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내산(程乃姍)
3. "나의 모든 영감은, 모두 여기서 나왔다 -----보경로3호"
서원장은 7살되던 해(1953년) 부모를 따라 회해중로의 중남신촌에서 보경로3호로 이사들어오고, 지금까지 죽 살아오고 있다. 상해100년호화주택역사상, 호화주택내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혹은 보경로3호는 정말 조상의 비호를 받은 것인지, 옛날 호화주택의 거주자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시대에 굴복하여 속속 집을 나가 강호를 떠돌 때도 그는 이 집을 지킬 수 있었고, 새로운 세기의 햇볕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 그의 레코드수집은 보경로3호를 상해의 어느 특정소집단의 거점이 되도록 만들었다.
외국인조차 이렇게 말한다: "만일 상해 보경로3호를 가보지 않았다면, 너는 진정 상해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원장은 자신한다. 자신은 외모부터 개성까지 부친을 더 많이 닮았다고. 그러나 그는 다행히도 그를 알아주는 작가인 부친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원래 몸이 약했던 서원장은 학교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참새를 잡고 사해(四害)를 제거하며, 폐철이나 구리를 수집하고, 의무노동을 하는....하루는 마침내 부친에게 말한다: "아빠,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재미도 없고, 시간낭비하는 것같아서...."
그 부친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동의한다: "좋다. 우리는 집에서 공부해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외부와 격리된 보경로3호의 서양주택내의 생활은 시간이 이미 1949년전의 리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도 그런 생활리듬에 습관이 되었고, 아직도 이곳에서 가정교사를 하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집안으로 몇몇 선생을 불러도 여전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잊고 있었다. 당시의 상해는 누구든지 반드시 단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몸을 의탁할 곳이 없이 사회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영혼같다는 것을.
사실상 초등학교2학년때부터, 서원장은 그런 귀속이 없는 떠도는 영혼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개방되었고, 상해탄에는 갈수록 많은 자유직업자가 나타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생활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쉽게 사회의 한산인사로 분류되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시끄러운 대도시내의 대화원을 갖춘 정토(淨土)에서 자라면서, 서원장은 모친에게 그림을 배운다. 총명하고 민감한 모친은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비록 그녀는 그가 직접화가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저명한 화가인 장충인을 그의 그림선생으로 초빙해주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전후로 합정(哈定), 이영삼(李泳森) 부부에게 그림을 배우고, 저명한 유화초상화의 대가 유운계(兪雲階)도 보경로3호에서 5년간 그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그외에 그는 범계성(范繼聖, 피아니스트 공상동(孔祥東)의 스승인 범대뢰(范大雷)이 부친, 당시 상해음악학원 피아노과 주임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형과 함께 섬서로(陝西路)의 한 개인교사에게 영어를 배운다. 비록 피아노는 잘 배우지 못했고, 영어도 유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교육은 그의 혈관에 가라앉아 있어, 묵묵히 그의 사고와 예술적인 재능에 영양을 공급했다. 그렇게 하여, 보경로3호의 담장안에는 3대 사람들의 생활이 있었고, 서원장같은 남색을 많이 쓰는 귀족의 피를 가진 화가도 나오게 되었다.
일찌기 9살에 여동생이 요절하고, 12살때 어머니가 떠났기 때문에 서원장의 동년생활은 약간 쓸쓸했지만, 이것은 그에게 옅은 애상을 지니게 해주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는 천성적으로 약간의 담담한 애상이 있어야 한다고. 아마도, 서원장은 확실히 천성적인 예술가인 듯하다. 단지 일찌감치 학교의 집단생활을 벗어났고, 오랫동안 집에서 약간의 훈도만 받았기 때문에 ,상해탄의 동년배들과는 다른 점이 되었고, 또한 그의 이후 일관된 겸양, 민감, 취약 그리고 세상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된 것이다. 특히 집담장바깥에 융합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보경로이외의 생활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마음 속에 1949년부터 상해는 이미 고정되어버렸다: 바로 그 어려서부터 익숙했던 그늘 속의 낡은 서양집; 그의 생활은 12살 때부터 유화에 심취하여 고정도이어 버렀다: 그것은 바로 1920년대 재즈음악과 유화이다. 당연히 예쁜 여인도 있다.
그는 부친 서흥업과 많이 닮았다. 용모도 평범하고, 세상일도 모르고, 말을 잘하지도 못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설사 나중에 그가 운동때 할머니와 아주머니들로 구성된 이농생산조(里農生産組)에서 일할 때도 그 4,50세된 전혀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고, 예술이라고는 모르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이 문아한 어린 청년을 아주 아껴주었다.
서원장은 음악과 그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백치이다. 생산조는 전문적으로 코일을 생산했다. 서원장은 잘 할 줄 몰라서 왜 그런지 몰라도 그가 만드는 코일은 하나가 제대로 되면 하나는 망쳤다. 그래서 항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몇명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그를 쉬게 하고 자기들이 좀더 일을 해주었다. 몇 사람이 그의 목표를 맞춰준 것이다.
"너는 양방의 도련님이다. 이런 일은 네가 할 것이 아니다."
다만, 매일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리하여 서원장은 한편으로 그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상해에는 동유럽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는 이들 영화이야기를 쉽게 풀고, 상해식으로 바꾸어서 이들 할머니, 아주머니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녀들은 아주 재미있게 들었다. 나중에는 아에 매일 출근하기 전에, 그를 위해 두장(豆漿), 자반(糍飯), 유조(油條)를 사다 주었고, 그는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그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몫은 자연스럽게 그녀들이 대신 해주었고.
운동때, 보경로3호는 공유화되어 화교서복창(華僑西服廠)이 된다. 서씨부자는 어쩔 수 없이 후루(後樓)로 쫓겨났다. 이전에는 물건을 넣어두던 창고였다. 상해사람들이 정자간(亭子間)이라고 부르는 건물에 부속한 것이었다. 필자는 일찌기 그의 초청으로 음악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당시에는 테이프가 아주 희귀한 때였다.
그래도 자그마한 정자간은 아주 정취있게 꾸며져 있었다. 원장, 부인과 부친 서흥업은 특별히 서양간식과 커피를 끓여서 대접해 주었다. 바로 그때 나는 그의 부인 황형의(黃亨義)를 알게 되었다. 1970년대에 그녀는 겨우 30몇살이었다. 아름답고 설사 이미 퇴색된 남색베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다른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중국과 독일의 혼혈아였다. 그녀의 부친은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경찰학교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바로 거기서 부친과 예쁜 독일아가씨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얘기하자면 교묘하지만 마치 운명이 정해준 것처럼 부모가 선생과 학생간의 사랑이었던 것처럼, 황형의와 그도 스승과 제자관계였다. 그녀가 15살 뙤던 해에 소개를 받아 그에게 유화를 배우게 된다. 그때 서로 사랑이 싹터서 8년간 연애끝에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황형의는 서원장의 모친과 아주 비슷했다. 보경로3호의 넷째딸의 판박이였다. 예쁘면서도 다재다능했다. 그녀는 언혜주(言慧珠)와 함께 경극을 배운 적도 있고, 베이스가수인 온가쟁(溫可錚)에게 성악을 배우기도 했다. 당시 나송구락부(羅宋俱樂部)에서는 백러시아의 발레도 배웠다. 그녀는 그림도 잘 그렸다. 원래 그녀는 상해문화계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될 수 있었다.
1965년 주소연(周小燕)이 이끄는 상해성악단에서 황형의가 있는 상해의 모 부품공장으로 학생을 찾으러 왔다. 황형의가 노래 하나를 부르자 그는 최우선 후보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상해성악단에서도 1년간 공부했다. 아쉽게도 이 성악단은 운동때부터 해산되어버린다.
당시 서원장의 모친과 같이, 황형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심지어 당시 아주 잘나가던 군구사령관의 아들도 있었고, 조반파 두목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데 용모도 뛰어나지 않고 권세도 없고, 더더구나 재물도 없는 서원장을 좋아한 것이다. 1971년 보경로3호의 정자간으로 들어온다. 그들에게는 엄마처럼 아름다운 딸이 있다.
1992년, 황형의는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녀는 이미 42살이었다. 아마 이는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딸을 위하여 떠난다.
서원장은 상해를 떠날 수 없었다. 심지어 보경로3호를 떠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상해이외의 도시를 가본 적도 없다. 더더구나 바다를 건너 외국까지는. 이 부부는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다시 만났을 때는 여전히 친구였다.
이렇게 부인을 보내고, 딸을 보내고, 그는 여전히 보경로3호를 지키면서 그의 상해노양방을 그린다. 그는 공직도 없고, 그저 자신의 붓으로 스스로 먹고살면서 보경로3호의 대화원양방을 유지하고 있다.
집은 여인과 같다. 잘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어야 빛을 발한다. 운동후 보경로3호는 돌려받는다. 그래도 이 호화주택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정원사를 불러 전체 수천평방미터의 큰 화원에 물을 주고 풀을 뽑는데만도 1달에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그리고 200평방미터의 큰 거실에 에어컨을 한번 틀면 전기료가 천위안단위로 나온다. 그래서 에어컨을 틀지 않고, 단지 크고 작은 등만 켜놓으면 계량기가 아주 느리게 돌아간다.
당연히 새로 몇대에 걸쳐 정성껏 가꿔온 보경로3호를 새로 단장하여 옛날의 영광을 되찾게 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서원장이 백명이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래도 이 앵도원(櫻桃園)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친척은 우스개로 말한다: "이 멍청한 녀석같으니, 평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니 여자가 아무도 너와 같이 살려하지 않는 것아니야."
그는 그저 경작할 뿐 수확을 바라지는 않는다. 50년동안, 그는 비젤의 화법으로 구상해건축물을 그렸다. 점점 그에게는 몇 가지 시리즈가 형성되었다....역사명인주택, 종교건축.....처음에 그는 단지 자신의 몇몇 친구와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었는데, 나중에 자기 집의 거실에서 몇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서 광고도 하지 않았고, 그 어느 미술평론가도 그의 작품을 선전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과 그는 보경로3호처럼 상해탄에서 점점 핫한 것이 되어간다. 거의 모든 상해의 외국영사관의 외교관들은 모두 보경로3호로 와서 그림구경을 했다. 적지 않은 중국과 외국의 미디어, 미국의 <타임>지를 포함해서 그에 대해 보도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중국과 외국의 인사들이 그의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한 외국의 화랑은 이렇게 그의 그림을 평가했다: 서양건축물을 그리는 것은 서양에서 희귀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서원장의 그림에는 일종의 옛상해의 맛이 있어서 아주 독특하고 사람을 도취시킨다.
장미는 결국 꽃을 피운다.
당연히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과정은 기나길고 고통스럽다. 인내심과 믿음이 필요하다. 상해APEC회의때, 그의 62폭 노양방유화를 선택하여 희의장에 걸어두었다. 정부에서는 정식으로 서원장의 노양방화를 그림엽서로 만들어 상해의 APEC회의에 참가한 관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보경로3호에 갇혀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가르친다. 그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돈을 받지 않는다. 다만 반드시 자질이 있어야 한다. 그외에 기질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학생은 거의 모두 묘령의 미녀들이다. 그도 이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귀엽고 순수한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나를 기분좋게 한다."
이런 좋은 마음과 좋은 분위기를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여학생들과 친구로 지내지, 연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한 그루의 나무가 그저 삼림속에 버려져있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4. 상해에서 옛날 명문집안의 후손들이 모이는 거점이 되다.
필자가 이미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집의 의미는 단지 거처하는 것과 같이 단순하지 않다. 일종의 생활방식과 생활태도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옛날 호화주택들은 주인이 바뀌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을 때, 보경로3호의 저택내에는 계속하여 1936년에 설치한 채색등이 있어 마치 집나갔다가 돌아온 탕아를 위해 빛을 비춰주는 것같고, 여전히 따스하게 새로운 세기에 옛날 명문집안 후손들에게 비추어준다. 이곳의 모든 건축물은 그들의 길고 깊은 기억을 담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3시가 되면 그들은 이곳에 모인다. 그들 중에는 옛날 철강대왕의 손녀 주문기(朱文琪)도 있고, 면분대왕의 손자 주영선(朱永宣)도 있고, 성선회(盛宣懷)의 외손자와 손녀도 있으며, 해상명의 전조(錢潮)의 아들 전소창(錢紹昌)도 있다. 그들 대부분은 옛날에 성요한대학, 호강대학등 저명한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그래서 서양의 고전음악선율에 아주 익숙하고 사교에도 능숙하다.
이곳은 그들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앵도원이다
외국인조차 이렇게 말한다: "상해에 와서 보경로3호에 가보지 않는다면, 원즙원미(原汁原味)의 상해문화를 견식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보경로3호의 호화주택과 거기를 드나드는 사람을 합쳐서 모두 상해문화의 활화석(活化石)이라고 본다.
가장 장관이었던 어느 외국인집회는 그의 집에서 거행된 "스웨덴의 밤"행사였다. 앞뒤로 모두 170여명이 왔고, 거기에는 스웨덴의 한 주장(州長)도 있었다. 그리고 8명의 외국영사들이 함께 보경로3호를 방문한 적도 있다.
오래된 상해의 호화주택은 집안과 집밖에 모두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모든 호화주택의 주인은 모두 윤회하는 생명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한층 또 한층 깔린다. 호화주택은 말이 없다. 그러나 묵묵히 몇대에 걸쳐 국화처럼 담담한 풍경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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