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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은 손중산의 사후 어떻게 국민당의 1인자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녕녕(寧寧) 

 

1918년말, 장개석은 월군(粤軍) 장군들의 배척을 받아 우울하게 군대를 떠나 이직하고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결의형제인 장정강(張靜江)에 의탁한다. 1922년 6월 "총통부포격사건"이 일어난 후, 상해에서 영풍함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손중산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상해에 머문다. 1923년 가을, 그는 당내대표로 소련에 시찰을 간다.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된다.

 

손중산의 죽음

 

손중산은 혁명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삼민주의를 위하여 살았다. 이 강인한 남방인은 적에게 무너지지도 않았고, 어려움에 굴복하지도 않았으며, 실패로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병마에 쓰러진다.

북방에서 온 초청은 손중산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병을 앓는 몸을 이끌고 북상의 길에 오른다.

원래 싸워서 들어오지 못했던 북경에 그는 맨손으로 들어간다. 원인은 공산당의 지지하에 북경에서 거대한 활동을 벌이고 손중산의 북상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론의 지지는 백만대군보다 나았다.

1924년 12월 31일, 손중산이 탄 기차가 북경전문의 기차역에 도착하자, 각계는 열렬히 환영한다. 환영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10만명에 이른다.

손중산은 민중의 역량을 처음으로 느낀다.

그러나 모든 것은 너무 늦었다.

북경에 도착한지 엄라되지 않아 그는 담낭선암으로 진단받고 협화병원이 입원한다. 의사는 회생불가능이라고 진단한다. 퇴원후, 그는 철사자후통의 행관에 들어간다.

철사자후통은 북경역사상 가장 오래된 골목(후통)의 하나이고, 막힌 골목이다.

명나라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후통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동림당과 엄당의 대격돌이건, 명나라때의 명기 진원원, 청나라때의 여러 황자들간의 격돌, 신해연간의 총통행적등등 이 골목은 약간은 불길한 징조를 띄고 있다.

손중산이 입주한 후, 더욱 괴이한 징조가 나타난다. 행관의 지붕에 까마귀가 매일 모여들었는데 수백수천마리에 이르고 우는 소리가 귀를 찢을 정도였다. 3월 9일부터, 까마귀는 더욱 많이 모여들어 수만마리에 이르고 하늘에 가득해서 마치 하늘을 덮는 것같았다.

양계초는 바로 3월 11일에 행관에 와서 곧 죽음을 맞이할 고향의 옛 친구를 만나러 온다.

양계초의 목적은 단지 하나였다: 이전의 모든 은원은 이에 모두 없애버리겠다.

그러나, 양계초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행관에 들어서자마자 수천마라의 까마귀가 양계초를 향하여 달려들어 그의 목을 앞다투어 쪼으려 했다는 것이다. 양계초는 돌연한 습격을 받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을 들어 미친 듯이 휘두렀는데, 그 모습은 낭패하기 그지없었다.

양계초와 손중산은 평생의 정적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천명인지도 모르겠다.

양계초가 까마귀의 공격을 받은 다음 날(1925년 3월 12일) 새벽, 손중산의 병이 위급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다.

향년59세이다.

평생동안 북경에 들어오고 싶어하던 손중산은 마침내 북경에 머무르려는 꿈을 실현한 것이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

 

손중산이 죽은 후, 유언은 "중국을 구하라"는 것이고, 누구에게 이를 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결과는 즉시 나타난다.

전황조의 황제들이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기업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큰 일로 본 것은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

이때의 광동혁명 대본영은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국민당내에는 신속히 3개의 파가 형성된다.

일파는 원로 호한민(胡漢民)이다. 그는 손문의 "삼련정책"을 반대하여 우파의 영수가 된다.

일파는 원로 요중개(廖仲愷)이다. 그는 손분의 "삼련정책"을 지지하여 좌파의 영수가 된다.

또 다른 일파는 왕정위(汪精衛)이다. 그는 중간노선을 견지했다. 손중산의 정책을 반대는 사람은 왕정위도 반대하였으므로, 왕정위는 좌파를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 삼파가 모두 최고권력을 노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호한민의 발전에 발목을 잡았다. 그는 바로 국민당 원로 요중개이다.

손중산이 죽은 2개월후, 요중개는 <혁명파와 반혁명파>라는 글을 발펴하여, 국민당 우파를 드러내놓고 비판한다. 특히 광동성내 주둔하는 군벌이 각지역을 점령하고 세수를 독점하며 아편관을 열고 도박장을 개설하며 발호하며 인민을 괴롭히는 상황을 통열하게 비판했다. 그는 군대개조를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재정전문가이므로 재정통일도 주장한다.

좌파가 우파에 던진 이 '수류탄'은 폭발력이 아주 컸다.

6월, 국민당은 전체회의를 소집한다. 호한민은 외교부장의 직만을 차지하였다. 자리가 낮으니 그 사람의 무게도 약화된다. 그의 원로신분과는 맞지 않는 직이었다.

호한민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는 명쟁암투를 벌였고, 양파의 투쟁은 갈수록 백열화된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어부지리.

이 어부는당연히 왕정위이다.

왕정위의 혁명경력은 3개이다: 첫째, 그는 오랫동안 혁명가 손중산의 곁에 있었다. 둘째, 왕정위는 일찌감치 명성을 떨쳤다. 셋째, 왕정위 자신이 재능이 있다.

왕정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유명한 황제 부의의 부친인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한 사건이다. 재풍은 당시 중국의 실제통치자이다. 황제보다 더 황제같은 인물이다. 그는 옥중에서 이런 시를 썼다: 강개가연시(慷慨歌燕市), 종용작초수(從容作楚囚). 이때부터 왕정위 세 이름은 천하에 유명해진다.

호한민과 요중개가 서로 싸우는 와중에 1925년 7월, 왕정위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중화민국 국민정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된다. 그때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장개석의 굴기

 

왕정위 주석이 손중산을 대체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에 불복했다. 그가 바로 장개석이다.

1925년초, 장개석 교장은 동정군 총사령관으로 진형명(陳炯明)에게 정식 선전포고한다. 그는 손중산을 위하여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

복수에 바빴던 장개석은 손중산과 함께 북상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더욱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1924년 6월 16일, 그는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된다.

손중산은 자신의 군대를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많은 고생을 겪는다. 소련의 원조하에 이 군관학교를 설립하면서 장개석을 교장에 앉힌다. 이는 장개석이 바로 손중산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장을 맡기 전에 그는 그저 월군 제2군의 참모장에 불과했고, 명목상 참모장이지만 한번도 전투를 지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투경력으로 따지면 허숭지(許崇智), 이제심(李濟深)이 모두 장개석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손중산의 사람이 아니다. 손중산 수하의 심복들중 군사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장개석이 그중의 하나였다.

당시 손중산이 북벌할 때, 이런 일막이 있었다. 이 일막은 동한말기 19로제후가 동탁을 토벌할 때와 아주 비슷했다. 일군의 기세등등한 북벌군 장수들 중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이 우울해하고 있었다. "부인지인(婦人之仁)", "이 자는 함께 도모할만한 자가 아니다"는 탄식을 내뱉고 있다가 결국 혼자서 상해로 간다. 그가 바로 장개석이다. 그는 손견이나 조조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616" 총통부포격사건이 있자, 손중산은 비로소 장개석이 얻기 힘든 군사인재임을 깨닫는다. 장개석의 의견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가 중산함으로 도망친 후, 즉시 장개석에게 와서 호위하라고 전보를 보낸다. 이때부터 장개석은 손중산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된다.

황포군관학교에서, 경력이 가장 많은 이제심은 그저 교련부 주임만을 맡는다. 국민당 원로 요중개는 군관학교 당대표를 맡는다. "당국이론가"인 대계도는 정치부 주임을 맡으나, 1달도 되지 않아 군관학교를 떠난다. 이제심은 근 1년간 주임으로 있다가 제4군 군장으로 나간다.

금방 전체 황포군관학교의 대권은 장개석 1인의 손에 떨어진다.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학교가 중국역사를 고쳐쓰게 될 줄은. 그리고 근 1세기동안 황포의 그림자가 전체 중국을 뒤덮을 줄은.

호종남, 송희렴, 여정만, 유제시, 계영청, 두율명, 진성, 장영보, 임표(임육용), 진갱....

이들은 모두 황포 출신의 장군들이다.

장개석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학교교장의 일을 하고 있을 때, 호한민과 요중개의 투쟁은 왕정위가 주석에 앉고 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해 7월, 일부 요종개를 향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하고, 암살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 시대는 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은 인물이 많았다. 요중개도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8월 18일, 국민정부의 한 회의에서, 요중개의 곁에 앉아있던 왕정위가 그에게 쪽지를 보낸다. 누군가 그에게 나쁜 짓을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요중개는 그 자리에서 말한다: "당과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혁명가의 숙원이다. 거리낄 것이 무엇이냐?"

20일 오전 8시, 요중개는 부인 하향응(何香凝)과 함께 차를 몰아 중앙당부로 가서 중앙집행위원회 제106차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자동차가 당부대문의 앞에 도착했을 때, 요중개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문앞에서 세번째 돌계단을 오를 때, 돌연 두 폭도가 튀어나와 그에게 총을 쏜다. 대문 철책안에서도 폭도가 그를 향헤서 사격을 한다.

20여발의 총탄중 요중개는 4발을 맞았고, 총알은 그의 급소에 꽂힌다.

국민정부의 고위층은 진동을 한다.

누가 막후의 기획자인가? 이 문제는 신속하게 일정에 오른다.

국민정부는 "요중개사건검찰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 명단은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이다.

왕정위는 주석으로, 허숭지는 군대대표로, 장개석은 요중개를 대표하여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요중개의 죽음은 장개석이 최고권력에 오르는데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사건의 진전은 갈수록 장개석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많은 증거는 모두 호한민을 겨냥했다.

어떤 증거는 흉수를 조직하고 매수한 것은 호한민의 당제(堂弟) 호의선(胡毅先) 및 그의 일당인 주탁문(朱卓文), 양홍해(楊洪楷), 위방평(魏邦平) 등이다. 그러나, 호의선, 주탁문은 홍콩으로 도망쳤고,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계속 성명을 발표한다.

이 두 사람이 떠나자, 호한민은 바로 혐의자가 된다. 비록 당내원로이지만, 이제 그는 변명할래야 변명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금방, 그는 국민정부의 특사로 "소련방문"을 한다는 명목으로 광주라는 이 시비의 땅을 벗어난다.

호한민은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좌파원로 1명을 죽이고, 우파원로 1명을 떠나보냈다. 금방 또 한 사람이 부득이하게 떠나야 한다. 그는 바로 요중개사건위원회의 위원이며 군대원로인 허숭지이다.

허숭지도 연루되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조사에 따르면 그의 부하도 암살행동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심복이 체포도고 그의 호위부대는 무장해제당한다. 그의 군대는 무기를 몰수당하고 그의 거처는 엄밀하게 포위된다....

우리는 장개석이 허숭지에게 보낸 친필서신에서 그 경위를 약간은 알 수 있다:

"요(중개)사건의 발생하고, 음모가 드러났는데, 해당반국자는 모두 형의 소속부대원이다..... 사람을 잘 못알아보고 사람을 잘못 쓴 것으로 인하여 이런 큰 참극을 낳았으니 어찌 통한할 일이 아니겠는가..."

장개석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줄은 허숭지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당초에 사람을 잘못알아보고 사람을 잘못쓴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다.

장개석의 핍박으로 허숭지는 어쩔 수 없게 된다. 조용히 광주를 떠나 상해로 간다. 이 장개석의 결의형제이며 한손에 권총을 들고 한손에 담배통을 들고 있던 육군원로는 이때부터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진다.

금방 월군총사령관은 장개석이 차지하고, 각 부대는 개편되거나 해산된다. 허숭지가 국민당 및 국민정부 군사수뇌에서 차지하고 있던 직위는 모조리 장개석이 차지한다.

장개석은 이렇게 하여 생각지도 못하게 당내의 제2인자에 오른다.

이때 장개석의 적수는 오로지 왕정위만 남는다.

장개석이 짧은 기간내에 정치권력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공하려면 반드시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만나면 용감하게 대적해라. 상대와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라. 가장 중요한 점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