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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은 황급히 대만으로 도망친 것인가?

by 중은우시 2010. 11. 21.

글: 신력건(信力建)

 

장개석이 1949년 '황급히 도망'(倉惶逃離)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욱(李煜)의 (詞)의 구절을 인용한다: "최시창황사묘일(最是倉惶辭廟日), 교방유주별리가(敎坊猶奏別離歌), 수루대궁아(垂漏對宮娥)". 그러나, 여러 사실을 살펴보면, 장개석은 사실상 대륙을 떠나는데 일찌감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 질서정연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민당이 대만에서 60여년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준비하고 질서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돈이 가장 먼저이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국공내전이 불처럼 번져갔다. 장개석은 여전히 장강이남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재정부와 중앙은행에 밀명을 내려, 원래 상해사행창고에 보관해두었던 황금의 대부분을 차례로 아직 전화가 번지지 않은 대만으로 운송하도록 명령한다. 남은 일부분은 각 성에 분산해서 군비로 쓰게 하였다. 그러므로, 1948년 12월부터 장개석은 황금을 대만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1949년 1월, 홍콩에 있던 국민정부 중앙은행총재 유홍균(兪鴻鈞)은 장개석으로부터 황금운송에 관한 밀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즉시 상해로 비밀리에 날아가서 이 일을 처리한다. 기밀유지를 위하여, 유홍균과 탕은백(湯恩伯)은 당시 중앙은행 행장 겸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유사업(劉泗業)에게도 알라지 않고, 자신의 옛부하들과 안전한 운송방안을 논의한다. 결국, 중앙은행의 황금을 셋으로 나누어 해상운송하기로 한다. 그중 2번은 하문의 고랑서(鼓浪嶼)로 운송한 후, 다시 대만으로 가져갔다. 상해에 있던 국민정부 중앙은행은 황금을 모두 277.5만냥, 은원을 1520원 보유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3회로 나누어 대만까지 운송하기로 계획한다. 그중 제1회에 200.5만냥을 운송하고 제2회에 57.3만냥을 운송했다. 제3회때는 거의 장개석의 패배가 확정된 때였다. 그리하여 그는 탕은백에게 친히 명령을 하나 내린다. 그에게 친히 사람을 보내어 이 황금을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1949년 5월 17일, 탕은백은 장개석의 명을 받아 친히 사람을 보내어 무력으로 중앙은행으로부터 황금 19.8만냥, 은원 120만원을 운송한다.

 

당시 재정부장인 서감(徐堪)이 장개석에게 보낸 통계리스트를 보면, 민국37년 12월 4일부터 민국 38년 8월말까지, 국민정부는 대륙과 미국에서 모두 2,949,979.279냥의 순금을 대만으로 운송했다. 그리고, 선후로 1,026.000냥의 순금을 대만은행에 보낸다. 이는 주로 신대만화폐를 발행하는 준비금으로 쓰였다. 그리고 12만5천냥의 황금을 동남군정장관공서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모두 115만1천냥의 순금을 꺼내쓴다. 이 자금은 대만금융, 자금을 일으켰고, 전쟁의 폐허와 어려운 시기에 부흥과 굴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돈 이외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서둘러 운송한 것에는 문화재가 있다. 노신의 말에 따르면, "왜 다른 것은 다 놔두고 골동품만 옮겼냐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골동품이 오래된 물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북경을 잃은 후, 몸에 휴대할 수 있고, 언제든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부터, 장개석은 국립고궁박물원과 국립중앙박물원에 잠시 보관하게 한 후, 차례차례 대만으로 운송했다. 항전시기에는 사천 중경으로 운송했던 하남박물관 문화재는 대만으로 옮길 시간이 모자랐다. 당시 교육부장이던 항립무는 장개석에 급전을 보내고 직접 접견한다. 그리고 공군을 보내어 하남박물관의 우수한 문화재를 옮길 것을 건의했고, 동의를 받는다. 그리하여 민국38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두 대의 중화민국 전용기가 중경남안에서 38상자의 진귀한 문화재를 옮겨간다. 이것들은 모두 진귀한 보물들이다.

 

협상을 거쳐, 국민정부는 항립무를 국보이전의 주도자로 하는 국민당문화재연운기구를 만들어, 비밀리어 여러번 얼마나 많은 문화재를 대만으로 옮길 것인지를 논의한다. 기준은 우수한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다. 먼저 고궁박물관의 800상자를 목표로 하고, 당시 영국런던예술전에 참가했던 80상자의 문화재가 위주였다. 나머지단위는 각자 우수한 문화재와 자료를 선별하여 옮겼다.

 

1948년 가을, 국민당정부는 고궁박물원 원장 마형에게 긴급명령을 내린다. 그에게 북경 고궁박물원의 정품문화재에 대하여 명단과 상세한 설명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이들 문화재를 비행기로 차례로 남경으로 운송할 준비를 해놓으라고 한다. 12월, 고궁박물원 이사회비서 항립무는 마형에게 전보를 보내어 남경의 중요회의에 참석하라고 한다. 마형은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다. 마형이 불출석한 상황하에서, 이 회의에서 이렇게 결의한다: 가능한한 빨리 진기한 보물들을 대만으로 운송한다. 그리고 항립무를 운송업무 책임자로 한다.

 

항립무가 마형의 협조를 받지 못하자,  국민당정부는 부득이 자금성의 대량의 황실보물을 대만으로 운송하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그들이 대만으로 철수할 때, 남경의 모든 소장품중에서 20%밖에는 가져가지 못했다. 장개석은 문화재를 대만으로 옮겨가는 결정에 아주 찬동했고, 800만원의 돈을 내서 이 계획을 실행하게 한다. 원래 계획은 5차에 나누어 운송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3차밖에는 실행하지 못했다. 모두 3824상자의 문화재가 대만으로 운반된다. 1933년 북경에서 남경으로 옮겨온 모든 상자의 1/5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1/5은 대부분의 정품 문화재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중 절대다수는 거세무쌍의 당송시대 명가의 작품들이다.

 

항립무 본인의 회고나 기록에 따르면, 대만으로 운송한 제1차문화재중에서 고궁박물원의 320상자, 중앙박물원의 212상자, 중앙도서관의 60상자, 중앙연구원의 120상자, 외교부의 60상자, 합계 700여상자였다. 민국38년 1월 3일, 항립무가 상선을 찾아와서 이틀동안 밤낮없이 문화재를 선적한다. 제2차 문화재는 모조리 대만으로 보냈다. 고궁박물원의 1680상자, 중앙박물원의 460상자, 중앙도서관의 462상자, 북평도서관의 18상자, 중앙연구원의 856상자, 합계 3500여상자였다. 1월 9일, 각 기구의 대표들이 상의하여, 제3차문화재를 다시 대만으로 운송한다: 그중에는 고궁박물원의 972상자, 중앙박물원의 154상자, 중앙도서관의 122상자, 합계 1200여상자였다.

 

3차로 운송한 문화재는 대만에서 새로 소장한다. 이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중 하나가 되며, 세계에 보기 드물게 풍부한 청동기, 서예, 그림, 진귀한 서적등의 소장품을 보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인재운송이었다. 장개석은 공개적으로 '이인위본(以人爲本)'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인재가 나라를 되찾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1948년 11월, 주가화, 부사년, 장경국등은 장개석의 지시하에, 북경,천진의 교육계 저명인사를 '긴급구조'하는 방안을 만든다. 13일, 장개석은 사람을 북경에 보내어 호적을 남하하도록 한다. 그러나, 호적은 당시 북대50주년기념식을 이유로 남하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 날, 장개석이 두번이나 친히 전보를 보내어 호적에게 남경으로 오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14일에는 다시 전용기를 북경으로 보내어, '긴급구조계획'을 실행한다. '긴급구조'대상은 먼저 호적, 매이기(청화대학 총장)였다. 그렇게까지 하자 호적은 남하를 결심한다.

 

12월 15일, 진인각, 모자수, 전사량, 영천리등이 각각 2대의 전용기에 나누어타고 남경 명고궁공항에 내린다. 17일, 북대오십주년기념식은 마침 호적의 57회생일이었다. 장개석부부는 생일축하연을 베풀어주었다. 장개석은 평소에 손님을 청할 때 술을 내놓지 않는데, 그날은 특별히 호적을 위하여 축하주를 내놓았다. 이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장개석이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호적은 부득이 도리상 장개석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말년에 호적이 장개석과 정치적으로 헤어질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1948년 12월 21일, 청화대학 총장인 매이기는 제2차 '긴급구조'대상인 학자를 데리고 북경을 떠나, 남경으로 간다. 국민당정부는 즉시 그에게 교육부장의 직위를 부여한다. 며칠 후에 그러나 그가 사직한다. 그는 국민정부 역사상 최단명의 교육부장이다. 매이기는 대부분의 북경의 교수들을 옮겨오지 못해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당한 수의 학자들은 국민당의 전용기를 타고 북경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중국의 상황이 급변한다. 장개석의 '대륙학자긴급구조계획'은 금은국보를 옮기는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나중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호적, 매이기등 십여명을 제외하면, 전 국민당중앙연구원의 80여 원사들 중에서 60여명이 대륙에 남았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남아있던 사람들은 나중에 사상개조등으로 고통을 겪고, 거의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상황이 된다. 학술적인 성과는 거의 나오지 못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장개석은 대륙을 떠났는데, '황급히 도망'간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철수한 것이다.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전진(轉進)'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진'의 목적지가 왜 서남사천이나 화남양광이 아니라, 바다의 고도 대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