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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1949년 10월 1일: 모택동과 장개석

by 중은우시 2009. 9. 25.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1949년 10월 1일 새벽: 북경

 

하늘이 막 밝아오고 있고, 동방에는 해가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 모택동은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산보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약간 피로해 보였다.

 

신중국의 성립은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고, 업무는 가득 쌓여서, 모택동은 쉴 틈을 낼 수 없었다. 바로 개국대전의 하루 전날 저녁에 원래 모택동은 좀 쉬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력이 충만한 모습으로 다음날 개국대전에 서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느라고 그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가 없었고, 새벽 6시까지 업무를 보았다.

 

모택동이 밤에 책상에 앉아서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경비인원은 여러번 사무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재삼 일찍 휴식을 취하는게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모택동은 고개를 끄덕여서 쉬겠다고 했을 뿐, 사무실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일이 주은래에게 알려졌다. 그는 친히 경비인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경비인원에게 당부했따. 주석은 오후 2시에 회의를 열고, 3시에 천안문에 올라가야 한다. 반드시 주석이 일찍 휴식을 취하도록 재촉하라고 한다. 경비인원은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모택동의 사무실로 들어갔고, 주은래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이때야 모택동은 비로소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벗어났다.

 

비록 모택동이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피로해보이는 얼굴 속에서도 내심 깊은 곳에서 드러나는 희열이 감추어지지는 않았다. 위대한 역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중국인민들은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가!

 

1949년 10월 1일 새벽: 광주 동산매화촌 32호 진제당공관(陳濟棠公館) - 장개석의 광주 거소

 

장개석의 관저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다. 돌연, 전화소리가 울려, 장개석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국민당공군사령관 주지유(周至柔)는 이미 여러번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계속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매번, 주지유가 받은 대답은 "좀 더 기다려라"는 것이었다.

 

"교장, 더 이상 비행기를 띄우지 않으면, 우리는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없습니다." 주지유는 조급하게 장개석에게 최후의 마지노선을 얘기했다.

 

장개석은 갑자기 일어서서 전화통에 대고 말했다: "임무취소"

 

주지유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교장,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임무를 완성하겠다고 보증드릴 수 있습니다"

 

"임무취소" 장개석은 다시 한번 잘라서 반복했다. 그 후에 전화통을 내려놓고, 천천히 쇼파에 다시 앉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9년 10월 1일 오전: 북경

 

모택동은 마당을 10분가량 거닐다가 방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했다. 평소라면 그는 오후3시경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이날을 상황이 특수했다. 그는 특별히 경위(警衛)에게 당부했다: '오후 1시에 나를 깨워라"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킬 때, 경위 소대장 염장림은 모택동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끝에 서서 가볍게 불렀다: "주석, 1시가 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즉시 일어나서 앉았다. 눈을 부비면서, "이렇게 빨리." 이때 경위원은 뜨거운 찻물을 대령했고, 모택동은 왼손으로 차를 받아서 한 입 마신 후, 오른 손으로는 습관적으로 침대끝에 놓인 신문을 들고 훑어보았다.

 

평소에, 모택동은 침대에서 일어난 후, 바로 침대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최소한 침대위에서 1시간 가량을 더 머물면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이날은 예외였다. 개국대전에 참가해야 했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난 후, 바로 칫솔질을 하고, 얼굴을 씻고, 식사를 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모택동은 개국대전에 입고나갈 '예복'을 입었다.

 

이 예복은 왕푸징의 한 복장가게에서 만든 것이다. 기술자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으며, 옷을 전문으로 만들었다. 예복의 스타일은중산복이었고, 옷감은 녹색의 미국장교용 옷감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모택동은 걸어서 중남해 근정전으로 들어갔다.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위원들은 취임선서를 하였다.

 

회의가 끝난 후,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등 중앙지도자들은 근정전을 떠나 천안문으로 가서 개국대전에 참가했다.

 

1949년 10월 1일 오전, 광주 동산매화촌 32호 진제당공관 - 장개석의 광주 거소

 

마음이 어지러운 장개석은 하야한지 이미 8개월째였다. 그는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으며,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따. 어두운 얼굴에는 조그만치도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라디오에서 들이는 공산당뉴스에서 그를 "장적개석(蔣賊介石)"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아주 화가 났지만, 그는 명확하게 인식했다: 현재, 유일하게 해야할 일은 공산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총통에 복직해야 하는 것이라고, 광주 혹은 대만에 의지해서 재기를 노려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때 대리총통 이종인(李宗仁)은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개석은 아주 화가 났다.

 

194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오늘 나는 국가원수의 신분으로 당신과 얘기하려고 왔다" 이종인이 만나자 마자 꺼낸 말에 장개석은 호의를 품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개석은 가만히 앉아서 이종인이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을 들었다. 안색은 아주 난감했다. 이종인은 장개석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이처럼 심한 질책에 대하여도 참고 소리지르거나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장개석은 이종인을 아래층까지 배웅했다. 몸을 돌려 윗층으로 올라온 장개석은 얼굴이 화가나서 얼굴색이 파랗게 되어 있었다. "냥시피(娘希匹, 장개석이 잘 했다는 욕). 정말로 호랑이가 평양에 떨어지니 개한테도 무시당하는구나. 이종인이 어떤 놈인네, 그놈까지 나에게 훈계를 한단 말인가. 바로 쫓아내 버리겠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북경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 위에서 전세계에 선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온 나라는 환호했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광주 동산매화촌32호 진제당공관 - 장개석의 광주 거소

 

장개석은 라디오 옆에서 중국공산당의 뉴스를 계속 듣고 있었다. 그의 많은 옛 부하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에 참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장개석은 화를 내며 일어서서 욕을 해댔다: "냥시피. 멍청이들. 내가 너희들을 박대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누리려고 몸을 팔아먹는 왕빠단들!" 그 외에 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1일 저녁 북경

 

불꽃놀이를 구경한 후, 모택동은 갔던 길을 돌아서 자운헌으로 돌아왔다. 이민, 이눌은 모택동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갔다. 이눌은 길을 가면서 모택동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아빠. 인민군중들은 아빠 만세를 부르고, 아빠는 인민만세를 부르니 참 재미있네요." 모택동은 감격에 차서 말했다: "그렇게 해야 인민들에게 면목이 선다"

 

조금 있다가 이민 이눌 자매는 모주석의 사무실을 떠나면서 경위당직사병인 이가기에게 말했다: "이가기 아저씨, 아빠가 불러요." 이가기는 즉시 모주석에게 달려갔다. 모주석은 "서비서를 데려와라"고 말한다. 서업부(徐業夫)가 오자 모주석은 그에게 "너는 이 두 건의 문서를 교목(喬木) 동지에게 가져다 주어라" 그리고 모주석은 마당에서 잠시 산보하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이가기는 모주석이 침대에 오르려는 것을 보고는,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와주고, 베개를 정리하고, 회색모포를 깔았다. 모주석은 침대에 오른 다음 바로 잠들지 않고, 침상에서 책이나 신문을 한동안 보기 때문에 이가기는 물었다: "주석, 먹을 거리를 좀 올릴까요?" 그러자 모주석은 "배고프지 않다. 좀 있다 씻을 테니, 너는 먼저 가봐라."

 

이가기는 당직실로 돌아온다. 마음 속으로 주석이 하루 종일 힘들었으니, 그래도 먹을 것을 준비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주방에 가서 먹을 거리를 준비시킨다. 그런 다음 주석의 찻잔과 뜨거운 물을 침실에 가져다 놓는다.

 

"가기. 오늘 개국대전이 어땠지?" 이가기가 방을 나가려 하자. 모주석이 물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너무나 흥분되었습니다."

"그렇다." 모택동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나는 28년만에 큰 일 하나를 해냈다. 3개의 큰 산을 치워버렸다. 머리위의 문제를 해결했다. 다음에는 발아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발아래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는 아주 중대하다. 우리와 같은 큰 나라를 건설하려면 아주 큰 힘이 들거야. 그렇지?"

 

1949년 10월 1일 저녁, 광주 동산매화촌32호 진제당공관 - 장개석의 광주 거소

 

장개석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라디오의 채널을 계속 바꾸었다.

 

이때, 라디오에서 북경에서 국민당특무의 파괴활동을 하려는 것을 체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인민정부 개회기간에 교란활동을 하려던 국민당 반동파 특무분자 목검청(木劍靑)은 20일 북경시 인민정부 공안국에 체포되었따. 이 자는 국민당 중통국의 특무로, 가명이 왕건곤(王建坤)이며, 9월 2일 북경으로 왔다....북경시 공안국의 계속된 심문에, 특무분자 목검청은 이미 국민당 중통국이 교란활동을 하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장개석은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쓰레기같은 놈들"

 

밤은 더욱 깊어갔다. 장개석에 있어서 1949년 10월 1일의 이 날은 아마도 일생중 가장 길고, 가장 힘들며, 가장 뼛속에 새겨지는 하루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