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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중공 제5대 총서기 장문천(張聞天)의 최후

by 중은우시 2021. 4. 8.

글: 왕우군(王友群)

 

1976년 7월 1일은 중공성립55주년기념일이다. 이날, 일찌기 제5대 중공총서기를 지낸 장문천은 그의 유배지인 강소(江蘇) 무석(無錫)에서 심장병이 돌연 발작한다. 당시 그의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 땀이 흘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외국어자료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앞뒤로 10분도 안되는 동안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장문천이 사망한 후, 중공은 부고를 발하지 못하게 막고, 추도회도 열지 못하게 막았다. 유골함에도 장문천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며, 유골함을 장의관의 정청(正廳)에 놓지 못하게 하였으며, 단독으로 아주 작은 창고 안에 놓아두게 했다.

 

유일하게 일본, 미국, 소련을 유학한 중공당서기

 

장문천, 가명은 낙보(洛甫)이다. 1900년에 태어났으며, 상해 남회(南匯) 사람이다. 1920년 7월, 일본동경으로 유학가서 일본어, 철학과 기타 사회과학을 배운다. 1922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학했다. 1924년 1월 귀국한다. 1925년 6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같은 해 모스크바중산대학, 홍색교수학원으로 파견나가 공부를 하며 조교, 통역을 맡으며 동시에 코민테른 동방부 보도원이 된다.

 

1931년초 귀국한 후, 중공중앙 선전부장이 된다. 같은 해 9월, 중공정치국상위로 보임된다. 1933년초, 강서 중앙소비에트구로 간다. 1934년 1월, 중공 제6기 5중전회에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로 당선된다. 당시 박고가 중공중앙총서기에 당선된다. 박고, 장문천은 모두 소련에서 귀국한 유학생이고,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았으며, 젊은 나이에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소련을 모범으로 삼았다. 강서에서 많은 극좌적인 일들을 저지른다. 모택동도 그들에 의해 숙정당한 바 있다.

 

1934년 10월, 중공 제5차 '포위소탕반격'이 실패한다. 장문천은 중앙홍군 주력을 따라 '장정'에 나선다. 도중에 홍군의 패배에 관해 약간의 반성을 한다. 1935년 1월, 중공은 준의회의를 소집하고, 박고등의 군사지휘로 인하여 참패한 문제에 대해 청산한다. 장문천이 앞장서서 박고를 비판하고, 모택동을 지지한다. 장문천은 중공중앙 총서기로 당선된다. 1943년 3월모택동이 중공정치국주석, 중앙서기처주석이 될 때까지 장문천은 중공당수를 8년간 맡았다.

 

홍군이 장정을 마치고 연안에 도착한 후, 모택동은 강청과 결혼하려 한다. 강청은 상해에서 뎌러 남자들과 스캔들이 있었으므로, 중공고위층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문천에게 서신을 보내 이 일에 반대했다. 장문천도 반대했다. 오랫동안 모택동의 곁에서 일한 양상곤(楊尙昆)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내 생각에 모주석이 가장 낙보(장문천)을 미워한 일은 바로 그가 강청과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중공은 연안에서 정풍운동을 전개한다. 이전 중공의 극좌노선을 청산한다. 장문천도 정풍대상이 된다. 모택동은 장문천을 "양방자선생(洋房子先生)", "언필칭희랍(言必稱希臘)"이라고 비난했다. 소련의 일부 표면적인 일을 알 뿐, 중국에 대하여는 '하나도 몰랐다' 장문천은 계속하여 반성해야 했고, 철저히 숙정당한다.

 

1945년 중공 7대에서 장문천은 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실제업무는 단지 중앙재료실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는 중앙의 각부문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였고, 겨우 4,5명이 일했다. 얼마 후, 장문천은 스스로 동북으로 가서 일하겠다고 요구한다.

 

1949년 중공정권이 건립된 후, 장문천은 먼저 중공 주연합국수석대표를 맡기로 하나, 성사되지 못했다. 1951년 중공 주소련대사로 임명되고, 1954년 귀국하여, 외교부 부부장이 된다. 1956년 중공8대에서 중공정치국후보위원이 된다.

 

여산회의에서 '반당집단성원'으로 타도된다.

 

1959년 7월 소집개최된 여산회의(廬山會議)에서 중공원수 팽덕회(彭德懷)는 모택동에게 서신을 한통 쓴다. 1958년 모택동이 일으킨 대약진운동이래의 문제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적었다. 이는 모택동의 분노를 산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서신을 회의참여자들에게 나눠주고 토론하게 한다.

 

7월 21일 장문천은 화동조(華東組)의 회의때, 3시간여를 얘기하며, 13개 문제를 말한다. 명확하게  팽덕회의 의견에 찬동한다는 뜻을 밝힌다. 어떤 사람이 통계를 냈는데, 발언기록원고 8천여자 중에서 실적을 언급한 것은 겨우 270자이고, 39개의 '다만', '13개의 '균형상실', 108개의 '아주 큰 손실' 및 '너무 빨리' '너무 급하게' '너무 많이'등등의 글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장문천은 이로 인하여 두 가지 딱지가 붙게 된다. "팽덕회반당집단성원'과 '우경기회주의분자'이다. 그는 외교부 부부장의 직에서 면직된다.

 

하산후, 외교부는 전국회의를 개최하여 집중적으로 장문천을 비판하고, 그의 소위 '외국과 내통'했다는 문제를 추궁한다. 여산에서 장문천은 엄정하게 성명을 발표한다: "이는 전혀 없는 일이다. 지금도 없고,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외교부는 계속 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들볶았다. 장문천은 큰 치욕으로 느껴 상심의 눈물까지 흘림, 혈압이 상승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뛰었다. 이어 요독증이 나타나 병원으로 가서 응급조치까지 받는다.

 

그후, 외교부의 장문천에 대한 비판은 '전안심사(專案審査)'로 진입한다. 장문천의 비서 및 그와 관계가 밀접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이 모조리 '장문천반당집단'의 구성원 및 '우경기회주의자'로 규정된다.

 

그후 한동안, 장문천은 일이 없었다. 여러 통의 '구직서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1960년 11월 비로소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 특약연구원의 직을 얻게 된다. 그는 과학원에서 많은 글을 써서,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을 맡고 있던 양상곤을 통해 모택동에게 보낸다. 양상곤은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모택동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문혁때 '감호심사(監護審査)'를 523일간 받다.

 

1966년 5월 문혁이 발발한 후, 중공은 장문천에 대하여 옛일 지금일 모두 끄집어 내서 비판한다. 장문천은 끝도없는 비판, 투쟁, 가산몰수, 감금, 심사를 받아야 했다.

 

1966년 8월 9일, 조반파는 국가경제위원회 예당에서 경제연구소 소장 손치방(孫治方)을 비판하는 대회를 연다. 장문천은 손치방과 '반당연맹'을 결성한 것으로 취급되어 같이 비판대에 끌려 올라가서 팻말을 목에 걸고, 머리에는 큰 모자를 쓰고 손치방의 옆에 서 있었다. 한여름이어서 무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장문천은 혈압이 높았고, 심장병도 있었다. 그래서 버티기 힘들었다. 허리를 숙이고 1시간여 서 있다가 결국 혼절했다. 그는 비판대 뒤로 끌려나갔고, 한 여자 조반파는 그에게 악독하게 욕을 해댔다: 죽은 척 하지 말라. 넌 죽을 수 없다. 장문천은 깨어난 후에 다시 비판대로 끌려 올라가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번 투쟁은 5시간동안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장문천은 부인 유영(劉英)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당시 장문천은 나이가 근 칠십이었고, 고도근시에 백내장까지 있었으며, 혈압은 200/120이었고, 심장발작이 수시로 일어났다. 다만 그는 쉴 수 없었고, 치료도 받지 못했다. 황사가 얼굴에 불어닥치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건 그는 책가방을 들고 시내버스를 2번 갈아타면서 경제연구소로 가서 심문, 비투를 받아야 했다.

 

1967년 7월 26일, 북경항공학원과 북경지질학원 홍위병이 연합하여 군중대회를 열어, 팽덕회, 장문천등을 비판했다. 장문천은 목에 '삼반분자장문천'이라는 큰 팻말을 걸고 두 손은 뒤집어 등 뒤로 돌리고, 머리를 낮추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비투가 끝난 후, 홍위경은 입구에 사람들을 배치해서, 통로를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팽덕회, 장문천에게 주먹을 날렸다. 장문천은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었고 그자리에서 혼절한다. 다행히 두 명의 병사가 재빨리 그를 트럭에 실었다.

 

1967년 8월 21일 한밤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담장을 넘어 장문천, 유영의 침실로 쳐들어 와서, 그들을 끌고 갔다. 한 방안에 끌려들어가서야 거기가 외교부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은 후, 조반파는 장문천, 유영을 끌고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하게 했다. 유영은 먹지 못했다. 장문천이 조용히 말한다. "빨리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죽을 먹고나자, 조반파는 장문천, 유영을 데리고 외교부 건물마당에서 유투(遊鬪)를 했다. 그들은 끌려다녀야 했다. 건물의 아래 위, 외교부의 크고 작은 사무실, 숙사를 모조리 다 돌았다. 오후에는 다시 대회를 개최하여 투쟁했다. 

 

장문천은 반복하여 비투를 받는 동시에, 거의 매일 중앙기관과 전국각지 여러 단위의 조반파로부터 심문, 질문, 조사를 받았다. 장문천이 1967년 11월 27일 제출한 <접대총결> 통계에 따르면, 1967년 1월 24일부터 11월 17일까지 10개월이 안되는 기간동안 심문, 질문회답, 자료작성 혹은 기록상 수정, 서명을 한 것이 모두 219건이었다.

 

1968년 5월 17일, 북경위수구사령관이 한 반(班)의 사병을 파견하여 장문천의 거처에 진주한다. 그리고 장문천, 유영에 대한 '감호심사'를 실행한다고 선언한다. 장문천, 유영은 각각 두 칸의 작은 방안에 갇힌다. 창문은 낡은신문지로 꽉 막았고, 실내에는 등을 켜놓고 24시간 끄지 ㅇ낳았다. 문에는 작은 네모난 구멍을 뚫어놓았다. 문앞에 서 있는 병사가 밤낮으로 들여다 보며 감시했다. 방안에는 침대 1개, 의자 1개가 있었다.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고, 신문도 볼 수 없었다. 누구와 만나서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영과 장문천의 방은 벽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척이 천리이다. 매일 1번 통풍을 시키는데, 두 방의 시간을 엇갈리게 해서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게 했다. 한번은 장문천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병이 발작하여 코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감시인원들은 부득이 그를 병원으로 보내어 응급조치한다. 1개월여후에 퇴원한다. 장문천은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목숨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유영의 얼굴을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감시원은 '아직 때가 안되었다. 안된다."고 대답한다.

 

장문천의 원래 서재가 심문실로 바뀌었다. 벽에는 적대투쟁의 '최고지시'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전안조 인원은 장문천, 유영을 돌아가며 심문했고, 반복하여 그에게 '반당반국'의 죄행을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무려 523일간이나.

 

북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무석에서 객사하다.

 

1969년 10월 20일, 장문천 부부는 돌연 통지를 받는다; "광동 조경(肇慶)으로 가라. 3일내에 출발하다. 이름은 사용할 수 없다. 가명을 따로 짓고 대외적으로 기밀을 유지하며, 친척들과만 연락할 수 있다." 조경에 도착한 후, 장문천은 장보(張普)라는 가명을 쓴다. 전화도 걸 수 없었고, 외부인과 접촉할 수도 없었다. 숙사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매월 관련당조직에 사상보고를 해야 했다.

 

조경에서, 장문천은 여러번 당중앙에 편지를 쓴다. 큰도시로 가서 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로 병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는 심장병이 심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번이나 북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두번째는 모택동이 회신을 보낸다: "안된다" 그후, 장문천은 먼저 상해로 가겠다고 한다. 그것도 허가받지 못한다. 다시 남경으로 가겠다고 했고, 다시 서안으로 보내달라고 했으나 모두 안된다는 답변뿐이었다. 그에게는 소도시에 거주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장문천은 중소도시를 고려하다가 상해에서 가까운 소주와 무석을 얘기했다. 소주는 동의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무석으로 옮기는 것에 동의를 받는다.

 

무석의 의료조건은 조경보다도 못했다. 조경에 있을 때, 장문천은 심장병이 발작하여 두번이나 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고, 두번 다 살아날 수 있었다. 무석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의사는 나이도 젊고 기술도 엉터리였으며, 설비에는 산소호흡기조차 없었다. 겨우 그에게 니트로글리세린만 주었다. 장문천이 마지막에 발작하였을 때, 남경의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의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지 13시간이 지난 후였다.

 

결론

 

당시 장문천이 소련에서 귀국했을 때는 소련에서 주입받은 극좌이론이 머리에 가득차 있었다. 상해에서건 강서에서건 여러 문제를 해결할 때 모두 극좌적인 방법을 썼다. 그리하여 중공의 강서중앙소비에트구는 실패한다.

 

다만 1959년의 여산회의와 1966년의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모택동의 극좌는 당시 장문천에 비하여 훨씬 심했다. 중화대지를 '동방광인원'으로 만들었다. 결국 장문언은 중공 극좌노선의 희생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