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明)나라 '첨단화포부대'의 복멸기(覆滅記)

중은우시 2020. 10. 22. 22:56

글: 지구지식국(地球知識局)

 

명신종 만력19년(1591년)말, 명나라조정은 일본의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음 해에 조선을 침입하고, 나아가 '가도벌명(假道伐明)'하려 한다는 정보를 획득한다.

 

양광총독 유계문(劉繼文)은 상소를 올려 마카오(澳門)의 포르투갈인을 고용하여, 직접 왜구의 소굴을 공격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영원히 후환을 업애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동남해 연해에서 명군과 싸운 바 있다. 그리하여 복건, 광동의 관리들은 그들의 배와 대포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살마들은 용맹하며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오이(澳夷, 마카오의 오랑캐)"로 하여금 왜구와 싸우게 하고, 대명은 그저 앉아서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과감한 계획이다. 그래서 조정의 상하는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흐지부지하고 만다.

 

다만, 명나라말기는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북방에서는 전투가 연이어 일어난다. 남해의 귀퉁이에 있는 '불랑기흑번(佛郞機黑番)'도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20년간 후금은 거병하여 명과 싸우면서 백전백승한다. 특히 살이호전투는 졸지에 대명의 야전정예병들이 전멸하는 결과를 낳는다.

 

요동의 명군은 보편적으로 화기(火器)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후금군은 전투를 할 때 매번 순거(楯車)로 엄호하며 중병보병이 돌격했다. 명군이 화기고에는 3가지가 있는데 불랑기총(佛郞機銃), 조총(鳥銃)과 삼안총(三眼銃)인데, 사정거리, 사격속도와 화력밀도에서 약점이 있었다. 살상력은 팔기군의 화살보다 못했다. 화총을 한번 쏘는 시간에 궁전수는 화살을 5-6개 날렸다. 총포수가 두번째 발사를 위해 장전하는 동안에 순거 뒤에 있던 궁수들이 쏘는 화살에 우수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명군은 화기를 가졌지만, 화력이 부족하여, 바깥에서 살펴보고 있던 팔기철기는 기회를 틈타 돌진하며, 전광석화처럼 눈앞으로 쳐들어왔다. 명군은 오랫동안 실전을 하지 않았고, 물자조달에도 문제가 많았다. 화기의 성능은 더더욱 문제였다. 이런 문제로 명군은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전술을 개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된다.

 

조정에서 서방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광계(徐光啓)는 경성에서 병사를 훈련시키며, 명군이 약점과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명군의 현재 장비와 전투력으로는 화기에 의존하여 성을 지키는 것은 그런대로 할 수 있지만, 후금군과 대진하여 싸우거나, 혼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과학자들은 실사구시적이다. 무기와 전쟁은 모두 객관적인 것이다. 아니면 아닌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간단하고 직접적이다. 사정거리가 더욱 멀고, 위력이 더욱 큰 홍이대포(紅夷大砲)이다. 성벽위에 홍이대포를 설치하여 건노(建奴,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공격해오면 대포를 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팔기명이 아무리 잘 싸우더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홍이대포는 당시 유럽에서 전래된 대포의 총칭이다. 만력 중엽, 동남연해의 주민은 네덜란드 전선에서 이런 대포를 보았다. "돌로된 성벽을 무너뜨리고, 소리가 십리까지 들리는" 공포스러운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때 네덜란드를 "홍이", "홍이모(紅夷毛)"라고 불렀으므로, 이런 유형이 서양대포를 통칭하여 '홍이대포'라고 불렀던 것이다.

 

살이후전투 다음 해, 서광계의 위탁을 받아, 같이 서학을 배운 신도라 할 수 있는 제자 장도(張燾), 손학시(孫學詩)를 마카오로 보내 대포를 사오게 한다. 

 

명나라정부에 호의를 보이기 위해, 마카오교회의 주선으로 포르투갈상인집단은 돈을 모아 4문의 대포를 산다. 이를 대명황제에 대한 자금지원이라고 생각했다. 장도는 또한 포르투갈적의 포수 4명과 시종 및 통역 6명도 구한다. 이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기로 하고, 함께 대포를 북경으로 운송한다.

 

만일 순조롭게 북경에 도착했다면 서광계는 이들을 정식으로 포영교습(炮營敎習)에 임명할 계획이었다. 이들 포르투갈 포병은 대명왕조 2백년만의 최초 유럽용병이 되는 셈이다.

 

1598년의 마카오에 살던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정부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에서의 무역지위가 오래되고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대정부관계에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나, 천조(天朝, 명나라)의 은위(恩威)는 예측하기 어렵다. 태창원년(1620년) 십월, 일행이 마카오에서 광주로 출발한다. 그러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광주당국은 외국인 포병의 입성을 금지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첫달 월급도 받지 못한 채 다시 마카오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북경에서는 인사변동이 있어, 서광계가 병으로 관직을 떠났다. 그래서 이 몇 문의 대포를 북경으로 운송해도 이를 받을 사람이 없는 국면이 된다. 이때 장도, 손학시 두 사람은 막 대포를 강서 광신부(지금의 상요)까지 운송한 상황이었다. 일시에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할 수 없이 대포를 광신에 맡겨둔다. 

 

장도 손학시가 광신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누르하치의 병력은 심양성까지 밀려온다.

 

천계원년(1620년) 삼월, 후금은 심양, 요양을 격파한다. 요하일대가 후금에 넘어간 것이다. 광신에 머물러 있던 대포 4문은 그해 십이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북경에 도착한다. 그중 1문은 바로 산해관으로 보낸다.

 

홍이대포이 모습을 본 천계제는 마음에 들어한다. 그리하여, "서양총을 구매하고, 포수를 모집한다"는 계획은 빠르게 진행된다. 동시에 조정은 생각해낸다. 광동지방관리가 전해에 해강현, 양강현 근해에서 유럽의 침몰선박에서 수십문의 영국산 홍이대포를 건녀올렸다는 것을. 조금만 수리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장도, 손학시는 다시 명을 받아 남하한다. 이 대포를 받아오고, 동시에 포르투갈 포수도 데려오는 것이었다.

 

마카오는 이때 네덜란드인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었다. 만일 대명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주면, 광동당국을 설득하여 마카오에 군비를 확충하지 못하게 하는 제한이 완화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에서의 권리는 더욱 공고히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는 윈윈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병력이 부족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군관, 포병 그리고 수행원 하볘 24명을 명나라조정으로 보낸다(당연히 명나라조정이 주기로 한 급여도 이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천계3년 사월, 24명이 포르투갈군인과 26문의 대포가 북경에 도착한다. 병부는 경성의 부대내에서 건장한 병사를 뽑아, 포르투갈병사들에게 포술을 배우게 한다. 다 배운 후에는 각 변방의 거점에 배치했고 조를 나누어 포병부대를 건립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의 운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팔월, 포르투갈 포병은 포영을 조직하여 3차례의 연습을 한다. 이를 통해 교육효과를 검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3차시험발사때 불행히도 포신이 폭발하여, 교관 1명과 명군사병 1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당시의 기술조건하에서 포신이 폭발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는 조정에서 외국국적군인을 반대하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 구실을 주었다. 일시에 여러 반대의견이 나오고, 결국 조정은 북방기후가 건조하여 포르투갈인들이 살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인들은 모조리 마카오로 돌려보낸다.

 

교관단이 해산되자, 포영의 교육은 조기에 졸업한다. 그리고 원래의 계획대로 북방의 각 변관에 배치된다. 그중 10문의 대포는 막 축성이 끝난 영원성으로 보내어 진다. 여기에 미리 보낸 1문이 있어, 영원성에는 모두 11문의 홍이대포를 구비하게 된다. 그외에 나머지 수천개의 대소화기도 가졌다. 요서의 수비를 담당하는 영전도 원숭환으로서는 '튼튼한 성, 큰 대포'를 갖게 된 것이다.

 

천계6년 정월 영원전투에서 홍의대포는 주야로 발사된다. 후금의 순거는 바로 박살난다. 누르하치는 3일을 연속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냥 돌아간다. 영원전투는 누르하치의 거병이래 백전백승의 신화를 끝장냈다. 후세의 저술에서 심지어 누르하치의 죽음이 이 전투에서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명의 입장에서는 전국이 환호성에 휩싸인다.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조정은 하사품을 내리고 상을 내리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적을 가장 많이 죽인 홍이대포도 "안국전군평료정로대장군(安國全軍平遼靖虜大將軍)"에 봉해진다.

 

1년후, 명군은 영금전투에서 다시 한번 굳건한 성과 홍의대포를 가지고 후금군을 대파한다. 원숭환이 만든 영금방어선은 튼튼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후금은 더 이상 정면으로 싸울 생각을 못한다.

 

두 번에 걸친 대첩에 고무되어, 숭정제는 즉위후 즉히 마카오에 대포를 구매하고, 병사를 모집한다.

 

숭정원년(1628년) 십월, 마카오의 군관  공사(公沙, Gonsales Texeira)는 32명을 이끌고 대포 10문 및 기타 화총 약간을 가지고 북경으로 떠난다. 이 부대를 따라온 사람 중에는 나이 칠순의 포르투갈 선교사 육약한(陸若漢)이 있다. 이 대오에서 포르투갈인은 7명이고, 나머지는 인도, 아프리카의 포르투갈식민지출신이다.

 

일행은 산넘고 강을 건너 1년만에 산동성 제녕에 도착한다. 이때 홍타이시(청태종)이 이끄는 구대가 커얼친몽골의 땅을 지나, 희봉구(喜峰口)를 뚫고 장성이남으로 쳐들어와 북경을 포위한다. 공사의 부대는 그 소식을 듣고 주야를 달려, 거의 경사의 서남 양향현에서 후금군과 만날 싸울 뻔한다.

 

쌍방은 일시에 서로 허실이 잘 파악되지 않아, 포르투갈병은 탁주로 철수한 후, 성위에서 대포를 쏘아 후금군을 겁준다. 홍이대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후금군은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고, 북으로 철수한다. 공사부대는 탁주에 한달간 갇혀 있다가, 북경의 포위가 풀린 후 비로소 북경으로 들어간다.

 

이번에 후금군을 겁주어 물리친 것은 포르투갈병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육약한은 심지어 더욱 방대한 계획까지 그린다. 수백명이 포르투갈병으로 별도부대를 구성하여, 요녕의 땅을 수복하는 선봉에 서게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약간 미친 듯하다. 명나라말기의 정치는 적폐가 쌓여 있어서, 수백명이 수십문의 대포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도와줄 생각이 있었고, 그에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할 수 있었다. 숭정제도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한다.

 

이전 두번과는 달리, 모병과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숭정3년 구월, 사백여명의 부대가 이미 배를 타고 마카오에서 출발한다.

 

다만, 명나라조정의 내부당쟁으로 이 사상유례없는 규모의 외국인용병계획은 중도에 좌절된다.

 

육약한이 부대를 이끌고 남창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계획을 바꾼다. 명을 내려 포르투갈병에게 북경으로 오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해산하라고 한 것이다. 이미 지급한 급여는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서광계가 제1차로 대포를 구매하고 병사를 모집한 때부터 포르투갈병을 북경으로 불러들이는데 대하여는 반대의 목소리가 계속 있었다. '오랑캐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다"는 식의 말 뿐아니라, 광동지방관리들의 이익과도 관련이 있었다. 마카오사무는 광동에서 전권을 가지고 처리했다. 포르투갈인들이 북경으로 가서 직접 관계를 맺게 되면, 광동당국은 독점적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연히 이득을 얻을 기회도 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광동출신 관리들은 서광계를 공격하는데 특히 열심이었다.

 

숭정제는 의심도 많고, 독단적이다. 의론이 분분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육약한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공사부대와 함께 등주(지금의 산동성 봉래)로 가서 주둔한다. 그동안 공사부대는 명나라수군을 따라 피도해전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

 

명나라조정은 비록 포르투갈병을 기술인재로 생각하도 받아들였지만, 포르투갈병의 일상업무는 모두 포술훈련이었고,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유일하게 분전한 경우의 적수는 바로 자신이 가르친 명군이었다.

 

숭정4년 구월,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 휘하의 요동사람 공유덕(孔有德)은 오교(吳橋)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산동의 서북지방을 휩쓴 후 등주로 진격한다. 등주성 내뇌의 요동병사는 속속 공유덕에 가담한다. 공사부대는 끝까지 싸우며 물러나지 않았다. 12명이 전사하고, 15명이 중상을 입는다. 육약한 신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잔여 포르투갈병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도망친다. 그리하여 이 부대는 전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명군은 18개월의 시간을 들여 겨우 공유덕의 반군을 물리친다. 공유덕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바다를 건너 후금에 투항한다. 그때 20여문의 홍이대포와 포르투갈식 훈련을 받은 포병을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하여 후금은 화기장비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된다. 명군은 후금에 대한 약간이 우세마저 상실하게 돈다. 

 

반년후 서광계는 한을 품고 병사하며, 외국병사를 모집하는 일은 그후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