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민국사대전신(民國四大戰神)

중은우시 2021. 3. 12. 14:57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화민국 40년간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4명의 군사기재가 나타났으며, 모두 휘황한 전적을 거두었다.

 

백숭희(白崇禧)

 

근대역사상 광서(廣西)는 전투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계계군벌(桂係軍閥, 계는 광서의 약칭)에 적지 않은 우수한 장군들이 배출된다. 백숭희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1. 1924년 이종인(李宗仁)과 연합군을 성립하여, 겨우 만여명에 불과한 부대를 이끌고 전후로 육영정(陸榮廷), 심홍영(沈鴻英)의 두 군벌을 격패시키고, 이어서 운남(雲南)이 당계요(唐繼堯)도 물리친다. 겨우 1년여의 기간만에 광서를 통일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1살이었다(1893년생).

 

2. 1926년, 북벌총사령부 대리참모장을 맡아 작전을 지휘한다. 1927년 8월, 직계군벌(直係軍閥, 직은 북경과 그 주변지역을 가리킴) 손전방(孫傳芳)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고 6만여명이 장강을 건너 남경 부근의 용담진(龍潭鎭)을 점령했다. 백숭희는 상해에서 달려와 남경 동쪽의 제1군 14사단, 2사단의 부대를 지휘하여 반격한다. 그리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던 해군총사령관 양수장(楊樹莊)에게 압력을 가해서 해군이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직계군벌의 보급선을 차단하게 만든다. 이 전투에서 직계군벌의 주력 6만여명이 섬멸된다. 북벌에서 관건적인 전투였다.

 

3. 1938년, 무한(武漢)에서의 군사회의에서 '견벽청야(堅壁淸野)', '초토항전(焦土抗戰)'의 전략을 제안하고, "적소승위대승(積小勝爲大勝), 이공간환취시간(以空間換取時間)"(작은 승리를 모아서 큰 승리를 만들고, 공간을 이용하여 시간을 번다)을 주장한다. 이런 건의는 모택옹의 <논지구전(論持久戰)'과 유사하고, 국민정부 항일최고전략지도방침이 된다.

 

4. 해방전쟁(국공내전을 가리킴)때 그는 기동작전을 주장한다. 300대의 운송기와 10개의 정규편제기병을 기동역량으로 하여 수시로 전국 5대전략지구 전장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947년 11월, 그는 구강(九江)에서 5개성지구 작전을 통일적으로 지휘하여 중야(中野)가 대별산(大別山)에서 큰 어려움을 맞는다.

 

설악(薛岳)

 

장개석정권의 기반은 광동국민정부이다. 광동의 장수는 민국시기의 중요한 파벌이었다. 설악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1.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손중산을 따르며 대총통부 경위단 1영 영장을 맡는다. 여러번의 전란과 사변때 손중산을 보위한다. 나중에 황포군관학생군의 제2차동정때 자주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물리쳤다.

 

2. 북벌때, 남창성공방전이 아주 격렬했다. 성벽은 두번이나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다. 혁명군부대는 여러번 패퇴하고 좌절을 많이 겪는다. 오로지 설악이 이끄는 제1사 제3단은 시종 용감하게 분전했고, 장개석이 모범이라고 말했다.

 

3. 1927년부터 1932년까지 군벌혼전에 가담한다. 그러나 나중에 월계(粤係, 월은 광동의 약자임)를 벗어나 사직하고 홍콩에 은거한다. 1933년 장개석이 다시 그를 기용한다. 이때부터 중앙군의 객계(客係) 장군이 된다. 제5차 '위초(圍剿)때 국군 제6로군 지휘관이 된다. 전후로 소원(韶原), 상강(上岡), 수화산(壽華山), 흥국(興國), 고룡강(古龍岡)을 점령하여, 홍군의 본거지 서금(瑞金)을 위협했다. 홍군이 장정을 떠난 후, 중앙군을 이끌고 추격한다. 강서에서 서남까지 2만여리를 쫓으며 서남의 여러 성을 전전한다. 그는 중앙홍군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4. 항일전쟁때, 송호항전(松滬抗戰)부터 형양보위전(衡陽保衛戰)까지, 정면으로 맞붙은 전장에서 그는 국군의 가장 주요한 지휘관이었다. 송호회전, 난봉회전, 무한회전에서 모두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장사보위전에서, 그는 국군의 기계적으로 진지를 고수하는 작전방식을 바꾸어, 병력을 그물모양의 거점으로 배치시키고, 일본군이 공격해올 때 차례로 저격한다. 작전방식을 신축성있게 변화시켜서 적군의 사기가 떨어질 때, 다시 포위섬멸한다. 그는 일본군 20만을 섬멸했으며, 항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아래는 그가 전투에서 성취한 주요 전적이다:

 

만가령전투: 8천여명

일전장사: 2만명

이전장사: 4.15만명

삼전장사: 5.6만명

장형회전: 6.8만명

 

임표(林彪)

 

홍군 성립초기, 황포군관학교졸업생은 부대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성장도 아주 빨랐다. 임표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1. 1926년 황포군관학교졸업후 1927년 남창의거까지, 그는 단지 여러 황포군관학교졸업생중 보통장교중 하나였다(連長을 맡음). 그후 3년간, 그는 홍군초창기의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영장(營長), 단장(團長)을 맡은 기간동안 작전지휘를 잘했다. 전술스타일은 기지있고 신축성있으며, 의병(疑兵, 병력이 있는 것처럼 혹은 많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을 잘 활용했다. 그렇게 여러번의 중대한 승리를 거두며 계속 승진한다. 1930년 6월, 홍1군단 제4군 군장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모택동 휘하의 제1대장이 된다.

 

2. 항전초기, 평형관, 광양에서 연이어 매복기습을 통해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어 전국인민들을 흥분시켰다. 전투후 그는 12가지 대일작전경험을 정리하여, 일본군의 작전특징, 무기우세, 보급선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중국군의 작전전법을 제안한다.

 

3. 해방전쟁에서, 낯선 동북전장으로 가, 한편으로 전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대를 재편했다. 각 근거지에서 온 10만여명의 간부와 병사들을 하나의 에이스부대로 재편한 것이다. 3년이 되지 않는 기간동안 백만대군으로 발전시킨다. 그후 국군을 파죽지세로 연파하며 백산흑토에서 천애해각(해남성)까지 밀고 내려간다.

 

속유(粟裕)

 

22년간의 혁명전쟁이 지속되면서 무수한 열혈청년들이 붓을 버리고 총을 들어, 우수한 혁명가로 성장한다. 속유는 바로 그 중의 대표적 인물이다.

 

1. 그는 호남성 제2사범학교를 다니던 기간동안 혁명에 투신한다. 그후 섭정(葉挺)의 24사단 교도대대에 들어가 학원반장(學員班長)을 맡는다. 홍군시기에 그는 6번이나 부상을 입고, 2번은 목숨이 위험했다. 그는 영장, 단장을 거쳐 참모장, 정위, 정치부주임이 된다. 이 시기에는 독립적으로 하나의 부대를 지휘하지는 못했고,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1935년 1월 담가교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는 겨우 400명이 남은 부대의 사령관이 된다. 그후 2년여동안 지옥같은 유격전을 펼친다.

 

2. 고난을 거쳐 결국은 휘황한 성공을 거둔다. 신사군은 그에게 발전공간을 마련해준다. 이 시기에 그의 군사지휘능력을 점점 더 정교해진다. 일본군 30여명을 기습하여 섬멸시키는 소형매복전에서부터 적군 깊숙이 수백리를 들어가 400여명을 섬멸하는 기습전까지, 그리고 다시 일본군의 핵심거점을 파괴시키는 차교(車橋)전투까지. 그는 계속하여 신사군의 적군섬멸신기록을 갱신한다.

 

3. 해방전쟁때, 그의 군사적 재능은 최고로 발휘된다. 1946년 3만의 병력으로 적군 5.3만명을 섬멸하여, 해방전쟁의 첫 승전보를 알린다. 그후 그는 다시 최초로 적군 1개사단, 1개군, 1개병단을 섬멸하는 기록을 창조한다. 그는 3년동안 적군의 섬멸한 수량에서 최고였다.

 

위의 4명의 명장은 서로 다른 역사단계에서 각각 휘황한 전적을 창조한다. 그 중 누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