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상해 이야기

"일루일회(一樓一會)": 상해의 노동운동 이야기

중은우시 2024. 8. 26. 23:41

글: 포강객(浦江客)

5월 1일은 '국제노동절'로 전세계 노동자들의 공통 명절이다. 중국노동자계급의 발상지이자, 중국노동자계급의 중요도시인 상해는 "5월 1일"과 깊은 연원이 있다. 상해와 "5월 1일"의 역사이야기는 아주 많다. 여기에서는 "일루일회"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일루(一樓)"라는 것은 중국노동조합서기처의 옛터이다.

중국노동조합서기처 본부 소재지는 상해 북성도로(北成都路) 19호이다. 전형적인 2층짜리 석고문(石庫門)집이다. 서기부의 부지선정은 아주 지혜로웠다. 당시의 성도북로 신갑로(新閘路)는 상해의 5대공업지역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상해에서 나사공장이 가장 밀집되어 분포된 곳이었다. 나사공장은 당시 상해에서 산업노동자 수량이 가장 많은 업종이었다. 서기부의 문앞에는 궤도전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전체 시의 각 공업구로 쉽게 오갈 수 있었고, 시내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발동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탄생한 후, 즉시 노동운동을 당의 중심업무로 조직지도한다. 1921년 8월 11일, 당은 상해에 중국노동조합서기부를 창건한다. 당의 노동운동에 종사하는 공개된 총기관이다. 주임은 장특립(張特立, 즉 張國濤)이고, 간사는 이계한(李啓漢), 이진영(李震瀛)등이었다. 중국노동조합서기부는 공개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활동했다. 서기부 산하에는 북경, 무한, 호남, 광주, 제남등지에 분부(分部)를 둔다. 분부의 초대주임은 등중하(鄧中夏), 나장룡(羅章龍), 포혜승(包惠僧), 모택동(毛澤東), 담평산(譚平山), 왕진미(王盡美)등이다.

중국노동조합서기부와 각 분부가 성립된 후, 선전교육과 조직업무를 바쁘게 시작하고, <노동주간>을 출판하고, 노동자보습학교를 만들고, 노동자구락부를 건설했으며, 산업노동조합을 성립했다.

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서기부는 1922년 5월 1일에서 6일까지 광주에서 전국제1차노동대회를 개최한다. 출석한 대표는 162명이고, 백여개산업노동조합의 30만회원을 대표했다. 대회에서는 "재중국전국총공회(공회는 노동조합을 가리킴)를 성립하기 전에, 중국노동조합서기부를 전국총통신기관으로 하는 안"을 통과시킨다. 이를 통해 서기부는 전국노동운동의 지도지위를 인정받는다. 노동자들의 각성을 제고하고, 산업노동조합을 건립하는 기초 위에서, 조직적으로 제국주의, 봉건군벌과 자본가의 3중압박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한다.

1922년 1월 홍콩선원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1923년 2월 경한철로노동자파업을 끝으로 중국노동운동의 제1차 붐을 불러일으킨다. 13개월동안, 전국에서 파업이 100여회 일어나고, 참가자수는 30만명이 넘는다. 상해는 54회 파업을 일으키고, 인원수는 8만이상이었다. 그중 유명한 파업은 홍콩선원파업, 안원로광산노동자파업, 개란석탄노동자파업, 경한철로노동자4차대파업이 있다. 이들 파업은 모두 서기부가 지원하거나 직접 지도하여 진행한 것이다.

서기부가 지원하고 지도한 파업투쟁은 영국조계당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종수단을 취하여 저해하고 파괴한다. 그들은 이런 조직적인 파업사령부는 의문의 여지없이 북성도로 19호의 노동조합서기부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1922년 6월 "치안을 교란시킨다"는 죄명으로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건장'이자 '선봉'으로 불렸던 이계한을 체포한다. 7월 17일에는 다시 본부판사처를 봉쇄하고, 구성원들을 지명수배한다.

당시 북경은 아직 공개활동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다. 그리고 등중하가 본부주임을 맡고, 상해는 분부로 바뀐다. 북경본부가 성립된 후, 각 분부와 연락하여 '노동입법운동'을 전개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다. 동시에 계속하여 특별파견인원을 중점공업,광업기업에 침투시켜, 파업등을 조직지도한다. 예를 들어, 모택동, 유소기(劉少奇)는 안원로광산에 갔고, 팽례화(彭禮和)는 개란석탄광산으로, 나장룡, 임육남(林育南)등은 경한철로연선에 깊이 파고들어간다.

1925년 5월, 서기부는 광주에서 전국제2차노동대회를 개최한다. 회의에서 임위민(林偉民)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유소기를 부위원장으로 선출한다. 중화전국총공회가 정식 성립되고, 중국노동조합서기부는 역사임무를 완성하고 말소된다. 서기부는 성립때부터 말소될 때까지 3년 9개월간 노동자계급의 노동운동에 불후의 공헌을 했다. 중국노동운동사상 지워지지 않을 공헌을 했다.

혁명선배들의 분투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중국노동조합서기부탄생70주년을 맞이하여, 상해의 관련부서는 옛부지에 진열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992년 9월 28일 완공되어 대외에 개방한다. 나중에 성도로 고가도로를 세워야할 필요때문에, 1999년 성도북로 893농 7호로 부지를 옮겨 신관을 건설했고, 9월 29일 다시 대외적으로 개방한다. 수리후의 진열관은 두 칸의 석고문을 증가시켰고, 원래의 건축모양을 남겨둔다. 전시관내에는 대량의 진귀한 문물자료와 역사실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각지역 노동조합과 서기부총부, 분부, 지부의 성립시기를 길다란 지도의 형식으로 표시한다.

"일회(一會)"는 1920년 5월 1일 상해노동자계급이 소집한 "세계노동절기념대회"를 가리킨다.

1919년 5월 4일, 북경학생들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파리평화조약>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벌정부는 이를 진압했고, 전국인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상해노동자는 6,7만명의 대파업을 일으킨다. 5.4운동의 중심도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된다. 1920년 5월 1일, 상해, 북경, 광주등 각 공업도시의 노동자군중은 길거리로 나와 성대하게 시위, 집회를 벌였다. 상해에서 진독수(陳獨秀)와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중화공업협회(中華工業協會), 중화전국공계협진회(中華全國工界協進會), 중화공회총회(中華工會總會), 중화공계지성회(中華工界志成會), 상해전기공계연합회(上海電器工界聯合會), 상해선무잔방공계연합회(上海船務棧房工界聯合會), 상해약업우의연합회(上海藥業友誼聯合會)등 7개사회단체와 연합하여 "세계노동절기념대회"의 소집개최를 발기한다.

당시 7개의 단체는 이번 활동을 잘 조직하기 위하여, 전문기구를 설치한다. 진독수는 기념대회를 준비하는 고문으로 추대되고, 준비회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강연을 한다. 1920년 6월, 7개의 단체는 회의를 개최하여 5월 1일 오후 서문체육장(西門體育場, 즉 方斜路에 위치한 상해공공체육장, 호남체육장이라고도 함)에서 세계노동절기념대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그러나, 집회소식은 신성(申城, 상해를 가리킴)의 각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고, 북양정부는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 송호호군사서(松滬護軍使署)와 송호경찰청(松滬警察廳)은 4월말 연이어 포고를 발표하여 노동자의 집회시위를 엄히 금지한다. 그리고 서문체육관이 소재하는 사교지구(斜橋地區)를 계엄구역으로 선포하고, 낮에도 시민들이 통행을 할 수없도록 막는다.

5월 1일, 해가 막 떠오를 때, 체육장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든 병사들이 문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마치 큰 적을 맞이하는 것처럼. 정오가 지나자, 많은 노동자들이 사방팔방에서 서문체육장으로 모여든다. 1시에 가까워졌을 때, 체육장 주변에는 이미 4,5천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군경의 방해로, 대회조직자들은 부득이 4차례나 집회장소를 변경시켜야 했다. 먼저 제람교(提籃橋)의 정무회체육장(精武會體育場)으로 결정했다가 다시 사천로(四川路)의 청년회체육장(靑年會體育場)으로 바꾼다. 군경과 조계순포의 저지를 받아, 기념대회는 청년체육장 곁의 광장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연이 막 시작하려고 할 때, 군경이 나서서 방해하고, 장내의 노동자들을 해산시킨다. 어쩔 수 없이, 기념대회는 노파자로(老靶子路, 지금의 武進路)의 황무지에서 거행하게 된다. 그래도 당국에서는 가만두지 않고 계속 따라왔다.

기념대회장이 여러 차례 변경되어, 실제 회의에 참석한 인원수가 수백명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참석자들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모두 소리높여 노래부르고, 깃발을 휘둘렀다. 한 학생단체에서는 두 대의 차량에 빵을 가져와서 참석한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오후 3시, 대회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황무지의 한 작은수레를 임시강단으로 삼았다. 노동자대표와 학생 및 기업계대표가 차례대로 강연을 한다. 회의에서는 하루 8시간노동을 요구하고, "각 공업은 순결한 노동조합을 조직한다" "각 업종의 노동자들은 연합한다"는 등 3개항의 결의를 통과시킨다. 대회는 마지막에 "노동신성만세"의 구호를 외치고 폐막한다.

기념대회가 폐막했지만, 상해노동자들의 기념활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군벌당국의 탄압은 오히려 노동계의 각성을 불러왔다. 그날 밤, 7개단체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금방 <상해노동자선언>과 <러시아노동정부의 아국에 대한 통첩에 대한 답서> 두개의 문건을 통과시키고, 회의후에 발표한다. <상해노동자선언>에는 노동자대표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썼다: "오늘부터, 우리 중국노동자들이 각성한 단결정신은 이미 우리를 압박하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진독수는 비록 직접 노파자로의 노동절기념대회현장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5월 1일 진독수는 시존통(施存統), 진망도(陳望道)와 함께 징충중학(澄衷中學)에서 거행된 "5.1"국제노동절대회에 참석한다. 그는 2개월간 준비해서 편찬한 <신청년.노동절기념호>도 같은 날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상해노동계급이 "세계노동절기념대회"를 개최한 당일, 북경, 광주, 장주(漳州)등지의 노동자와 선진지식분자들도 속속 기념활동을 개최했다. 이 일련의 5.1노동절기념활동은 암흑의 중국에 한줄기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