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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중수교비사 (3)

by 중은우시 2005. 9. 3.

북한과 얘기하다.

 

1988년 11월, 북한의 외상 김영남(金永南)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는 따로 그와 중국과 한국의 무역관계문제를 논의하고, 그에게, 중국은 남한과 상호 민간무역판사처를 개설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중에 쌍방의 최고지도자들이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하였다. 일차는 1989년 하반기에 김일성 주석이 북경으로 왔고, 장쩌민(강택민, 江澤民) 총서기가 그와 이 일을 논의했다. 1990년 하반기에는 김일성 주석이 심양으로 와서, 장쩌민 총서기와 재차 면담하였고, 장 총서기는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였다. 이때, 김일성주석은 중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를 표시하였다.

 

1990년 10월, 중국국제상회와 대한무역진흥공사는 상호무역판사처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하여 협의를 이루었다. 1991년초, 쌍방은 모두 상대방의 수도에 무역판사처를 설립하였다.

 

무역판사처 설립후,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다. 그것은 남북한의 UN공동가입문제였다.

 

UN은 국제적으로 가장 큰 정부조직이고, 단지 주권국가만이 참가하는데, 북한측은 여러해동안 남북한쌍방의 UN가입을 반대해왔다. 그렇게 하면 한반도의 분열을 영구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에, 남북한은 UN안에서 단지 옵저버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계속하여 UN에 가입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UN가입국내에서 한국의 UN가입을 찬성하는 국가가 갈수록 많아졌다.

 

1991년 5월, 리펑(이붕, 李鵬)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서, 북한총리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했다. 금년 UN대회기간에 한국이 다시 UN가입문제를 제출한다면, 중국은 더이상 반대입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국이 단독으로 UN에 가입하고 나면, 북한이 다시 가입하고자 하더라도 매우 곤란할 것이다. 북한 총리는 이를 들은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방문이 끝나기 전에 김일성 주석은 리펑 총리를 회견할 때, 최후로 다시 이 문제를 꺼냈다. 북한은 중국과 이 문제에 대하여 협조하고 협력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후, 북한의 신문은 평론을 내고, 북한은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리펑 총리의 북한방문시에 북한측과 달성한 협의에 따라, 중국과 북한은 북한의 연합국 가입문제에 대하여 계속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는 이 일년에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남 외상과 회담을 하였고, 김일성 주석을 만나보았다. 김영남은 회담시에 말하기를 남한은 단독으로 UN에 가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북한측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UN에서 북한에 불리한 사태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북한측은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여 UN가입을 신청하고, 남북한을 한꺼번에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만일 미국이 남북의 신청을 별도로 토론하자고 요구하면, 중국이 단호히 반대해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미국이 북한을 비토하면, 중국도 남한을 비토해주기를 바란라고 했다.

 

당시, 북한이 가장 걱정하던 상황은, 한국이 UN에 신청한 가입이 순리적으로 통과된 후, 북한의 신청은 거부되는 것이었다. 나는 회담에서 상세하게 UN의 이번 남북한 동시가입신청에 대한 절차를 설명한 후 우리는 여러측면의 협조를 통하여 북한측의 우려하는 바를 제거하겠다고 하였다.

 

김주석은 묘향산에서 나를 회견할 때, 별도로 UN가입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말하기를 남북가입문제는 어떻게 하더라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한다. 만일 나눠서 토론하게 되면 미국은 아마도 핵사찰문제를 꺼낼 것이고 비토권을 행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진다. UN문제에 있어서 북한은 중국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중국도 북한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김주석에게 설명하기를, UN은 이 문제를 토론할 때, 한반도의 남북쌍방이 동시에 UN에 가입하는 것에 대하여는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고, 이 문제는 하나의 안건으로 제출할 것이므로 북한측이 걱정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1991년 9월 17일, UN회의에서 하나의 결의가 통과되어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하고,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수교담판을 시작하다.

 

서울에서 아태경제합작조직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후, 우리는 한국과의 수교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는 단지 1년이 남았을 뿐이었으므로 중국과의 수교에 조급해하였고, 임기내에 취임시에 제기했던 북방정책의 목표를 실현하고자자 하였다. 한반도의 형세를 놓고 보면, 남북쌍방은 이미 동시에 UN에 가입하였고, 자주 함께 국제회의와 체육경기에 참가하였다. 국제적으로 북한 및 한국과 동시에 수교한 국가도 이미 100개국을 초과하였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할 조건은 기본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1992년 3월 전인대 회의기간에, 관례에 따라 나는 중외기자회견을 하였다. 해마다 기자회견상에서 외국기자들이 중국과 한국관계에 변화가 있는지를 물으면, 나의 대답은 항상 "중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다. 우리는 한국과 어떠한 정부간관계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다"였다. 이 해에는 나의 대답은 약간 변화하였다. 나는 "우리는 한국과의 수교에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민감한 외국기자들은 이 말에서 알아차린 것이 있을 것이다.

 

이해 4월, 아태경제사회이사회 제48회 연례총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고, 한국에서 외무부장관 이상옥이 참가하였다. 그는 제47회 연례총회의 의장이었고, 국제상의 관례적인 방식에 따라 나는 조어대 국빈관에서 그와 회담을 했고, 연회를 열어 그를 초대했다.

 

이번 회담에서 쌍방은 관심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는 외에, 나는 단독으로 이상옥과 중한문제에 대하여 얘기했다. 나는 그에게 중한이 정식으로 수교문제를 정식으로 담판할 시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다만, 쌍방은 먼저 연락통로를 만들어, 양국문제에 관하여 접촉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이상옥은 즉석에서 동의했다. 쌍방은 차관급의 수석대표와 대사급의 부대표를 정하고, 부대표가 실무진을 이끌고 빠른 시일내에 북경과 한국에서 직접 회의를 시작하자고 하였다. 한국측은 이번 회담전에 일찌기 여러차례 우리측의 입장을 탐문했고, 이번 외상회담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를 바랐지만, 또한 너무 많이 나가다가 오히려 반작용이 있을까 걱정했다. 현재, 그들은 마음속의 걱정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번 외상회담후, 중한 쌍방은 빠른 시일내에 수석대표와 부대표를 임명했다. 중국측의 수석대표분 외교부 부부장 쉬둔신(서돈신, 徐敦信)이었고, 한국측은 외무무 차관 노창희(盧昌熹)였다. 쌍방의 실무진은 각각 중국측의 장루이제(장서걸, 張瑞杰) 대사와 한국측의 권병현(權丙鉉)대사가 이끌었으며 각각 6,7명이었다. 5월부터 협상을 시작하였는데, 비밀유지를 위하여, 한국측은 먼저 북경에서 거행할 것을 건의했다. 한국에서 하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누설되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제1차 접촉은 조어대빈관 14호루로 안배되었다. 이 건물은 비교적 조용하고, 외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다. 한국측 인원은 나누어서 3국을 거쳐 북경으로 왔다. 투숙한 후, 건물문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제1차 접촉후 우리측은 원래 일반적인 얘기를 하며, 한국측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국측은 매우 조급했고, 인삿말만 나눈 다음에, 바로 수교문제를 꺼냈다. 그래서, 첫번째 접촉했을 때부터, 쌍방은 바로 수교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준비한 것이 있었다. 우리의 수교원칙을 제출하여,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조약을 폐기하고, 대사관을 철수시킬 것이었다. 한국측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고, 우리와 네고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생각은 대만의 "대사관"을 "연락처"로 격을 낮추어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고, 제1차 접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제2차 담판도 역시 북경에서 진행하였다. 우리는 다시 수교원칙을 내세웠고, 이번에는 한국측이 약간 양보했다. 단지 한국과 대만간의 관계가 오래되었으므로 우리에게 한중수교후에도 한국과 대만이 일정한 특수관계를 유지하는데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이것이 한국측이 내밀 수 있는 최종 카드라고 느꼈고, 우리가 기존방침만 견지한다면, 담판은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3차 담판은 서울에서 갖자고 하였고, 한국측도 동의했다.

 

제3차담판에서, 한국은 우리의 수교원칙을 받아들였고, 쌍방은 수교문제에 대햐여 협의를 작성했다.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양해각서 1부도 포함되어 있다.

 

3차례의 담판에는 2달도 걸리지 않았고, 6월말에 업무를 끝냈다. 단지 쌍방의 수석대표가 만나서, 수교공보에 서명하고, 외상이 정식 서명하고 발표할 일자만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