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의 결의형제

중은우시 2010. 12. 8. 10:20

 

: 석학봉(石學峰)

 

장개석은 일생동안 결의를 맺은 이성형제(異姓兄弟)의 수가 아주 많다. 중국근현대 강호사상 가장 많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이들 이성형제들과 어릴 때 집을 떠나 공부하면서 결의를 맺거나, 혹은 일본에 유학할 때 결의를 맺거나, 혹은 중화민국이 막 건설되었을 때 결의를 맺거나, 북벌을 진행할 때 결의를 맺었다. 장개석 자신도 인정했다. 그는 일생에서 이성형제와 교분을 맺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이렇게 보자면 장개석은 근현대정치인물중에서 결의형제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개석이 이성형제와 결의를 맺은 역사를 나누어 보면,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청소년시기, 그가 결의를 맺은 것은 고향인 봉화(奉化)의 동향인물, 동창인물이 위주이다; 그가 출도하여 권력을 잡기 전까지 일본, 상해에서 결의를 맺은 사람은 명사들이 많다; 대권을 장악한 후에는, 정치와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서 권력과 세력이 있는 사람들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장개석이 결의형제를 맺은 봉화방 형제들 중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차이가 많다. 그러나 봉화일대의 학자가 위주이다. 22명정도 된다. 거기에는 봉록학당의 직원, 동창이 포함되는데, 주담유, 호조양, 유조한등 10명이다; 취향이 비슷하거나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이유로 결의형제를 맺은 사람에는 강회경, 하록산, 축소강등 12명이다.

 

사회에 나와서 아직 정권을 잡기 전인 1911년부터 1921년의 11년간 8명의 결의형제들과 의결금란의 관계를 맺는데, 그중에는 군인도 있고, 문인도 있다. 이리하여 아주 복잡한 문무형제관계망이 형성된다. 그들은 장군(張群), 진기미, 황부, 장정강, 허숭지, 소원충, 대계도, 오충신이다. 그중 가장 돈이 많은 결의형제는 장정강이고, 가장 학식과 모략을 갖춘 이는 대계도였다. 정치적 지위를 가진 인물로는 진기미, 황부등이 있다.

 

장개석은 소년시대에 삼국연의, 수호전등 고전소설을 즐겨 읽었다. 유비,관우,장비의 도원삼결의, 양산박108호한등등은 모두 젊은 장개석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힌다. 그는 스스로, “6살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놀기 좋아하고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였다. 모친이 비록 계속하여 훈계하였지만, 그의 이런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향에서는 그를 서원무뢰(瑞元無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이 강했다. 부근에서 유명한 해자왕(孩子王, 골목대장)이었다. 16세가 되던 해에, 그는 봉화봉록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는 학생운동에서 날카로움을 드러낸다. 학교측 책임자와 변론을 하면서 기개있게 주장하고 격렬하게 얘기하여, 친구들이 그에게 홍검장군(將軍)”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이를 전후하여, 그는 주담유, 왕은부, 하록산, 유조한, 유진신, 주공양, 진천경, 강회경, 진행계, 손성환, 손동환, 하명세등과 결의형제를 맺는다.

 

이 소년형제들 중에서, 그는 주담유, 왕은부, 하록산등과의 관계가 가장 가까웠다. 생사지교, 문경지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주담유는 장개석보다 5살이 많다. 1906, 주담유는 민주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경감학교에서 공부하며, 구국의 길을 찾는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진기미도 절강사람이므로, 왕래가 잦았고, 그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한다. 이렇게 하여 손중산, 황흥, 요중개, 호한민등 혁명당의 사람들과 알게 된다. 같은 해 5, 장개석도 일본으로 공부하러 온다. 결의형제와 이국에서 만났으니 더욱 기뻤을 것이다. 장개석은 후발주자로서, 이미 동맹회의 회원이 된 주담유에게 감복한다. 하루는, 주담유가 장개석을 데리고 진기미를 만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기미는 장개석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몇 년 후, 진기미는 장개석을 소개하여 동맹회에 가입시킨다. 그는 이렇게 하여 중국의 정치무대에 정식 등장한 것이다.

 

왕은부는 장개석보다 1살이 적다. 어려서부터 무협소설을 좋아했다. 불공평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주먹과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는 무공을 익혔고, 친구들은 그를 비모퇴(飛毛腿)”, “신행태보(神行太保)”라고 불렀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다. 어려서도 그들은 항상 붙어다니더니, 어른이 된 후에는 결의형제가 되었다. 2차혁명이 실패한 후, 장개석이 고향 계구로 돌아가는데, 혁명경비를 모으느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계구의 갑부인 하전목(夏全木)을 떠올린다. 그는 전장의 주인이었고, 사람들이 계구의 최고부자라고 불렀다. 그는 의형제인 왕은부와 비밀리에 상의하여, 하전목에게 돈을 빌리고자한다. 그리하여 그는 가마를 빌린 후, 봉화의 어느 사장과 하 사장이 상담을 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하전목을 설두산으로 데려간다. 하전목은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전정긍긍하게 된다. 이때, 장개석, 왕은부가 솔직하게 말을 꺼낸다. 이런 하책을 쓰게 된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에는 돈이 필요하다. 시기를 놓칠 수는 없다. 선생은 돈이 많으니 1만원을 도와달라. 하금목은 어쩔 수 없이 서신을 써서 1만원을 회계에게 건네주라고 하게 된다.

 

1916 5, 진기미가 암살당한 후, 어찌할 바를 모르던 장개석은 봉화로 자주 돌아가서 여러 결의형제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 장개석은 왕은부와 가장 많이 만났다. 그들은 자주 상해와 영파를 오갔다. 그들의 행적은 영파당국의 주의를 끌었다. 한번은, 그들이 막 영파의 부두에 내렸는데, 비밀리에 미행이 붙었다. 장개석은 미행을 따돌렸지만, 왕은부는 붙잡히게 되다. 얼마후 당국은 왕은부를 극형에 처한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왕은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고 한다: “철환천심삼분열(鐵丸穿心三分熱), 강도과경일시량(鋼刀過頸一時凉)”(쇠구슬 즉 총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도 약간 뜨거울 뿐이며, 시퍼런 강도가 목을 지나가도 잠시 서늘할 뿐이다).

 

하록산은 봉화 초왕묘진 하가촌 사람이다. 어려서 장개석이 자주 하가촌에 갔는데, 그의 외삼촌 즉, 부친의 두번째 부인인 손씨의 오빠가 바로 하가촌에 살았기 때문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하여 하록산과 결의형제를 맺게 된다. 하록산이 형이고 장개석이 동생이다. 원세개를 토벌하는 혁명이 실패한 후, 장개석은 도망중인 지명수배자가 된다. 그는 다시는 상해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된다. 원래는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화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고향 사람들은 얼굴을 서로 잘 알아서, 신분이 폭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생각한 끝에, 초왕묘 하가촌의 외삼촌 집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장개석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 외숙모 장묘연은 계구 사람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장개석의 고모뻘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더욱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다. 하루종일 그를 집안에 가두어두고, 잘 보호해주어서, 탈이 나지 않도록 조치했다.

 

봉화현은 중요범인을 수색하라는 공문이 내려온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서의 간사가 정지국(丁志國)이다. 정지국은 하록산과 교분이 있는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이 일을 알고서는 즉시 정지국을 찾아간다. 대의명분을 얘기하면서, 몇푼의 상금 때문에 고향에서 원망을 사지 말고, 혁명당과 원수가 되지 말도록 설득한다. 봐줄 수 있으면 봐주고, 늦출 수 있으면 늦추라고 한다. 정지국도 그렇게 하겠다고 승락한다. 나중에 정지국은 상사의 재촉을 받아 상사를 모시고 어쩔 수 없이 손씨집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가는 길에 계속 소리를 치면서 간접적으로 손씨집안에 알려준다. 결국 손씨는 그 소리를 듣고서 장개석을 급히 숨겨두게 된다. 경찰이 요란스럽게 손씨집안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일찌감치 장개석의 그림자를 찾을 수도 없게 된 때였다. 장개석은 이때의 위험한 순간을 넘긴 것은 모두 결의형제들이 암중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하록산을 찾아가서 감동하여 말한다: “은형이 나에게 새삶을 주었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1916 9, 장개석은 장정강, 허숭지등과 결의형제를 맺는다. 그들이 결의한 후, 장개석은 장정강의 말이라면 모두 듣고, 스승으로 모신다. 그러나, 장정강은 이를 가지고 계속하여 윗사람행세를 하며, 절제하지 않아서, 장개석이 고민을 하게 된다.

 

1930, 장개석은 사람을 항주로 보내어, 장정강에게 절강성 주석직을 내놓도록 설득한다. 장정강은 화를 내면서 그 자리에서 들이받는다: “나는 절대로 사직하지 않겠다. 내 직책을 파면하라고 해랴.” 그리고 그는 직접 장개석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의 셋째동생(장개석)은 그를 기다리도록 한다. 그는 노기충천하여 사무실로 뛰어들어가서 장개석에게 말했다: “네가 이제 이렇게 폼을 잡는구나. 예전에 총리(손중산)도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장개석은 그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장정강도 점점 정치에서 멀어진다. 나중에 사람을 만나면 관직에 나가지 말라. 좋을 게 없다라고 하곤 했다. 항전승리후 장정강은 미국 뉴욕으로 가서 정착하고, 나중에 뉴욕에서 병사한다.

 

대계도는 장개석보다 4살이 어렸다. 그는 일본유학생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1920, 그들은 결의형제를 맺는다. 장개석은 이 의동생을 아주 중시했다. 그를 외우양사(畏友良師)’라고 불렀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대계도는 장개석을 따르고, 장개석의 조수 겸 모사가 된다. 대계도는 국민당내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았고, 장개석의 고급이론고문이 된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기 전에 장개석과 많은 국민당 고관들은 대만으로 넘어갔는데, 대계도는 대만으로 건너가기를 거절한다. 1949 2 11, 그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광주에서 사망한다.

 

소원충 소장은 장개석보다 3살이 어리다. 1916년에 두 사람은 결의형제를 맺는다. 그후 20년간, 소원충은 장개석의 고굉지신이 된다. 그러나, 그는 대일외교에서 의형인 장개석과 의견불일치가 있었다. “9.18”사변후, 그는 장개석의 대일 화협외교(和協外交)”가 잘못되었다고 보고, 의형에게 일본의 야심을 경계하도록 얘기한다. 그는 여러 번 장개석에 건의하여 민족대의를 중시하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그렇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1936 12, 그는 일 때문에 서안으로 갔고, 때마침 서안사변을 맞이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구금되는데, 담을 넘어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사병이 쏜 총탄에 사망하고 만다.

 

장군은 장개석보다 2살이 어리다. 그들은 일찍이 같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함께 일본진무학교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함께 포병연대에서 실습한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장군도 장개석을 따라 상해로 간다. 나중에 장개석과 결의형제를 맺는다. 1927 4 12, 장개석은 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장군은 장개석의 반공정책에 적극 찬동하여 장개석을 도운다.

 

장군은 장개석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랐다. 그는 큰 성공을 바라지 않고 단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추구했따. 더더구나 장개석과의 특수한 관계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개석의 신뢰와 중용을 받는다. 장개석의 여러가지 중요한 의사결정에 그는 모두 참여한다. 그는 장개석의 고급막료이자 지낭인물이다. 장개석이 내만으로 간 후에도 여전히 그를 따랐다.

 

좋은 바람의 힘을 빌어 나를 구름위로 날려보내다”. 아마도 이것은 결의형제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도와준 것을 의미한 것일 것이다. 장개석은 이들의 힘을 빌어 최고권력자가 되고, 난세의 효웅이 된다. 그러나, 장개석의 이들 결의형제들 중에서 소수의 몇몇은 수족과 같은 관계이고 생사를 나누는 관계였지만, 더욱 많은 경우는 그저 의리를 명분으로 하여 실제는 이용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결의형제를 이용하는 측면에서 자주 자신의 기분에 치우치다보니,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장개석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면, 오히려 원수가 되고, 총칼을 마주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