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일소(那日蘇)
유태인들의 상업적 두뇌는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주제이다. 과거 중국의 만주는 황량한 땅이라고 여겨졌었다. 유태인의 고향인 중동에서 만주까지는 거리가 수천킬로미터나 된다. 그러나 풍운이 휘몰아치던 근대에 머나먼 공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유태인과 만주는 서로 얽히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실제로는 연원이 깊다.
19세기말부터 유태인들은 대량으로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몰려든다. 그들은 자신의 장사수완을 가지고 만주지역에서 경제기적을 일궈낸다. 하르빈의 길거리에서 유태인들은 한때 상업의 80%를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이 땅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유태인스타일의 건축과 묘지만이 옛 시절을 기억나게 해주고 있다.
만주의 근대역사는 기본적으로 종횡의 두 철도로 시작된다. 처음에 이 종과 횡의 철도는 동청철로(東淸鐵路)라 불렸다. 러일전쟁후, 종선의 장춘에서 여순까지의 철로는 일본이 통제하며 남만철로(南滿鐵路)라고 개명한다. 이 철로는 장춘, 심양, 대련등 연선도시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동청철로의 횡선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만주리, 목단강, 수분하등이다. 이 횡, 종이 만나는 곳이 바로 지금 흑룡강성의 성회도시인 하르빈이다.
러시아인들은 원래 만주를 독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러일전쟁후 만주의 남쪽은 일본이 차지하고, 만주의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한다.
러시아혁명과 내전이 발발한 후에는 일본이 점점 러시아 지역을 침식해 들어간다.
처음에 하르빈은 아직 도시가 아니었다. 철로를 건설하기 전에는 그저 수십개의 마을이 있었다. 1896년 이홍장이 러시아에 사신으로 가서, 청정부를 대표하여 러시아와 <중러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합법적으로 중국의 토지에서 철로를 건설할 수 있게 된다.
철로의 권리는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여기에는 철로부설뿐아니라, 연선의 철로역, 그리고 철도를 둘러싸고 형성된 도시의 행정권까지 러시아가 소유한다. 하르빈은 바로 이런 범위의 행정중심이었다.
같은 해 대청제국은 은오백만냥의 자본금을 내서 러시아와 은행을 합작으로 설립한다. 이것이 바로 화아도승은행(華俄道勝銀行)이다. 화아도승은행의 설립은 러시아 재정부장 빅토르 부부의 지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빅토르의 처는 유태인이다. 19세기 유태재벌은 러시아 경제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은행업도 예외는 아니다. 이 은행의 제1대 총판인 로스탄은 유태인이다. 여러 주주와 의사결정권자들도 모두 유태인이었다.
화아도승은행은 러시아가 중국에서 이익을 획득하는 금융기관이었다. 또한 러시아가 중국에 경제침략하는데 얼굴을 드러내는 대표가 된다.
이 유태인 부인이 참여한 은행은 세계의 다른 유태자본의 관심을 끈다. 서유럽의 유태재벌이 만든 회풍은행(匯豊銀行)은 동청철로의 건설과 광산개발에 일정한 자본을 출자한다. 그리하여, 동청철로건설위원회는 유태인 배경이 충만한 환경하에서 설립된다. 수석엔지니어는 러시아인 알렉산도르 유고비치였다. 그는 동방정교회에 귀의한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중에는 토목엔지니어가 된다. 그는 사막과 고지에서 철로를 건설하는 기술이 전문가급이었다.
유태자본의 투입은 하르빈과 주변철도연선일대의 경제를 급속히 활성화시킨다. 많은 철도노동자, 건설재료중간상들이 속속 하르빈으로 몰려든다. 유태인은 긴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상인들이 대출투자도 혀용한다. 동시에 철로관련도동자들에 대한 대우도 비교적 후했다. 느슨한 자본환경과 양호한 경제순환은 이 도시를 번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더 많은 러시아 경내의 유태인들이 명성을 듣고 몰려든다. 이 새로운 곳에서 이익을 나눠먹고자 한 것이다.
중앙대가는 러시아인들이 하르빈에서 가장 번화하게 모여있는 상업거리였다.
현재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상점유적지가 있다.
일부 두뇌가 있는 유태인들은 러시아극동지구 예를 들어 블라디보스톡, 블라고베시첸스크, 하바로프스크등지에서 하르빈으로 갔다. 그들중에 어떤 사람은 건축재료를 공급하는 대상인이고, 일용품을 경영하는 중소상인도 있었다.
하르빈의 유태인약방
이렇게 하여 동청철로의 건설은 유태계 엔지니어와 기술노동자들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유태인은 왜 러시아에서 잘 지내지 못했을까? 오히려 머나먼 중국까지 와서 철로를 건설했을까. 하층노동자로서 그들이 얻은 수익은 많지 않았고,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곳에서의 시공은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들이 러시아에서 생존할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반유대기풍은 신속히 만연되었다. 관방의 묵인도 유대인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어리사에는 여러차례의 큰 사건이 있었다. 러일정쟁, 1905년혁명, 토지개혁, 제1차세계대전등등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월혁명, 10월혁명, 그리고 나중의 내전까지 있었다.
러일전쟁은 중국의 만주지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비록 일본인들이 엄청난 댓가를 치르긴 했지만, 러시아 자신들의 실수로 스스로 적지 않은 고난을 겪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때의 제정러시아는 국내에서 모순이 첨예했고, 극동전쟁의 실패는 이런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제정러시아가 연이어 패전하였지만, 일본도 국력을 다 소모해 버렸다.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들 모두가 원하는 일이었다.
조약체결로 러시아는 더욱 골치아픈 국내문제를 해결하는데 착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과연 러일전쟁의 패배후, 생페테르스부르크에서 소위 '피의 일요일'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러시아국내의 모순을 격화시키고, 민족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당시 이런 목소리가 있었다. 유태인은 극동에서 일본인과 협력하여 러시아를 팔아먹는다.
이런 소식은 진실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민족간의 분풀이의 도화선이 된다. 러시아민족에게 유태인은 시종 '남'이었다. 비교하자면 몽골인이 유태인보다는 러시아인에 훨씬 가까웠다.
이런 배경하에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유태인에 대한 분풀이식 공격이 시작된다. 도살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유태인들은 가족을 데리고 중국만주로 이주해서, 거기의 친척들에게 의탁한다. 이는 유태인들이 중국으로 밀려들어오는 제2차붐을 일으켰다.
러시아제국이 점령한 폴란드와 오스만트르크의 영토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이전 시대보다 더욱 비참했다.
제3차이민붐은 1차대전 및 나중의 러시아내전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는 비록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대국이지만, 이번 전쟁은 아주 형편없었다. 수만의 청장년들이 전장으로 가서 총알받이가 된다. 1차대전은 모든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현대전쟁의 공포를 체험하게 만들었다. 낙후한 러시아는 더욱 그러했다. 전쟁은 정부를 무너뜨렸고, 탈영병과 빈민은 혁명의 불쏘시개가 된다.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간접적으로 소비에트러시아의 건립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러시아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홍백대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차대전기간동안, 개략 45만의 유태인사병이 러시아제국의 군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라브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국가는 그저 그들을 총알받이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전쟁은 소비에트러시아의 홍군이 승리하면서 끝난다. 백군은 죽거나 투항하고, 혹은 다른 나라로 도주했다. 지금 중국경내의 많은 러시아족은 이때 중국으로 온 사람들이다. 군벌 장종창은 백러시아군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내전에 돌입한 후, 극동과 만주의 국면도 계속 바뀐다.
옛 제정러시아, 백러시아, 서방인, 중국군벌, 소비에트가 서로 얽혀서 싸웠다.
여기에는 많은 유태인이 끼어들었다. 그들중 일부는 소비에트러시아에서 부르조아나 부자로 처형당하는 것을 겁냈고, 어떤 사람은 백군과 결탁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끊이지 않는 혼란에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흑룡강을 넘어, 중국만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예를 들어, 초기에 만주로 온 유태인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은 철도노동자와 엔지니어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배척받았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르빈에서, 그들은 전례없는 예우를 받는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의 심혈을 경주하여 동청철로를 건설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으로 건너온 유태인들의 수량은 적지 않았다. 1920년 유태인교민은 2만여명에 달한다. 하르빈 등지에는 대규모의 유태인타운이 형성된다.
하르빈에는 유태인 조직이 성립된 바 있다. 거기에는 유태중학(1919-1924), 타무더리법학교(1920-1950, 나중에 유태민족학교로 개칭됨), 유태빈민환자구조회(1920-1934), 유태인양로원(1920-1943), 유태도서관 및 유태교회가 있었다.
현재의 하르빈회당음악청은 바로 일찌기 불타버린 하르빈 유태총회당이 기초 위에 건설한 것이다.
하르빈 초기의 자본운영은 유태인들이 전개했다. 최초의 경마활동, 최초의 상업무역, 최초의 할인판매행사, 최초의 식품가공업등이다. 1923년, 유태교민의 수량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왜냐하면, 도망쳐온 유태인들중에서 잠시 하르빈에 머물다가 북미, 서구등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토크쇼배우이자 TV프로그램진행자인 Jon Stewart의 부모는 바로 중국만주의 만주리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러시아유태인이다.
중국 만주에서는 또 다른 유명한 유태인을 배출한다. 그는 바로 나중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에후드 올메르트이다. 그의 조부는 1917년 하르빈으로 이주했고 계속 거기에서 살았다. 사망한 후 하르빈 유태공묘에 안장된다. 부친은 하르빈에서 자랐고,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후, 일가를 이끌고 유태인에게 허락된 팔레스타인지구로 간다. 1948년, 유태인은 거기에 자신의 국가 이스라엘을 건립한다.
그는 동북말을 절반쯤 알아듣는 하르빈사람이며, 2004년에는 하르빈으로 조상묘를 찾은 바 있다.
유태인은 하르빈의 도시화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중국만주에서 초기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도시건설에서 금융체계까지, 그리고 일부 공업분야에서. 많은 유태인들은 중국만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인이 온 후에 아무런 망설임없이 이 새로운 집을 버렸다.
만주국이 성립된 후, 일본군정부는 유대인들에 대한 제한정책을 쓴다. 그리고 도시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유태인들을 압박해서, 유태인들의 생존공간이 계속 좁아진다.
1930년-1940년, 10년간 하르빈의 유태인은 수만명에서 2,800여명으로 감소한다. 많은 유태인들은 상해, 천진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미주로 간다.
2차대전이 폭발하면서 하르빈의 유태인들은 일본이 점령한 만주를 떠나야 했다. 전세계의 유태인들은 반유태주의가 심각한 국가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상해는 개방된 도시였고, 적지 않은 유태인 난민을 받아주었다.
2차대전후 팔레스타인지구의 유태인들은 복국의 궤도를 걷는다. 많은 해외의 유태인들이 점점 조상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중 중국내의 유태인들도 대량으로 떠난다. 1985년, 유대인의 마지막 인물이 하르빈에서 사망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동북의 유태인역사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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