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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100년전 중국 지식인들의 기개

by 중은우시 2021. 12. 2.

글: 굴강적아아(倔强的丫丫)

 

채원배(蔡元培): 자유가 없는 대학교장은 하지 않겠다.

 

채원배는 일생동안 여러번 사직했다. 그중 북경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전후로 여러번 사직했다. 그는 1917년 1월 4일 북경대학 교장직에 올랐는데, 7월 3일 여원홍(黎元洪) 총통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장훈(張勛)의 복벽(復辟)에 항의했다.

 

1923년 1월 17일 채원배는 다시 분노하여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음 날 그는 <신보(晨報)>에 북경대학 교장직무를 사임한다는 성명을 싣는다: "채원배는 인격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사법독립과 인권에 간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육당국과는 더 이상 연락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 총통에게 국립북경대학 교장의 직을 사임하겠다고 하였다. 오늘부터 더 이상 학교 업무를 보지 않겠다. 이에 성명을 낸다."

 

"나는 절대로 더 이상 자유가 없는 대학의 교장을 할 수가 없다. 사상자유는 세계대학의 통례이다. 북경대학은 지금까지 구사상의 구속을 받아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들어가서, 사상이 약간 개방되는 분위기이고, 비교적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초빙하여 새로운 학리를 제창했고, 새로운 인쇄품을 발행하여 세계의 새로운 사상과 비교하고, 나의 이상으로 비판했다. 그래도 아직 절반만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방면에서 가끔 스스로 잘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내 생각에 아주 가소로운 일이다. 어찌 알았으랴. 구방면에서 이런 절반만 새로운 것도 '홍수맹수'로 여겼다. 정당한 변론법으로 변론하지도 않고 몰래 숨어서 권력으로 간섭하고자 한다. 그래서 교육부가 간섭하고, 국무원이 간섭한다. 심지어 참의원에서도 간섭을 한다. 세계에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대학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나에게 이런 대학의 교장을 계속 맡으라고 한단 말인가?"

 

호적(胡適): "총통, 당신이 틀렸다!"

호적과 장개석

1958년의 한 옛날 사진을 보면 나무의자에 민국역사상 유명한 두 인물이 앉아 있다. 호적이 장개석과 이 사진을 찍기 전에 호적의 '중앙연구원원장취임식' 및 제3회 원사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장개석과 의견충돌이 심하게 발생한다. 호적은 회의에서 장개석이 지도자의 신분으로 발언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컸다. 그는 장개석이 얘기하는 것은 학술연구의 독립원칙에 위반된다고 보았고, 학술연구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호적은 답사를 하면서 좌중을 깜짝 놀라게 분노의 일성으로 시작한다. "총통, 당신이 틀렸습니다!" 호적이 이렇게 한방을 날리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장개석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장개석은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호적은 전혀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말하는 소위 타도하여야 한다는 것은 공가점(유교를 가리킴)의 권위성, 신비성, 세계의 그 어느 사상이나 학설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품거나 비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나는 모조리 타도할 것이다."

 

사진상의 장개석은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분노했고, 굴욕감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은 실로 내 평생 두번째 최대의 횡액을 맞은 날이다. 제1차는 민국15년 겨울, 16년초로 무한에서 보로딘(코민테른에서 중국에 파견한 대표)과의 연회에서의 모욕이다. 오늘은 중앙연구원에서 호적의 취임식 답사의 모욕이다. 나는 그가 이렇게 광망하고 황당한 자인지 몰랐다. 정말로 미친 자이다......호적의 일로 하루종일 우울했고,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일부(馬一孚): "나는 여기 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나지는 않겠다!"

 

손전방(孫傳芳)은 동남오성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자처하며 항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명성을 듣고 마일부를 찾아간다. 마일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은 손전방의 권세를 생각해서 너무 과하게 행동하면 안될 것같아서 이렇게 권한다: "당신이 집에 없다고 말할까요?" 그러자 마일부는 이렇게 확실히 말한다: "그에게 말해라. 집에 있기는 하지만, 만나보지는 않겠다고." 손전방은 할 수 없이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항전시기에 마일부는 중경에서 복성서원(復性書院)을 연다. 한해는 공상희의 모친이 별세하였고, 장례식이 호화스러웠다. 일부 권세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마일부에게 공덕을 기리는 묘지명을 부탁하라고 얘기했다. 그들은 먼저 부관을 마일부에게 보낸다. 그 부관은 거리낌없이 말한다: "공부장의 태부인이 별세했습니다. 묘지명을 써주십시오. 빨리 써야 합니다." 마일부는 거절한다: "노후(老朽)는 이미 나이가 많고, 오랫동안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공부장에게 전해주십시오 명을 따르기 어려우니 양해바란다고." 부관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갔다. 며칠이 지난 후, 비서가 다시 찾아온다. 그는 훨씬 공손하게 말했다. 먼저 마일부의 인품과 문장을 칭송한 후에 온 뜻을 전했다. 공부장이 모친에게 얼마나 효성을 다했는지 그러면서 어르신께서 묘지명을 한편 써주십사 부탁한다. 그러면서 "공부장께서는 어르신이 그냥 쓰도록 부탁하지는 않고 당신께 드리려고 황금 약간냥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그도 거절당하고 그냥 돌아가야 했다.

 

"내가 비록 일개 한유(寒儒)이지만, 오두미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서 그렇게 전해주시오."

 

웅십력(熊十力): 나에게 공덕을 칭송하라고 한다면 그건 안될 말이다.

 

장개석의 50세 생일때, 특별히 소력자(邵力子)로 하여금 웅십력을 총통부로 초청하여 생일축하연에 참석하게 했다. 그는 '웅성인'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할 생각이었다. 생일연회가 시작되자, 웅십력은 방약무인하게 행동한다. 전혀 사양하지도 않고 정석에 앉아 음식을 미친 듯이 먹은 후에 술취한 듯이 광망한 말들을 내뱉었다. 술이 어느 정도 돌았을 때 여러 고관귀족들은 축하의 글을 올려 장개석의 공덕을 칭송했다. 웅십력의 순서가 되었다. 그는 가가대소한 후에 붓을 들어 <도보탑시(倒寶塔詩)>를 썼다.

 

웅십력은 다 쓰고 난 후에 다시 미친 듯이 웃고는 바지를 끌어올려 마치 오줌이 마려운듯이 하면서 문을 나서서 떠났다. 장개석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명망있는 웅성인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웅십력이 쓴 시는 이러했다:

 

발상장착별호로(脖上長着瘪葫蘆)                   목 위에 호로박이 자란다

불화전매멸소(不花錢買篾梳)                         돈들여 빗을 살 필요도 없고

기슬난하구(虮虱難下口)                               이가 살 수도 없다

일생무우(一生無憂), 독독독(禿禿禿), 정육(凈肉)  그러니 평생 걱정이 없겠구나. 대머리, 살 뿐이니.

 

문일다(聞一多): 나는 청빈하다. 관료와 사귀지 않겠다.

 

서남연합대학에서 문일도는 생활이 힘들었지만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동정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중경에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모두 그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신의 빈한함을 얘기한 적이 없다. 그의 젊은 시절 친구들은 항전이전에 관료사회로 들어갔고, 이미 대학교장, 교육부차장등 요직에 있었다. 여러번 문일다에게 관직을 맡으라고 권했었다.

 

한번은 그 친구가 공무로 곤명에 갔다가, 일부러 문일다를 만나러 간다. 문일다가 아주 빈한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다시 한번 건의한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가. 최소한 중경에 가서 잠시 쉬자. 내가 책임지고 접대하겠다."

 

문일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교분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오랜 친구이다. 과거에는 서로 네것 내것이 없이 서로 주고 받는 것도 통상적인 일이었다. 네가 만일 내가 사는 곳이 누추하다고 꺼리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와서 머물러도 좋다. 그러나 네가 있는 곳에는 내가 갈 수 없다."

 

친구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너의 그곳은 옛날과 다르다. 거기는 관청이다. 거기에는 관기(官氣)가 있다."

 

'관기'에 가까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 이후 문일다는 그 친구와도 내왕을 끊는다.

 

교대장(喬大壯): 만일 네가 내 글자를 고치면, 나도 너의 작전계획을 고치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항전시기 국민정부 부참모장인 백숭희(白崇禧)는 저명한 교수이자 번역가인 교대장을 모셔서 참의로 삼았다. 그리고 정무는 묻지 말고 그저 아무 관련없는 글들을 쓰도록 했다. 한번은 백숭희가 교대장이 쓴 글의 몇 글자를 고쳤다. 그러자 교대장은 바로 백숭희의 면전에서 엄중하게 질책한다: "각하는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중앙대학의 문학과 교수이다. 각자 자신의 전문분야가 있다. 만일 네가 내 글을 고친다면, 나도 네 작전계획을 고치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백숭희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고쳤던 몇 글자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