 것이다.
"국민정부"는 비록 진계례, 오돈, 왕희령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호의민, 진호문을 유기징역 2년 6개월체 처했지만, 장효무의 명예는 이로 인하여 영원히 "훼손"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장효무를 믿지 않게 되었고, 그는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장효무는 왜 사람들에 의해 "강남명안"의 막후원흉으로 지목되었을까? 이건 그의 '성장경력'과 관련이 있다.
2. 강력하게 떠오른 "이태자(二太子)"
1945년 4월 25일, 장효무는 절강성(浙江省) 봉화(奉化) 계구(溪口)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항일전쟁이 곧 끝날 때였다. 장효무의 탄생은 전란때 이리저리 전전하던 네식구에게 한줄기 기쁨을 더해 주었다.
왜 형은 "효문"으로 하고, 동생은 "효무"로 지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당시 장개석이 장경국, 장위국을 한명은 정치, 한명은 군사를 배우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가천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장효무는 대륙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4살때, 부친과 형을 따라 대만으로 온다. 어렸을 때의 장효무는 형과 마찬가지로 장난꾸러기였다. 대만 장안동로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나, 나중에 사림지구에서 중학을 다닐 때나 형제가 서로 겨룬 것은 시험성적이 아니라, 누가 더 장난을 많이 쳤는지 심하게 쳤는지를 겨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가난한 학생들처럼 죽어라 공부하지 않더라도, 설사 그들의 성적이 엉망진창이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앞날은 밝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앞날, 그들의 장래, 그들의 생활전망은 기실 일찌감치 누군가 그들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원래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할 장효무는 형인 장효문과 마찬가지로, 공부에서는 항상 중하등 수준이었다. 중학을 졸업하기 전날에는 이미 학업성적이 전체반에서 꼴찌로 떨어져 있었다.
타이페이에서 중학(중국,대만은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중학이라 함)을 졸업한 후, 장개석은 장효무를 독일의 군사하교로 보낸다. 그러나 장효무는 군사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었고, 정치에는 흥미가 컸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고집하여 뮌헨정치학원 정치학과로 옮겨 정치를 공부한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장개석과 장경국은 장효무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왜냐하면 장효문은 이미 몸에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자"가 돌아오자,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된다. 장경국은 이미 그를 위하여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놓았다.
장효무는 조취임(趙聚任)과 엄효장(嚴孝章) 두 숙부의 곁에서 어떻게 사람을 상대하고 어떻게 일을 해야할지를 배우도록 보낸다. 조취임은 조항석(趙恒錫)의 아들이고, 엄효장은 엄복(嚴復)이 손자이다. 그들은 모두 장씨집안의 "자기사람"들이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첫째, 장경국이 안심할 수 있고, 둘째, 장효무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당영사업과 공영사업은 거의 모두 "보도회(輔導會)"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6세되던 해, 장효무는 "행정원 국군퇴역관병보도위원회"의 고문이 된다. 이는 부친이 걸어온 정치참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장경국은 바로 이곳에서 8년간 주임으로 있다가 지방의 행정, 경제부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후, 장효무는 다시 국민당 중앙정책회 조직공작위원회 및 국민당 중앙위원회에서도 일을 한다.
짧은 몇년동안, 장효무는 여러 핵심부문에 들어갔고, 직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장경국은 장개석이 자신을 배양했을 때 취했던 원칙인 "명분은 추구하지 않고, 실질을 추구한다"는 것에 따라, 아들을 집중적으로 단련시키고 배양했다.
1979년, 장경국은 장효무에게 특수한 안배를 한다. 그를 "국가안전회의"에 진입시킨 것이다. 이 기관은 국민당의 가장 중요한 부문이다. 부친의 관리감독하에 장효무이 행위는 과거보다 많이 규칙에 따랐다. 게다가 부친이 '총통'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가치는 계속 상승했다.
동시에, 장경국은 장효무를 문화신문계에도 진입시킨다. 1976년부터 화흔문화사업공사 동사장을 겸임하고, 나중에 "중앙라디오방송국" 주임이 되고, 다음 해에 대만텔레비전방송사업협회 이사장, 국민당 중앙당무고문, 신문당부 상무위원이 된다. 1980년에는 중앙방송회사 총경리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장효무는 "춘풍득의(春風得意)"했다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만, 바로 그의 신문업계 종사경력은 그로 하여금 "강남명안"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그의 앞날은 끝이 난다.
3. 조용히 물러난 "장씨3대"
"강남명안"이 비록 공식적으로 처리되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장효무를 믿지 않게 되었고, 그는 만인의 적이 되었다.
장효무의 이미지를 바꾸고, 이번 풍파를 하루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 장경국은 부득이 1986년 3월 장효무를 싱가포르로 파견하여 대만주싱가포르상무대표처 부대표로 임명한다.
그외에 장경국은 추가로 장씨집안의 사람이 "원수"직을 승계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경국의 집안에서 차기 총통경선에 참가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그럴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왜 아들을 싱가포르로 보냈을까? 장경국도 나름대로 고려한 것이 있었다. 대만은 싱가포르와 관계가 밀접했던 것이다.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李光耀)는 자주 타이페이를 방문했고, 그의 모친은 더더욱 대만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1985년 11월 이전에, 리콴유는 타이페이로 조용히 왔고, 기밀을 지킨다.
일찌기 장경국이 "행정원장"으로 있을 때, 이 두 사람은 이미 친밀한 친구사이였다. 매번 리콴유가 오면, 장경국은 항상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녔다. 대만 본섬과 외섬을 거의 다 다녀보았다. 심지어 대륙의 바로 앞에 있는 금문도도 두 사람은 자주 갔다.
두 사람의 교분을 고려하여, 장경국은 아들을 외지로 내보내면서 싱가포르가 가장 안심할 수 있겠다고 여긴 것이다. 오직 싱가포르만이 장효무를 환영해줄 터였다.
장경국이 죽기 1개월전, 장효무는 대만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장경국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한다. 그때는 비록 장경국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것이 보였만, 현실의 환경은 반드시 장경국으로 하여금 결심을 내려야 했고, 둘째아들을 대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야 했다.
장효무는 의사로부터 부친의 병세에 대해 들었던 것같다. 그래서 그는 붉어진 눈으로 장경국의 방에서 하직인사를 한다. 그리고 쓸쓸히 떠난다.
1988년 1월, 장경국이 사망하고, 같은 해 4월, 대만의 일부 "입법위원"은 장효무를 입법원으로 불러 "강남명안"을 조사하자고 제의한다.
장효무는 세태의 염량을 느끼고, 장경국이라는 큰산이 사라진 지금, 그는 더 이상 정치계에서 재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장면은 장효무로 하여금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1991년 그는 마침내 직무를 사직하고, 대만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때 병마도 그에게 닥친다. 같은 해 7월 31일 장효무는 만성췌장염으로 사망한다. 향년 겨우 46세였다.
장효무의 사망은 간접적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선언한다: 대만정국을 40년간 장악해왔던 장씨가족은 정식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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