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신우(李新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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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했기 때문에, 의화단운동은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태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크게 보면, "부청멸양"의 네 글자로 이미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 의화단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들이다.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굴 지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주목한 점은 역시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다.
의화단이 생길 때가 바로 서태후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바로 서양인에 대한 원한이 폭발할 때였다.
먼저, 무술정변이후의 원한이 쌓여 있었다.
무술변법때 외국인들은 광서제와 유신파를 지지했다. 서태후는 어렵사리 국면을 뒤집고 다시 수렴청정하고, 황제를 연금시키고, 담사동(譚嗣同)등 '무술육군자'를 죽여버렸다 그러나, 변법의 주범인 강유위, 양계초등은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국외로 도망쳤다. 그들이 국외로 도망쳤으면 외국은 마땅히 이들을 붙잡아서 청나라로 압송해주어야 했으나, 외국인들은 정반대로, 대청제국의 수배에 협조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해외에서 계속하여 활동하도록 도와주었따. 이희성의 <경자국변기>를 보면, 청나라조정이 현상금 10만냥백은으로 강유위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홍콩영국정부는 강유위를 엄밀하게 보호했다. 심지어 자객을 보내었지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서태후는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 "이 원수는 꼭 갚겠다'고 맹세하면서, 곁에 있던 옥호(玉壺)를 집어던져 부숴버린다. 서양인이 강유위등을 보호한 것으로 인하여 서태후는 일찌감치 서양인이라면 이를 갈았다.
다음으로, 건저(建儲)사건이다.
정변이후 광서제는 연금당한다. 그러나 서태후는 여전히 그를 위협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녀는 먼저 광서제의 병위 위중하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이를 기화로 광서제를 역사무대에서 퇴출시키고자 했다. 서방의 공사들은 이 일에 끼어들어 서양의사를 입궁시켜 진맥하고, 광서제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선포한다. 그리하여 광서제를 병을 핑계로 물러나게 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서태후는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폐립을 준비한다. 1899년말, 영록은 대아거(大阿哥)를 두자는 건의를 한다. 서태후는 왕공대신, 만한상서(滿漢尙書, 당시 육부상서에 만주족과 한족인 상서를 따로 두었다)를 불러 논의하며 광서제를 압박하여 병으로 물러나겠다는 조서를 쓰게 하고, 단군왕 재의의 아들인 부준을 '대아거'로 임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경자년 원년(1900년 1월 31일)에 양위식을 거행하고, 연호를 "보경(保慶)"으로 고치고자 했다. 이렇게 큰 일은 각국공사가 마땅히 입궁하여 축하해야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열강의 공사들은 공공연히 거절하고, 새로운 황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서양인의 광서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서태후를 아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는 서양인들이 여전히 변법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녀의 정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는 무술정변이후 서태후에게는 마음이 병이었다.
서태후가 화를 내고 있을 때,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드는 소식이 들려온다. 상해전보국의 총판 경원선(經元善)이 상해의 상인, 명사들 1천여명을 모아 공동으로 "보황(保皇)"통전을 발표하고, 광서제의 친정(親政)을 간청했다. 서양인이 반대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본국의 신민이 감히 이렇게 하다니 마땅히 엄히 처벌해야할 일이었따.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경원선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다시 영국인이 그를 빼돌려 홍콩으로 보낸다.
만일 서태후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서양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녀는 철저히 강유위당을 제거하려 하는데, 서양인이 강유위를 도와 해외에서 활동하게 도와주었다; 그녀는 겨우 자신의 신하 몇몇을 죽인 것뿐인데, 서방각국은 끼어들어 질책한다; 그녀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싶었는데, 서양인들이 나서서 공공연히 그녀의 내정에 간섭했다. 이때 만일 서태후에게 힘이 있었다면 서양인들을 확실하게 혼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청일전쟁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그녀의 군대는 자그마한 일본조차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열강을 제압할 힘은 전혀 없었다.
바로 이 때, 육현이 그녀의 눈길을 의화단으로 돌리게 만든다. 1899년 겨울, 산동의 비성(肥城)에서 영국 성공회 선교사 브룩스(Sidney Malcolm Wellbye Brooks, 1874-1899)피살사건이 벌어진다. 서방각국의 항의하에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육현을 면직시킨다. 면직된 육현은 북경으로 왔고, 서태후가 그를 접견한다. 육현에게서 그녀는 의화당이 충성스럽고 용맹하여 쓸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육현같은 신하, 의화단같은 민중은 절망상태였던 서태후에게 한가닥 희망이 된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서태후는 열강의 항의와 대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에 대하여 토벌대신 초무를 택하고, "권비"를 "의민"으로 만들어주고 일거에 양식2만담, 백은10만냥을 내려준 것이다.
서태후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왕공대신들도 그렇게 나서서 의화단을 지지할 수 있었고, 의화단도 횡행하는게 거침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이다.
6월상순, 서태후는 이미 의화단을 기용하여 서양인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의화단은 모두 충성심이 있는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좋은 무기를 주고, 잘 훈련시키면, 유용한 강군이 될 수 있고, 서양인을 막아낼 수 있으며 크게 유용할 것이다." 6월 10일, 의화단은 대거 북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같은 날, 외국공사관으 대외통신은 단절된다. 다음 날인 6월 11일, 일본주중공사관의 서기 스기야마 아키라(杉山彬)가 청병에 의해 피살당하고, 배가 갈려진다. 6월 12일, 의화단은 대거 북경으로 몰려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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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태후는 주저한다. 서양인에 대한 분노와 원한은 시종 일치하지만,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자주 오락가락했다.
의화단이 교민을 죽이고, 시민을 죽이고, 점포를 불태우고, 주택을 불지르는 것에는 서태후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군중운동은 항상 통제불능으로 된다. 아문(衙門)이 불태워지고, 대신이 죽임을 당하자 그녀도 동요하게 된다. 그녀가 동요했다는 근거는 바로 16일의 어전회의에서 그녀가 권민의 해산을 명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서태후는 정보를 듣는다. 외국인이 그녀의 권력을 광서제에게 넘기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재의등은 거짓정보로 그녀의 분노에 불을 붙인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양인과 세불양립이 된다. 선전포고는 서태후로는 고주일척(孤注一擲, 올인)의 대결심이다. 극도이 고통과 분노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숭릉전신록>에는 오월 이십일일(즉 6월 17일)의 어전회의에 대하여 이런 기술이 있다:
신각(申刻)에 의란전(儀鸞殿)에서 신하들을 만난다....태후는 유지를 내려: "얼마전에 서양인의 조회가 왔는데 4가지이다. 첫째는 한 곳을 정해서.....오늘 그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다.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그저 두 손을 들고 바친다면 나는 죽어도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다. 기다려서 망하느니, 한번 싸워보고 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등이 죽을 힘을 다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오긱 조회에 4가지가 있다는 것만 얘기하고 두 가지만 언급했다. 끝난 후, 영록에게 물어보니, 그중 하나는 황태후에게 귀정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는 태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재의와 시랑 부량(溥良)의 발언이 특히 격앙되었다. 태후는 다시 큰 소리로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여러 대신들이 모두 들었을 것이다. 나는 강산사직을 위하여 부득이 선전포고할 수밖에 없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므로 만일 강산사직을 보전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모두 있었으니,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니, 책임을 한 사람에게 돌려 황태후가 조종 삼백년천하를 망하게 했다고 말하지는 말라." 태후는 비통해 하고 분개했다. 이렇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지는 어전회의에서는 서태후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또한 더 이상 반대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강경하게 독자적으로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정한다. 나중에 심지어 전쟁에 반대하는 5명의 대신까지 죽여버린다.
선전포고를 결정한 후, 즉시 몇 가지 큰 일이 벌어진다:
6월 20일, 독일주중공사 케텔러가 각국공사를 대표하여 총리아문으로 간다. 도중에 매복한 청나라병사에게 살해당한다.
같은 날, 대청제국의 군대는 권민과 손을 잡고 공사관구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6월 24일, 조정은 서양인을 죽이기 위해 현상금을 내건다: "서양인 1명을 죽이면 현상금 50냥, 서양부인은 40냥, 서양아이는 30냥이다." 이 명령은 서태후가 하달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고, 제지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때 한 가지 사건이 벌어져서 그녀를 다시 망설이게 만든다.
6월 25일 새벽, 단왕 재의, 장왕 재훈, 그리고 패륵 재렴, 재형(載瀅)은 60여명의 권민을 이끌고 대내로 침입한다. 그리고 교민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황상을 만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내뱉는 말이 불손했다. 황상을 "이모자(二毛子)'라고 욕한다. 서태후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시군(弑君)의 정변을 제지한다. 그리고 우두머리인 권민을 죽여버린다.
이 일이 서태후에게 준 충격은 아주 컸다. 그녀는 통제불능을 우려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의가 서둘러 광서를 죽이려는 행동에 대해서도 크게 불만을 가진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녀는 즉시 영록에게 명을 내려, 공사관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도록 한 것이다.
6월 29일, 서태후는 청나라정부에서 팔국연합군의 주중사절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들에게 '선전조서'의 건에 대해 각국에 해석해줄 것을 요구한다. 전문을 보면, 서태후는 열강과 죽기살기로 싸울 결심은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서태후의 권민에 대한 초무는 사실상 그저 미봉책이었다. 의화단이 대량으로 북경에 들어왔을 때, 소탕은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애국이민'의 이미지로 등장하여 대외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그저 배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집중된 역량을 서양인에게 쏟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몇 개의 상유(上諭)는 음미할 만하다:
6월 30일, 조정은 이홍장, 유곤일, 장지동등 각성의 독무에게 보내는 상유가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너희 각 독무는 추세를 살피고 힘을 고려하여 가볍게 외국과 싸우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생각하는 계책의 도리이다. 이번 의화단민이 일어나서 수개월만에 경성에 이미 만연했고, 그 무리가 십수만이 넘는다. 병사들과 백성들 그리고 왕공부제까지 곳곳에 모두 있다. 같은 목소리로 서양과 원수이고 세불양립이라고 외친다. 토벌하려면 화가 가까운데 미쳐 생령이 도탄에 빠질 것이다. 할 수 없이 기용한 후 서서히 구할 방법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상소를 올려 사술로 나라를 지키려한다고까지 말하는데 그것은 조정의 부득이한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각성독무에게, 조정이 어떤 때는 진실을 얘기한다. 7월 22일, 동북지구 고위관료들에게 보낸 상유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탄압할 수 없을 정도의 세이다. 드러내서 싸우는 것은 먼저 하지 말라. 각성에 만일 전투가 있으면, 여전히 권민을 앞세우고, 우리는 드러내놓고 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상황을 보아서 처리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서태후는 연이어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내, 그로 하여금 즉시 입경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다시 그를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한다. 이근 사실상 나중에 평화협상을 할 준비인 것이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서태후가 비록 서양인을 뼛속까지 미워했고, 제국주의와 반대하고자 했지만, 행동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여지를 남겨두었다.
다만, 그녀는 서양인에게 뼛속까지 원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단 서양인을 상대할 기회만 생기면, 그녀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7월 16일 공사관 공격을 멈추라고 명령한 후, 경성의 국면은 약간 완화된다. 자금성과 동교민항간의 담판서신은 날로 빈번해진다. 연합군도 더 이상 북경으로 진군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로 이때 "감수" 이병형이 왔다. 그는 적극적인 저항파이다. 서태후의 앞에서, 그는 허풍을 떤다. 가슴을 치면서 태후를 위해 서양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서태후는 7월 27일 이형형을 만나고, 만난 당일 명을 내린다: 그를 방판무위군군무로 임명하고, 외성에서 오는 몇개의 근왕부대를 그에게 지휘하게 한다. 그후 8월 1일 동교민항에 대한 포격을 재개한다.
서태후는 아주 총명하다. 그녀는 그녀의 대청국을 사랑한다. 제국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서양인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다만 그녀는 서양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의화단을 발견한 후, 그들을 이용하여 서양인들과 싸워보도록 시험해본다. 이건 고수의 바둑이다. 먼저, 권민의 반항충동을 '멸양'으로 이끈 것이다. 조정의 위협역량을 보위역량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이를 통해 서양인들을 혼내준다. 그들이 고통을 겪게 만들고, 더 이상 청나라의 내정에 감놔라 배놔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설사 실패하더라도 조정은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의화단은 그저 인민군중이고 정부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만일 의화단이 정말 서양인을 이긴다면 서태후는 그 결과를 받아먹으면 되고, 만일 안되면 그녀에게 해는 없고, '의민'이 다시 '권비'로 바뀌고 서양인에게 사과하면 된다. 조정은 기껏해야 토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의화단이 이런 최고지도자를 모시고 '반제애국'을 했으니 그 결말은 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그들은 최고지도자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졸지에 위세가 오르고, 하고싶은대로 해버린다. 6월 18일부터, 북경성에는 불길이 솟아올랐고, 길거리에 시신이 넘쳐났다. 그래도 아무도 나서서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역대반란자들은 모두 의화단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최고지도자의 지시를 받들어 살인, 방화, 약탈하는 것이니 천하무적이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의화단운동은 그 종말을 맞이한다.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한다. 16일, 북경점령을 선언한다. 이때 서태후는 이미 황급히 도주중이었다. 서안으로 도망치는 길에 조정은 이미 "죄기조(罪己詔)"를 반포하여, 열강에게 사죄한다. 일은 크게 터졌지만, 책임은 당연히 통치자에 있지 않다. 상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화단은 실로 화를 일으킨 근원이다. 이제 발본색원하여 통열하게 토벌하지 않으면 안된다." 1900년 10월, 이홍장이 명을 받아 북경으로 온다. 그때부터 팔국연합군과 담판을 시작한다. 이홍장은 아주 총명하다. 그리고 경험도 있다. 아주 어려운 상황하에서, 그는 문제해결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의 체면이 깍이지 않으면서, 서양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어야 했다. 의화단을 조정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었따. 이렇게 되니, 서양인을 적으로 삼은 것은 황실이 아니라, 권비들일 뿐이다. 팔국연합군에 대해서도 체면을 차리면서 물러날 수 있게 해준다: 병력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권비의 난을 토벌하도록 도와주었따.
"의민"이 다시 "권비"가 된 것이다. 이제 겁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권비'는 소멸되었지만, 서태후는 돌아왔고, 여전히 대청제국의 최고통치자로 남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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