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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4.8공난(空難)": 제4대 중공 총서기 진방헌(秦邦憲)의 최후

by 중은우시 2021. 4. 3.

글: 왕우군(王友群)

 

1946년 4월 8일, 제4대 중국공산당수를 지낸 당시 중공주중경대표 진방헌, 중공 주중경대표 왕약비(王若飛), 전 신사군 군장 섭정(葉挺), 섭정의 처 이수문(李秀文), 딸 섭양미(葉揚眉), 아들 섭아구(葉阿九)등은 미군관찰조의 C-46수송기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비행기는 안개가 너무 짙어 길을 잃고, 산서성 흥현 흑다산(黑茶山)에 부딛쳐 불이 붙고 폭발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17명은 모두 사망한다. 역사에서 "4.8공난(空難)"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가장 젊은 중공당수

 

진방헌은 강소 무석 사람이다. 일찌기 소주공업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상해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5.30운동에 참가한 바 있다. 같은 해 연말에 중공에 가입한다. 1926년 10월, 모스크바중산대학에 파견되어 학습하며 러시아이름을 갖는다. 러시아이름의 중문음역이 "박고낙부(博古諾夫)"이다. 그후 진방헌은 항상 '박고(博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박고는 알지만 그의 본명을 알지는 못하고 있다.

 

박고는 소련에서 3년반 유학하는데, 마침 소련의 교조주의자 드보린학파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이 학파의 특징은 이론을 중시하고, 실천을 경시하여, 이론과 실천이 동떨어진다는 것이다. 1928년말, 박고는 중산대학의 우수졸어생으로 홍색교수학원에 보내어져 훈련을 받는다. 그는 금방 이론학습에서 교조주의경향을 지니게 된다. 소련에 있는 동안 박고는 제3대 중공당수 향충발(向忠發)의 러시아어통역을 맡았었다.

 

1930년 5월, 박고는 프랑스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귀국한다. 상해에서 박고는 전국총공회 선전간사, 단중앙 선전부장, 단중앙서기를 맡는다. 1931년 4월하순, 중공중앙 특과(特科)책임자 고순장(顧順章)이 체로된다. 같은 해 6월 22일, 제3대 중공당수 향충발이 체포된다. 중공중앙의 사해에서의 처지가 아주 위급하게 되었다.

 

1930년 9월초, 중공지도자 주은래, 왕명은 박고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박고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공중앙은 주은래는 강서중앙소비에트구로 가서 중앙국서기를 맡고, 왕명은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국제(코민테른) 중국대표단 단장을 맡기로 했으니, 박고가 당중앙업무를 주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박고는 중공중앙의 총책임자가 된다. 당시 박고는 나이 겨우 24살이었다.

 

박고는 취임후 충실하게 공산국제의 지시사항을 집행한다. '혁명은 한개의 성 혹은 수개의 성에서 먼저 승리를 거둘 것'을 쟁취하고자 했다. 홍군에 중심도시를 탈취할 것을 요구했고, '호남, 호북, 강서 각성에서 먼저 승리를 거둘 것'을 요구했다. 중공의 국민당통치지역에서의 최우선임무는 최대의 역량을 이용하여 도시노동자의 파업투쟁을 전개하여, 홍군의 행동에 협조하는 것이고, 군중에게 무장하도록 호소하여, 국민당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일생을 통틀어 저지른 최대의 실수

 

1932년 12월, 중공정치국상위 노복탄(盧福坦)이 체포된다. 박고는 공산국제에 지시를 요청한 후, 1933년 1월, 중공중앙을 상해에서 강서중앙소비에트구로 옮긴다. 1934년 1월, 강서 서금(瑞金)에서 개최된 중공 제6기5중전회에서 박고는 중공중앙총서기에 당선된다. 

 

1933년 9월 25일에서 1934년 10월까지, 중화민국정부는 약 50만의 병력을 모아, 중공이 성립한 '나라속의 나라'인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5차에 걸친 포위소탕작전을 펼친다. 하건(何鍵), 진제당(陳濟棠), 고축동(顧祝同), 장정문(蔣鼎文)이 4로의 대군을 이끌고 중앙소비에트구를 포위했으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당시, 박고는 중공의 제5차 '반포위소탕'전쟁을 중국혁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계급결전이라고 보았다. 공산국제에 대한 완전한 신임에 근거하여, 박고는 '제5차반포위소탕'전쟁의 군사지휘권을 공산국제에서 중국으로 파견한 군사고문 이덕(李德)에게 넘긴다. 이덕은 중국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자신이 예전에 유럽에서 싸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적을 경계선밖에서 상대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리하여 홍군에게 집중대집중, 보루대보루, 진지대진지의 정규전을 벌이게 한다. 이렇게 하여 소비에트구의 영토를 한치까지 지키겠다고 한다.

 

다만, 국군의 강철콘크리트보루와 달리, 홍군의 보루는 대ㅜ분 나무와 진흙으로 구축한 것이다. 그래서 포화의 맹공을 버텨낼 수 없었다. 비바람도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홍군은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장기간 정면승부의 소모전, 결사전을 벌이면서 홍군의 사상자가 심각하게 많이 나왔다. 이덕의 군사지휘에 대하여, 모택동은 나중에 이렇게 결론내린다: "공격때의 모험주의, 방어때의 보수주의와 포위망돌파때의 도망주의" 

 

1934년 4월, 광창(廣昌)전투에서 홍군은 5,500여명의 사상자를 낸다. 중앙소비에트구의 북대문이 무너진 것이다. 그후 중앙소비에트구의 면적은 급격히 축소된다. 홍군의 사상자는 갈수록 늘어난다. 탈영하는 병사들도 갈수록 많아졌다. 중공은 부득이 중앙소비에트구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장정'을 시작한다.

 

1934년 10월 10일밤, 중공중앙과 홍군총지휘부는 강서 서금을 출발하여 홍1,3,4,8,9군단 및 후방기관 총 8.6만명을 이끌고 상서(호남서부)에서 출발한다. 의도는 홍2,홍6군과 회합하는 것이었는데, 제4방어선을 뚫을 때 상강(湘江)전투에서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홍1군단은 6천여명을 잃는다. 장정전에 10,922명이었던 홍8군단은 남은 사람이 얼마 없어서, 부대를 폐지한다. 홍3군단 제6사단 제18단과 홍5군단 제34사단은 전멸했다. 나머지 각부대의 편제도 절반에 이르지 못한다. 홍군의 총인원수는 8.6만명에서 3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상강의 강위에 떠 있는 것은 모두 홍군의 시체였다. 현지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3년간 상강의 물을 마시지 못했고, 10년간 상강의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후, 홍군은 서쪽으로 포위망을 뚫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전전하며 귀주 준의(遵義)에 도착한다. 1935년 1월 중공은 준의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박고등의 군사지휘에 대한 비판이 진행된다. 회의는 박고, 이덕, 주은래의 3인조를 취소하고, 주덕, 주은래를 군사지휘관으로 하고, 모택동을 협조자로 한다. 그리고 모택동을 중공 정치국상위로 추가선임한다. 이때부터 박고는 중공의 실제지도권한을 상실하게 된다.

 

1935년 2월 5일, 홍군은 귀주 필절림구진 계명삼성촌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중공은 정치국회의를 열고, 장문천(張聞天)으로 하여금 박고를 대체하여 중공중앙 총서기를 맡게 한다.

 

연안정풍으로 숙정되어 죽을 생각을 하다.

 

1941년에서 1945년까지는 항일전쟁의 가장 힘든 시기였다. 중공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연안에 대하여는 공중폭격을 하지 않는 틈을 타서, 4년에 걸쳐 연안정풍운동을 진행한다. 박고는 중공당내의 '교조주의'의 대표자였으므로, 최우선적 대상이 되어 비판을 가장 많이 받는다.

 

모택동은 박고가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조직적으로 각 방면에서 모두 엄중한 원칙적인 잘못을 저질렀고, 각 방면의 잘못이 모였다. 그렇게 하여 형태가 가장 완비된 잘못된 노선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박고는 여러번에 걸쳐 자아비판하며, "내가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조성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더라도 그 손실은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32년에서 1935년까지 중공중앙이 잘못을 범했으며, 자신이 주요책임자라고 인정했다. 교조종파에서 왕명을 제외하면 그가 1위이다. 내전시기에 그는 국내에서 1위였다.

 

박고의 아들인 진철(秦鐵)은 이렇게 회고했다: "연안정풍때, 부친은 숙정을 아주 심하게 당했다. 부친은 자신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내 손에는 부친이 1943년 중앙정치국에 쓴 반성문이 있다. 그 안에는 '죄악이 심중하다'는 류의 말이 있다. 이를 보면 그가 받았던 압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1943년 3월, 중공정치국회의는 이렇게 결정한다: 중앙서기처는 모택동, 유소기, 임필시로 구성된다. 모택동은 중공정치국주석, 중앙서기처주석에 당선된다. 왕명, 박고는 더 이상 중앙서기처의 구성원이 아니다. 1945년 중공 7대에서 선출된 44명의 중앙위원중에서 박고와 왕명을 맨 끝의 2명이다. 두 사람은 7대의 중공정치국에 진입하지 못한다. 7대이후, 박고가 겸임했던 이론분야와 선전분야도 모두 내놓아야 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기이한 이야기

 

박고가 죽은지 57년후, 그가 탄 비행기가 사고난 것에 관하여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대륙매체 <당안시공>은 2003년 제3기에 <섭정 장군이 탔던 비행기사고의 진상을 밝힌다>라는 글을 싣는다. 글에서, 당시 중화민국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중미합작소 특공대장을 지낸 두길당(杜吉堂)은 임종전에 당시 비행기가 산에 부딛친 원인을 얘기했다고 한다.

 

두길당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군통의 명을 받아, 이번 비행기사고를 조직, 기획했다. 당시, 국민당 공군조도과의 과장 왕평(王平)은 공군에 심어놓은 스파이였다. 그는 중공의 중요한 인물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을 알았고, 남경의 최고상사에게 보고한다. 군통에서는 두길당에게 이번 임무를 집행하도록 어레인지한다. 그들은 비행기수리인원으로 변장한 사람을 파견하여 비행기의 고도계와 나침반의 안쪽에 자석을 놓아두었고, 그로 인하여 이번 비행기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이 나오자 많은 대륙매체는 속속 전재했고 널리 알려진다. 섭정의 아들인 섭정대(葉正大)는 광주에서 이 글을 보았다. 섭정대는 북경에서 눈병을 치료할 때, 특별히 박고의 아들 진철, 왕약비의 아들 왕흥(王興), 등발(鄧發)의 아들 등북생(鄧北生)를 그가 머무는 곳으로 불렀고 이렇게 말한다: "사건이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지금 비로소 진상이 드러났다. 군통특무가 죽기 전에 매체에 말했다. 그들이 한 짓이라고." 섭정대는 이렇게 제안한다. 그들 몇명이 나서서 중앙에 보고서를 올리자, 그후 '4.8'열사묘의 앞에 두 군통특무가 그들의 앞에 무릎꿇고 있는 조각상을 만들어놓자.

 

다만, 그들 몇명은 상의한 후 역시 사정을 확실히 알아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시 <신화매일전신>도 이 소식을 보도했다. 그들이 찾아갔는데, 상대방은 원시소식은 신화사가 발송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2006년은 섭정 탄신 110주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4월 8일에 이 소식을 전재한 것이라고 했다. 그후 그들 몇 사람은 나누어서 이 보도의 가장 원시출처가 어딘지를 조사했다. 다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각종 채널을 통해 두길당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얻어낸 답안은 '두길당'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진철은 이 글은 헛점이 너무 많다고 했다. 첫째, 국공회담기간동안 쌍방의 행동은 모두 투명했다. 박고등이 중경을 떠날 때, 신문에 공개적으로 보도되었다. 국민당의 일부 관리들이 배웅을 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무슨 국민당 특무가 이 정보를 얻어낸 것이라는 말은 터무니가 없다. 둘째, 이 C-47수송기는 미국의 '비호대' 조종사가 몰았다. 국민당 특무가 감히 미국인을 같이 죽일만한 담량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철은 '4.8공난'은 단지 사고였다고 생각한다.

 

결론

 

위에서 다른 목적을 지닌 자가 만들어낸 박고의 죽음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는 만일 진철등이 끝까지 파고들어서 확인하지 않고 단지 이 보도만 보았더라면 아주 쉽게 속아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역사의 본모습을 찾으려면, 역사의 진상배후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년은 중공건립 100주년이다. 중공은 중공100년의 역사를 크게 자랑하고 있다. 그중에 얼마나 많은 <섭정 장군이 탔던 비행기사고의 진상을 밝힌다>는 것과 같은 위조된 역사가 있을지는 중국인민들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고서도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확실히 아주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