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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35

장개석의 제4대 자손들 글: 울수원(蔚秀園) 1949년이후 장개석 부자는 전후로 타이완을 통치했다. 1988년 1월 13일, 타이완의 정치강자 장경국이 아무런 사전 조짐도 없이 칠해관저(七海官邸)에서 사망한다. 돌연한 사망이었으므로 국민당 고위층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장경국 사후의 권력배치를 .. 2013. 11. 10.
장개석은 손중산의 사후 어떻게 국민당의 1인자가 되었는가? 글: 녕녕(寧寧) 1918년말, 장개석은 월군(粤軍) 장군들의 배척을 받아 우울하게 군대를 떠나 이직하고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결의형제인 장정강(張靜江)에 의탁한다. 1922년 6월 "총통부포격사건"이 일어난 후, 상해에서 영풍함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손중산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 2013. 2. 4.
장개석의 유언 글: 왕풍(王豊) 송나라때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청명>이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가절청명도리소(佳節淸明桃李笑) 야전황총지생수(野田荒塚只生愁) 뇌경천지용사칩(雷驚天地龍蛇蟄) 우족교원초목유(雨足郊原草木柔) 인걸제여교첩부(人乞祭餘驕妾婦) 사감분사불공후(士甘焚死不.. 2012. 3. 1.
장개석의 결의형제 글: 석학봉(石學峰) 장개석은 일생동안 결의를 맺은 이성형제(異姓兄弟)의 수가 아주 많다. 중국근현대 강호사상 가장 많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이들 이성형제들과 어릴 때 집을 떠나 공부하면서 결의를 맺거나, 혹은 일본에 유학할 때 결의를 맺거나, 혹은 중화민국이 막 건설되었을 때 결의.. 2010. 12. 8.
장개석은 황급히 대만으로 도망친 것인가? 글: 신력건(信力建) 장개석이 1949년 '황급히 도망'(倉惶逃離)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욱(李煜)의 (詞)의 구절을 인용한다: "최시창황사묘일(最是倉惶辭廟日), 교방유주별리가(敎坊猶奏別離歌), 수루대궁아(垂漏對宮娥)". 그러나, 여러 사실을 살펴보면, 장개석은 사실상 대륙을 .. 2010. 11. 21.
1949년 10월 1일: 모택동과 장개석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1949년 10월 1일 새벽: 북경 하늘이 막 밝아오고 있고, 동방에는 해가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 모택동은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산보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약간 피로해 보였다. 신중국의 성립은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 2009.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