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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118

계주병변(薊州兵變): 명나라최강의 척가군(戚家軍)은 어떻게 우군에 참살당했는가? 글: 남북양조(南北兩謿) 만력23년(1595년)의 계주병변은 하나의 비극이며 지금도 차마 다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변은 사료에 기록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에 몇 마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당시는 아직 삼대정(三大征)중 하나인 항왜원조(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가리킴)시기였으므로, 조선의 사료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만력이십삼년 십월, 기미(己未)일, 방해병(防海兵, 해안방어병)이 군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鼓噪). 계진의 독(督), 무(撫), 도신(道臣)이 난리를 일으킨 자를 붙잡아 처형하고, 나머지 일당은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병부에 보고하였고, 병부에서 허가했다." 명신종(만력제)때 병변이 여러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력10년의 항주병변(杭州兵變), 1.. 2021. 5. 1.
명나라시기 오이라트(瓦剌)는 언제 멸망하였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오이라트(瓦剌)의 '가장 휘황했던 시기'이다. 그들은 가볍게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을 포로로 잡았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병방요지까지 맹렬하게 진격해 들어갔었다. 만일 우겸(于謙)이 없었더라면 명나라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의 운은 좋지 못했다. 명나라에 패배하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을 뿐아니라, 내부에서 모순이 폭발하여, 스스로 무너진다. 이는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이라트의 역사는 당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민족은 아주 사납다. 하루종일 주변부락과 당나라의 변경을 돌아다녔다. 당나라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오이라트는 죽어도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할 수 없이 그들과 싸워야 했고, 백여년.. 2021. 5. 1.
명(明)나라 '첨단화포부대'의 복멸기(覆滅記) 글: 지구지식국(地球知識局) 명신종 만력19년(1591년)말, 명나라조정은 일본의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음 해에 조선을 침입하고, 나아가 '가도벌명(假道伐明)'하려 한다는 정보를 획득한다. 양광총독 유계문(劉繼文)은 상소를 올려 마카오(澳門)의 포르투갈인을 고용하여, 직접 왜구의 소굴을 공격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영원히 후환을 업애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동남해 연해에서 명군과 싸운 바 있다. 그리하여 복건, 광동의 관리들은 그들의 배와 대포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살마들은 용맹하며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오이(澳夷, 마카오의 오랑캐)"로 하여금 왜구와 싸우게 하고, 대명은 그저 앉아서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과감한 계획이다. 그.. 2020. 10. 22.
대서군(大西軍) 후기: 장수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의 관계와 갈등 글: 화운초(和運超) 대서군이 운남(雲南)으로 들어간 후, 남명군(南明軍)과 융합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의 민간농민군이 신분을 바꾸어 남명군이 되는 것에 대하여, 대서군내부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1인자인 손가망(孫可望)과 2인자인 이정국(李定國)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정국으로 손가망을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는 결국 대서군과 남명잔여세력이 서남대국에서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1. 손가망의 야심배후: 연합하지만 귀순하지 않는다. 손가망은 큰형이자 우두머리로서, 처음에는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와 협력한 것은 기회를 보아 운남귀주를 점거하기 위함이고, 그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순수한 공리적인 마음이었다.. 2020. 7. 15.
남명(南明)의 강북사진(江北四鎭): 이겨도 져도 강북사진때문이다. 글: 문재봉(文裁縫) 사진의 유래 숭정17년(1644년) 오월 초구일, 용상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고, 여전히 감국(監國)의 신분이었던 주유숭(朱由崧)은 회의를 열고 군사상황을 검토하여 남명의 방어선을 건립한다. 비록 주유숭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군사상황검토와 방어선건립'이지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유숭이 하려는 일은 그저 논공행상이고, 그를 옹립하는데 공로가 있는 4명의 장군에게 상을 하사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주유숭은 그들의 관직을 올려주고, 그들에게 한 곳씩을 지키게 하였다. 군신간에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했다. 이 네 명의 장수들이 발탁되면서 그들은 각각 한 곳씩의 지방을 차지하여 한 지방의 패주가 된다. 이두 그들에게는 새로운 칭호가 붙는다. 바로 "사진(四鎭)"이다. 이 4진.. 2020. 7. 13.
남명(南明)에 기회는 없었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 2020.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