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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94

100년전 중국 지식인들의 기개 글: 굴강적아아(倔强的丫丫) 채원배(蔡元培): 자유가 없는 대학교장은 하지 않겠다. 채원배는 일생동안 여러번 사직했다. 그중 북경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전후로 여러번 사직했다. 그는 1917년 1월 4일 북경대학 교장직에 올랐는데, 7월 3일 여원홍(黎元洪) 총통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장훈(張勛)의 복벽(復辟)에 항의했다. 1923년 1월 17일 채원배는 다시 분노하여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음 날 그는 에 북경대학 교장직무를 사임한다는 성명을 싣는다: "채원배는 인격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사법독립과 인권에 간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육당국과는 더 이상 연락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 총통에게 국립북경대학 교장의 직을 사임하겠다고 하였다. 오늘부터 더 이상 학교 업무를 보지 않겠다. 이에.. 2021. 12. 2.
진독수(陳獨秀): 중공 제1대 총서기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금년은 중국건당100주년이다. 100년동안, 중공은 전후로 12명의 총서기(당수)가 있었다. 제1대 총서기는 진독수이다. 재직기간은 1921년 7월부터 1927년 8월까지이다. 그후 진독수는 면직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스파이'로 몰렸고, 여러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뒤집어 쓴다. 진독수는 자가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庵)이며, 안휘 회녕 사람이다. 청나라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이다. 5번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거나 피난을 했다. 북경대학 교수,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을 지냈고, 5.4운동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 1920년 4월 소련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 블라디보스톡분국 외국처는 그레고리 보이틴스키(중국명 吳廷康)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 2021. 4. 20.
"우항시인(雨巷詩人)" 대망서(戴望舒)의 3차례에 걸친 애정사 글: 장계합(張繼合) 저명한 시인 대망서 선생은 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그래서 '우항시인'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우울했고, 일처리도 편집적이었다. 그의 일생에서 전후로 3명의 예쁜 여자들에게 끌려다닌다. 여자들은 감정의 짐을 이용하여 그를 꼭꼭 묶어놓았고, 대망서가 결국 최대의 피해자로 전락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3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은 비록 전후로 대망서와 얽혔지만, 한명도 그와 백년해로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여인(女人)과 화수(禍水)는 등호(=)를 그을 수 있다. 첫사랑을 얘기해보자. 대망서 선생은 친구의 집에 피난을 간다. 거기에서 그는 첫사랑을 만난다. 시강년(施絳年). 당시 두 사람은 처음 보자마자 남녀의 정을 느끼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재미있는 것은 시강년의.. 2021. 4. 13.
중공 제5대 총서기 장문천(張聞天)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1976년 7월 1일은 중공성립55주년기념일이다. 이날, 일찌기 제5대 중공총서기를 지낸 장문천은 그의 유배지인 강소(江蘇) 무석(無錫)에서 심장병이 돌연 발작한다. 당시 그의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 땀이 흘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외국어자료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앞뒤로 10분도 안되는 동안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장문천이 사망한 후, 중공은 부고를 발하지 못하게 막고, 추도회도 열지 못하게 막았다. 유골함에도 장문천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며, 유골함을 장의관의 정청(正廳)에 놓지 못하게 하였으며, 단독으로 아주 작은 창고 안에 놓아두게 했다. 유일하게 일본, 미국, 소련을 유학한 중공당서기 장문천, 가명은 낙보(洛甫)이다. 1900년에 태어났으며, 상해 남회(南匯) 사람이다. 19.. 2021. 4. 8.
"4.8공난(空難)": 제4대 중공 총서기 진방헌(秦邦憲)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1946년 4월 8일, 제4대 중국공산당수를 지낸 당시 중공주중경대표 진방헌, 중공 주중경대표 왕약비(王若飛), 전 신사군 군장 섭정(葉挺), 섭정의 처 이수문(李秀文), 딸 섭양미(葉揚眉), 아들 섭아구(葉阿九)등은 미군관찰조의 C-46수송기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비행기는 안개가 너무 짙어 길을 잃고, 산서성 흥현 흑다산(黑茶山)에 부딛쳐 불이 붙고 폭발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17명은 모두 사망한다. 역사에서 "4.8공난(空難)"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가장 젊은 중공당수 진방헌은 강소 무석 사람이다. 일찌기 소주공업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상해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5.30운동에 참가한 바 있다. 같은 해 연말에 중공에 가입한다. 1926년 10월,.. 2021. 4. 3.
민국사대전신(民國四大戰神)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화민국 40년간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4명의 군사기재가 나타났으며, 모두 휘황한 전적을 거두었다. 백숭희(白崇禧) 근대역사상 광서(廣西)는 전투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계계군벌(桂係軍閥, 계는 광서의 약칭)에 적지 않은 우수한 장군들이 배출된다. 백숭희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1. 1924년 이종인(李宗仁)과 연합군을 성립하여, 겨우 만여명에 불과한 부대를 이끌고 전후로 육영정(陸榮廷), 심홍영(沈鴻英)의 두 군벌을 격패시키고, 이어서 운남(雲南)이 당계요(唐繼堯)도 물리친다. 겨우 1년여의 기간만에 광서를 통일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1살이었다(1893년생). 2. 1926년, 북벌총사령부 대리참모장을 맡아 작전을 지휘한다. 1927년 8월, 직계군벌.. 2021. 3. 12.
유한평(劉漢平): 중국혁명에 투신한 한국인 글: 고효양(顧曉陽) 1 유한평은 한국인이다. 일찌기 필자는 나의 부친의 역사문제를 고발하는 대자보에서 이 이름을 보았다. 대자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한평은 중공 6대중앙위원이고,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시위서기를 지냈다, 1930년대, 필자의 부친은 북평에서 소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류했다. 유한평은 직업혁명가이고, 시종 위험하고 어렵게 살았다. 나의 부친은 자주 그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민국시기 소학교 교원의 수입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때부터, 유한평이라는 역사에 잊혀진 이름은 나의 마음 속에 기억되게 된다. 유한평은 1937년 봄에 연안(延安)으로 왔다. 당시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즈가 거기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연안에는 도서관이 있고.. 2021. 2. 10.
"오중간첩(五重間諜)" 원수(袁殊)의 말년생활 글: 송춘단(宋春丹) 1977년 5월, 베이징역. 한 열차가 막 도착했다. 플랫폼에는 32살된 증룡(曾龍)이 약속한 열차칸의 중간위치에서 긴장한 상태로 양쪽 차문으로 하차하는 승객들을 보면서, 이미 22년간 헤어져 있던 부친을 찾았다. 그의 부친은 바로 해방전에 국민당 군통, 중통, 왕정위정권, 일본특무기관에 들어가 '오중간첩'이라고 불리던 공산당 정보요원 원수였다. 이는 원수가 1955년 반한년(潘漢年)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허가받은 귀휴였다. 아마고 과거의 직업습관때문인지, 그는 서신에서 증룡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잡지를 한권 들고, 8살짜리 딸을 데리고 오라고. 서로 알아보기 편하게. 그러나 증룡은 부친을 알아볼 자신이 있어서, 부친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 열차칸의 승객은 몇.. 2020. 10. 23.
역사상 진실한 길홍창(吉鴻昌): 항일한 적없다. 글: 임휘(林輝) 어렸을 때, 영화 을 보았다. 인상이 가장 깊은 장면은 그가 국민당에 처형되는 그 일막이다. 길홍창은 의자에 앉아, 소리높여 구호를 위치며 죽었다. 당시, 마음 속으로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 이 '영웅'은 중공이 날조한 거짓말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들어낸 '항일영웅' 중공의 선전에서 길홍창은 극단적인 애국자로 항일을 하다가 죽은 '영웅'이다. 그는 일찌기 풍옥상(馮玉祥)의 부대에 들어갔고, 북벌전쟁에 참가한다. 1930년 '장풍염(蔣馮閻, 장개석 풍옥상, 염석산)대전'에 참가한 후, 국민당에 흡수재편된다. 그후 명을 받아 중공의 악예환근거지를 토벌하는데, 태도가 소극적이었다. 1931년 병을 핑계로 상해로 가서 중공과 접촉한다. 그후.. 2020. 9. 14.
민국기녀자(民國奇女子) 정령(丁玲):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해서 3명이 같이 살았던... 글: 왕설정감(王說情感)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현대사회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애정은 독점요구가 아주 강하다. 그런데, 민국시대의 많은 문인들은 혼인과 연애방면에서 그다지 1:1을 고집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정한 사랑, 영혼의 반려를 찾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정령은 민국시대의 기녀자이다. 대표작으로는 와 가 있다. 많은 민국시대의 여작가중에서 정령은 소설을 좀 늦게 발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녀의 유명세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청말민초, 글을 읽고 쓸 줄아는 여성은 아직 많지 않았다. 1904년에 출생한 정령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었고, '반역'사상을 가지게 된다. 이런 '반역'은 그녀의 문학작품의 내용에도 포함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녀의 애정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정령은 전통적인 중매결혼은.. 2020.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