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진회(秦檜)이다

by 중은우시 2024. 10. 28.

글: 대설(大雪)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악비는 대민족영웅이고, 진회는 대간신매국노라고. 그러나 880년전 악비가 조사를 받을 때,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악비는 당시 남송 최대의 야전군을 지휘했가. 그 규모, 전투력과 영향력은 임표가 지휘하는 사야(四野)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비가 체포되고 살해당할 때, 그의 부하들 중에 그 누구도 나서서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람은 오직 부장 장헌(張憲)과 아들 악운(岳雲)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지 않았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조정의 이 조치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관병들은 설사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야전군사령관인 한세충(韓世忠)은 진회에게 가서 묻는다. 악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진회의 대답은 "막수유(莫須有)" 세 글자였다. 일반적으로, "아마도 있을 것이다"로 해석한다. 필자의 생각에 더욱 정확한 뜻은 "뭐가 반드시 있겠는가?" 혹은 "반드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일 것이다. 즉, 황상의 뜻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무슨 죄명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한세충과 진회의 문답과정을 보면, 한장군은 조심스럽게 물었고, 진승상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한장군은 등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 물어난다. 그는 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유치하다.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대답하는데 누가 감히 더 추궁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최대의 정치는 바로 충군(忠君)이다. 악비와 진회는 충군의 문제에서는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진회의 충군은 절대적, 무조건적이었고, 악비의 충군은 절대적이지 않았고, 개인의 생각도 들어 있어서, 수시로 개성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누가 충신인지에 대한 유일한 재판관은 황제이다.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가 결정을 내렸다면 그것은 영명하고 정확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 나서서 황상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면, 아마 악비 본인부터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진회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악비를 반당집단으로 규정한 사건을 만일 한세충에게 넘겨 처리하라고 했어도 역시 악비는 죽어야했을 것이다.

1962년, 악비 풍파정취의(風波亭就義) 820주년이 지난 후, 최고인민법원은 명을 받아 반한년(潘漢年)사건을 심리했다. 이때 반한년은 체포되어 수감된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합의재판부의 3명의 재판관은 전체 사건자료를 검토한 후, 반한년을 기소한 3가지 죄는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최고인민법원장 사각재(謝覺哉)는 그들의 보고를 받은 후 기치선명하게 지적한다. 반한년사건은 중앙에서 처리하라고 보낸 사건이다. 우리는 그저 법률절차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후 조용히 두 구절을 읊었다:

굴가의어장사(屈賈誼於長沙), 비무성주(非無聖主);

찬량홍어해곡(竄梁鴻於海曲), 기핍명시(豈乏明時)

가의가 억울함을 당해 장사로 유배갔지만, 성군이 없어서가 아니다.

양홍이 바닷가로 숨어들어가게 된 것도, 태평성대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사건담당법관들에게 말했다: "송나라때의 악비는 항금을 주장했다가 모반했다고 무고당했다. 설마 당시에 악비가 억울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송고종은 금나라와 의화(議和)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런데, 누가 악비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사각의의 말은 급소를 찔렀다. 누구도 악비를 구해줄 수 없다. 송고종의 영명한 영도를 옹호하려면 모두 진회가 될 수밖에 없다.

경애하는 총리는 오랫동안 지하공작을 해왔다. 그는 반한년이 억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극농(李克農)에게 당시 반한년이 중앙에 보낸 전문왕래를 대조확인해보라고 지시했고, 반한년이 국민당에 투항하여 일본군과 결탁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극농은 특별히 이를 보고서에 썼다. 그러나 반한년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법원이 아직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택동은 이미 회인당(懷仁堂)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반한년은 죽어 마땅하다고. 그러나,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없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최고인민법원은 '법에 따라' 반한년에게 유기징역 15년형을 내린다.

만일 반한년이 억울한 악비라면 명을 받아 법률절차를 처리한 최고법원원장, 보고한 판결문에 서명한 주총리도 어느 정도 진회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한년의 무게를 악비와 나란히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팽덕회를 당대의 악비라고 한다면 아마 더욱 정확할 것이다.

팽덕회는 1928년 평강폭동부터 1959년 여산회의까지, 31년간 당과 국가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삼십공명진여토(三十功名塵與土), 팔천리로운화월(八千里路雲和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견서 하나가 영수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즉시 반당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직위를 면직당한다. 전체 중앙위원중 장문천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를 옹호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7년후, 북경홍위병은 사천에서 팽덕회를 끌고 와 큰 패를 목에 걸고 비투를 했다.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1959년 여산회의부터 1974년 한을 품고 죽을 때까지, 15년간, 아무도 그를 위해 정의로운 말을 해주지 않았다. 위풍늠름한 9명의 원수, 10명의 대장, 대부분은 일찌기 팽덕회의 부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변호해주지 않았고, 그저 낙정하석(落穽下石)할 뿐이었다.

1962년 7천인대회때 유소기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평반(平反, 명예회복)될 수 있지만, 팽덕회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유소기는 진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겨우 5년후, 유소기 본인이 중공최대원안(寃案)의 피해자가 된다. 그는 개봉의 지하질에서 이를 악물고 진회를 원망했다. 그는 또 누구인가?

등유집단(鄧劉集團)을 숙청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임표를 부통수(副統帥)로 임명했다. 한동안 잘 나갔다. 겨우 5년이 지나 그는 다시 반당집단의 두목으로 지목되고, 몽골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임표의 당에 대한 공헌은 악비에 비견할 만하다. 무적의 전공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는 9대이후 당내의 잔혹한 투쟁을 멈추고 국민경제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악비가 중원을 회복하고 이성(二聖)을 맞이해 오자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악비의 비극을 다시 밟게 되고, 죽어서 묻힐 곳도 없어진다. 또한 후사도 끊긴다. 연좌된 임표의 일당은 수백수천에 이른다. 임표집단사건을 처리한 인물은 진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런 대형사건은 말하지 말자. 기실 우리의 주변에 진회의 그림자는 수시로 보인다. 한명의 법관이 분명 당사자가 무죄라는 것을 알면서, 위에서 유죄라고 결정하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위의 요구에 따라 판결한다. 한 회사의 부서책임자는 회사의 제품이 짝퉁이고 품질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장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도 죽어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인터넷심의원은 분명히 올린 글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의 지령에 따라, 그의 글을 삭제하고 그의 아이디를 봉쇄해야 한다.

옛날 진회는 한세충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하고 당당하게 "막수유"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오늘의 이들 소진회(小秦檜)들은 절대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건 위에서 정한 거야. 나도 방법이 없어." 진회조차도 발끝에 따르지 못할 정도이다.

많은 유리구슬처럼 간사한 탐관오리들은 <만강홍(滿江紅)>을 달달 외우고, 자신의 호화로운 사무실에 걸어놓는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상사를 기쁘게 해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여러 분야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잘 나간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그가 EQ가 높고, 사람을 대하는데 능숙하다고 말한다. 점점, 진회의 인격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사회유기체의 모든 세포에 퍼져나가게 된다.

악비가 되는 것은 정말 너무 어렵다. 자신의 목숨까지는 희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승진하고 돈벌 기회는 놓치게 되고, 기득이익도 놓치게 된다.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양리상권취기중(兩利相權取其重), 양해상권취기경(兩害相權取其輕). 두 개의 이익이 부닥치면 더 큰 이익을 취하고, 두 개의 손해가 부닥치면 그중 더 적은 손해를 취한다. 이해관계는 취사선택의 유일한 기주이다. 그럼 도덕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입으로만 악비를 칭송하지만, 절대로 악비처럼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진회가 무릎꿇고 있는 조각상을 보면서 침을 뱉고, 신발로 뺨을 치지만, 세상을 살아갈 때는 반드시 진회보다 더 진회같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