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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by 중은우시 2021. 2. 27.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이릉지전은 동한말기 3대전투중 하나이고, 또한 최후의 대형전투이다. 이 전투이전에 촉한과 동오의 합작관계는 육손이 관우를 기습함으로써 끝났다. 쌍방은 전우에서 적이 된 것이다. 조위는 그래서 잠시 숨돌릴 기회를 갖느다. 촉한은 이 전투에서 일패도지했고, 명장과 정예병사들의 손실이 참혹했다.

 

이릉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동오는 위에서 아래까지 촉한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육손이 한 행위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었다. 동맹국이 적국과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을 보태지 않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오히려 등뒤에서 칼질을 했다. 그리하여 관우, 관흥 부자는 피살되고, 유비, 유봉부자는 멀어졌으며,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고, 더더욱 간접적으로 장비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육손이 불인불의하지 않았다면, 삼국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조위가 패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주(先主,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기습한 것에 분노하여 동오를 정벌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손권이 서신을 보내 화해를 청했다" 그러나 유비가 그것을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그리하여 원래 합작하여 조위에 대항하던 촉한과 동오는 부득이하게 서로 창을 겨누게 된 것이다.

 

"장무2년 춘정월, 선주는 군대를 자귀(秭歸)로 돌린다.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은 이릉에 주둔하여 강동의 서안을 막았다. 이월, 선주는 자귀에서 여러 장수를 이끌고 진군한다. 산과 언덕을 넘어 이도호정에 군영을 차린다. 간산에서 무릉으로 통한다. 시중 마량을 보내 오계의 오랑캐들을 다독였다. 모두 호응했다."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동오를 정벌할 때, 오반, 진식등이 따랐고, 동시에 마량을 보내 사마가(沙摩柯)등 오랑캐들도 와서 돕게 한다. 관련 사료기재를 보면, 유비의 군은 비록 이십만이라고 하였지만, 모든 인마를 합쳐보아야 오만여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손권의 병마도 비슷했다. 거의 오만여명이다. 만일 초기에 현지에서 수비하던 병사들까지 합친다면, 손권의 인마가 유비보다 약간은 많았을 것이다.

 

이릉지전에서, 촉한측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오반, 진식의 수군은 전멸했고, 두 장군도 동오의 병사들에게 피살당한다. 풍습(馮習), 장남(張南)등도 모조리 전사한다. 마량은 남방에서 서북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동오의 장수 보즐(步騭)에게 습격받아 전사한다. 유비의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조위를 방비하던 황권(黃權)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적군에 투항한다.

 

동오측은 비록 승리했지만, 역시 피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초기의 전투에서 촉한의 사기가 높았고, 수비병사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성을 잃고 땅도 잃었다. 촉한의 군대는 계속 진격했고, 동오의 상하는 인심이 흉흉했다. 할 수 없이 동오는 조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칭신(稱臣)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동오의 수군장수 이이(李異), 유아(劉阿) 두 사람은 3천명을 이끌고 촉한과 싸웠는데, 촉한의 장수 오반, 풍습등에게 격패당하고 그들의 인마는 전멸한다. 이어서 손항(孫恒), 주연(朱然)등은 유비의 대군과 전투할 때, 역시 열세였다. 이는 육손이 나선 이후에 유비군의 날카로움을 피하면서 전기를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이 과정에서 동오의 손실은 적지 않았다.

 

그외에 육손이 유비를 물리친 후, 바로 병력을 보내 추격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조위가 공격해 올까봐 겁난 것이지만,다른 한편으로, 확실히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아서, 쫓아갈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손의 성격으로 보아, 추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이릉지전에서 촉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동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쌍방으로 하여금 철저히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만일 서로 연합하지 않으면, 결국 조위에게 각개격파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비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은 동오와 철저히 화해하고, 그 뒤로는 서로 싸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