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행
중한수교문제는 한반도의 긴장국면을 완화시키고, 아태지구의 안정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인 영향을 가진다. 이를 위하여 한국과 접촉할 때, 우리는 계속하여 북한에 상황을 통보하고, 그들의 이해를 구했다.
1992년 4월, 중한이 아직 접촉하기 전에, 양상쿤(양상곤, 楊尙昆) 주석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주석 80회생일축하활동에 참가하는 기회에 중앙의 위임을 받아, 양주석은 김주석에게 다음 내용을 통보하였다. 국제정세와 중국의 대외관계를 분석하고, 김주석에게 중국은 현재 한국과의 수교문제를 고려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통일사업을 지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김주석은 얘기를 들은 후, 현재 한반도는 미묘한 시기에 놓여 있으며, 중국이 중한관계와 북미관계에 협력해주기를 희망하였고, 중국측이 더 많이 고려해달라고 하였다. 양주석은 귀국후에 김일성주석의 의견을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해 6, 7월에 나는 양상쿤 주석을 수행하여 아프리카를 방문하였고, 7월 12일에 북경에 돌아왔느는데, 장저민 총서기는 인민대회당에서 우리를 영접하였다.
환영의식이 끝난 후, 장 총서기는 양주석과 나을 남도록 요청하였고, 인민대회당안에서 중한수교의 건을 논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번 형량해본 결과, 북한측에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나를 평양에 한번 가서, 김주석을 면담하고, 그의 구두메세지를 전하여,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하였다는 입장을 통보해달라고 하였다.
시간이 긴박하여, 늦출 수가 없어, 북한측의 동의를 받은 후, 3일 후에 나는 공군전용기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이번은 가벼운 외교적 방문이 아니었다. 전용기상에서 나는 심리적으로 계속하여 안정할 수 없었다. 북한측이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지에 대하여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김주석이 나를 만나겠다고 응락하였지만, 우리가 통보하는 내용에 대하여 그가 돌연하다고 느낄 것인지, 북한측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북경, 평양간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기도 전에 전용기는 안전하게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다.
이전에 매번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는, 북한측에서 공항에 군중환영의식을 준비하였고, 분위기가 열렬하였다. 이번에는 비행기를 공항의 구석진 곳에 내리게 하였고, 우리를 영접을 나온 사람도 단지 김영남 외상이었다.
악수와 인사를 마친 후, 김영남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다시 외지로 가야한다면서, 우리를 대리고 멀지않은 곳에 머물고 있던 헬리콥터로 걸어갔다.
헬리콥터에 오르자, 안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고, 나와 김영남은 마주보고 앉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양측에 나누어 앉았다. 때마침 한여름이어서 헬리콥터 안은 한증막과 같아서 견딜 수 없이 더웠다.
헬리콥터가 날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의 넓은 호수가에 내렸다. 같이 갔던 잘 아는 동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여기는 김주석의 별장이고, 여름에는 자주 여기에 와서 휴양한다고 하였다.
비행기를 내리자, 우리는 하나의 별장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약 오전 11시쯤, 김주석은 다른 하나의 높은 별장안에서 우리를 회견했다. 그는 회견장의 입구에서 영접했고, 매 한 사람마다 악수를 하였으며, 그러고 난 후, 모두 넓은 회의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먼저 김주석이 바쁜 와중에도 우리를 만나준 것에 감사했고, 장 총서기의 그에 대한 문안인사를 전했다. 이어서, 나는 장 총서기의 구두메세지를 전달했다.
장 총서기는 등소평동지와 중공중앙의 동지를 대표하여, 김주석에게 숭고한 경의와 호의적인 축원을 드렸다. 장 총서기는 말하기를 현재 중국과 북한의 양당양국관계는 전향적으로 잘 발전하고 있으며, 중국측은 이에 대하여 매우 기쁘고 만족한다. 현재 국제형세는 안정적이지 않으므로, 언제든지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우리는 시기를 잘 잡아야 하며,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고, 자기를 발전시키고 국력을 증강시켜야 한다. 중국과 북한의 양당양국은 상호존중과 이해로 계속적으로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켜왔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최근의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형세변화에 따라, 우리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담판을 할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본다. 우리의 고려와 결정은, 당신의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북한의 양당양국간이 장기간의 투쟁에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우의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며, 북한의 사회주의건설과 자주평화통일을 지지하며, 반도정세가 가일층 완화되고, 북미, 북일관계의 개선과 발전을 추진하고자 한다.
김주석은 들은 후, 잠시 깊이 생각하더니, 장 총서기의 구두메세지는 명확히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중국의 독립, 자주, 평등하게 자기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여전히 계속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일체의 곤란을 극복하고, 계속하여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 김주석은 나에게 귀국후 그의 등소평과 다른 중앙지도자 동지들에 대한 문안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김주석은 우리가 가져온 선물인 구룡희주 옥조각과 신선한 리치를 보더니, 작별인사를 했다.
나의 기억중에, 이번 회견은 김주석이 역대로 중국대표단을 접견한 것중에 가장 짧은 것이었고, 회견후에도 과거의 관례에 따라 연회에 초대하지도 않았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인 시기에 김일성주석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의 대국과 한반도의 정세에 착안하여, 중국측의 입장을 이해하였고,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해주었다. 원로 지도자의 흉금과 안목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다.
김영남 외상은 나를 수행하여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고,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번 평양행은 그날로 돌아오도록 예정되었고, 전용기는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전용기에 올라 북경으로 직행했다.
북경에 돌아오자, 이미 오후 5시였다. 나는 직접 차를 몰아 중남해로 가서 장 총서기의 사무실로 갔다. 장 총서기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장 총서기는 들은 후에 몇가지 문제를 묻고는 매우 만족해 하였다.
이번 중앙이 나를 파견하여 김주석을 만나도록 한 업무는 이로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한수교
1992년 8월 24일 오전 9시, 나는 한국외상 이상옥과 조어대(釣魚臺) 국빈관 방비원(芳菲園)에서 정식으로 중한수교공보를 서명하였다. 양국 TV는 현장에서 전세계로 실황중계하였다. 국제미디어와 여론은 이를 매우 중시하였고, 신속히 보도하였으며 앞다투어 평론을 발표하고 축하를 표시하였다.
중한수교는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다만, 대만만은 불쾌하게 생각하여 한국을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배신했다"고 비난했으며, 하루 전날 서울의 "대사관"에서 철수했다.
수교후 1개월이 지난 9월 하순에 노태우 대통령은 양상쿤 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상대방의 주요 수행인원에는 이상옥 외무부장관이 있었다. 나는 특별히 UN에서 급히 돌아와 접대업무를 처리했다. 다음해 5월에 나는 요청을 받아 정식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한국정부는 막 교체되어, 나는 새로운 외무부장관인 한승주(韓昇洲)와 회담을 진행했으며, 새로운 대통령 김영삼을 만났다.
순식간에 중한 수교가 이미 십여년이 지나버렸다.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여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가까운 이웃으로서, 중한 양국의 지도자는 빈번하게 상호 방문하고, 계속하여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켰으며, 각 영역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였다. 2002년이 되어서, 양국의 무역액은 400억달러를 돌파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세번째 무역파트너가 되었고, 한국은 중국의 다섯번째 무역파트너가 되었다. 동시에 한국의 대중투자액은 이미 100억달러를 초과하였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UN등 국제조직과 국제활동에서도 쌍방의 협력은 강화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비핵화하는 측면에서도 중국과 한국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3년 2월하순, 나는 다시 한번 서울을 정식 방문하였고,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한국 새 대통령의 취임의식에 참가하였으며, 퇴임하는 대통령 김대중과 신임 대통령 노무현과 만났다.
중한수교이래 지금까지, 한국정부는 이미 몇번 교체되었다. 다만, 중한 양국의 관계는 견실한 기초를 놓았고, 계속하여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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