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내산(程乃姍)
만일 서원장(徐元章)이 떠나지 않았다면, 보경로3호의 이야기는 아마도 역사의 먼지 속에 덮여버렸을 것이고, 다시는 아무도 그것을 털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찌기 상해탄 "노극륵(老克勒, Old White-color의 상해식 번역어인데, 서양식교육을 받은 화이트칼라들을 가리켰다)"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서양호화주택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호화주택이라는 말은 아주 기세있는 단어이다. 그 안에서는 왕왕 어지럽게 얽혀 있는 가족간의 은원도 포함되어 있고, 이미 점점 사라져가는 노상해(老上海)의 모습을 비춰주기도 한다. 시간의 터널 저 끝에서 하나의 투영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해의 모든 호화주택의 완공은 모두 상해에서 하나의 전설의 시작이었다. 성공한 인사의 기념비와 같았다. 상해의 호화주택은 많은 경우 전설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난다. 결국 수천년간 내려온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부자는 삼대를 못넘긴다. 이는 돈있는 집안의 후손들이 무능력한 것과도 관련이 있지만, 더더욱 중국이 오랫동안 변란을 겪어서 안정되지 못했던 시국과도 관련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상해에서 유명한 호화주택은 10개가 있다. 즉 대문앞에 "십대명택(十大名宅)"이라는 동패(銅牌)가 붙어 있는 것이다. 이 십대명택의 재산권은 모두 국유로 되었다. 그외에 약 3,000여동의 호화주택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는 독립화원양방(獨立花園洋房)이 있고, 그중 재산권이 여전히 사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개략 1할도 되지 않는다.
상해 보경로3호는 바로 그 1할에 속하는 호화주택이다.
1. 안료거상(顔料巨商) 주종량(周宗良)의 저택
회해중로(淮海中路) 남쪽끝의 보경로에는 도로를 따라 세워진 쇠난간 뒤로 울창한 푸른 나무숲이 있고, 은연중에 서양식건물의 한쪽 구석이 보인다. 그외에 시내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사계절 푸른 잔디밭도 있다....
1925년, 상해의 부호 주종량이 보경로3호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의 보경로3호는 지금의 5개동을 가진 호화주택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담장의 뒤로 단지 1동의 주건물과 1동의 하인들이 거주하는 부속건물이 있을 뿐이며, 원래 독일교민의 빌라였다.
보경로3호의 건축특징은 서양스타일이 점점 상해로 들어올 때, 호화주택은 중국전통의 대관원(大觀園)같은 단순히 활기(闊氣)와 귀기(貴氣)를 추구하지 않고, 갈수록 조각과 그림을 그린 기둥, 기석진목(奇石珍木)을 버리고, 외형설계를 간결하게 하기 시작한다. 서방이 추구하는 전원녹지의 요소가 중국인들이 강조하던 봉쇄적이고 삼엄하고 번잡한 전통설계에 들어오게 되면서 녹지공간의 시각미를 강화하여, 현대의 햇볕과 녹색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경로3호건축면적은 모두 1,048평방키터인데, 토지사용면적은 5,000평방미터라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이 곳이 지왕(地王, 가장 비싼 땅)이라고 불리는 옛날 프랑스조계 하비로(霞飛路)의 황금분할점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경로3호의 가장 대단한 점이다.
주종량은 큰 돈을 들여 이 빌라를 구입한 후, 7년의 시간을 들여, 초보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다. 그는 그외에 3개의 건물을 지었다. 1동은 여자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1동은 8개의 부엌이 있는 주방이고, 또 1동의 독립된 서양주택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Ball Room이었다.
현재는 그의 외손자이며 상해탄에서는 "양방화가(洋房畵家)"로 불리는 서원장(徐元章)이 거주하고 있다. 큰 화원 안에는 지금도 BBQ그릴이 사용가능하다. 단지 굽는 사람들은 이미 몇대 이후의 사람들이다. 이 옛날의 상해거부 주종량을 얘기하자면, 그 또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주종량은 영파(寧波) 사람이다. 그가 처음 몫돈을 번 것은 그의 총명함으로 번 것이 아니라, 그의 성실함으로 번 것이었다.
주종량은 영파의 유명한 교회학교인 비적공학(斐迪公學)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상해의 한 독일상인의 양행(洋行)에서 보통직원으로 일했다. 제1차세계대전기간동안, 독일상인의 겸신상행(謙信商行)의 오너인 찰라문(扎羅門)은 자신의 거금과 여러 곳의 부동산을 주종량의 명의로 해두었다.
당시는 아무런 법률적인 보장수단이 없었다. 만일, 주종량이 그의 이 재산들을 먹어치웠더라도 그 독일 오너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주종량은 하나의 동판도 숫자가 틀리지 않게 그대로 이 겸신상행에 돌려준다.
그렇게 하여 그의 성실함으로 독일인의 신뢰를 얻는다. 얼마 후, 그는 독일 I.G. Farben AG(전체 명칭의 의미는 염료공업집단이다)의 총매판(總買辦)이 된다. 당시의 I.G. Farben AG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듀폰에 대항할 수 있는 화학공업기업이었다.
1929년, 주종량의 자본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외환저축만 330만달러에 이르렀다. 1940년대에는 더욱 늘어나 400만달러에 달한다. 이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이다.
주종량은 당시 중앙은행 이사, 상해공상계상회 주석등을 겸임하여,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이 매판출신의 상해인은 영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지만, 생활방식은 아주 전통적이었다. 비록 서양식주택에 살고 있지만, 일상의 의복은 모두 장삼마괘였고, 입을 열면 닝보사투리의 상해말이었고, 외국어를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2. 천금소저가 자신의 가정교사를 사랑하게 되다.
천금소저가 자신의 가정교사를 사랑하는 이야기는 이미 근대중국연애소설의 상투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보경로3호에서 그런 리얼리티 로맨틱스토리가 상연되게 된다.
주종량의 넷째딸 주운금(周韵琴)은 부친과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서양식아가씨였다. 그림, 피아노, 사교댄스에 모두 정통했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했다. 상대적으로 중국의 국학에 대한 소양은 비교적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특별히 무석국문전과대학을 졸업하고, 용모는 평범하고, 말이없고 내향적인 선생을 그녀의 가정교사로 삼는다. 1주일에 2번 목요일에 아가씨는 한문과 고시가를 배웠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이 쫓아다니는 남자가 많았던 예쁜 부잣집 딸이 이 자기보다 나이고 7살이나 많고, 풍류적이지도 않고,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가정교사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도화운이 형통한 가정교사는 나중에 1991년 모순문학상을 받아, 상해문학계에서 모순문학상을 최초로 받은 상해작가 서흥업(徐興業)이다.
얘기하자면 서흥업도 명문집안 출신이다. 부친 서춘영(徐春榮)은 실업가(實業家)로 갑북(閘北)의 민족공업발전에 힘썼고, 갑북수전공사(閘北水電公司)를 창업한다. 그의 갑북구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어떤 사람은 현재의 청운로(靑雲路)를 춘영로(春榮路)로 개명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아쉽게도 일본군이 갑북을 폭격할 때, 서씨집안의 모든 재산은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명문출신이지만 집안이 몰락하는 것을 겪은 남자는 계속 순조롭게 살면서 따스한 집에서 지내온 부잣집도련님과는 남다른 매력을 지녔다. 마치 불로 달궈져서 단련된 금속처럼, 소양도 있고, 노력하여 발전하려는 태도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쑥스럼이 많았지만, 그의 내심은 열정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래서 매일 보경로의 이 호화주택을 드나드는 다른 부잣집도련님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천금소저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일 것이다.
그들의 아들인 서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옛집을 정리하면서 여러통의 부친이 당시 여학생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발견했는데, 수려한 붓으로 쓴 해서가 편지지위에 적혀 있었다. 비록 서지마(徐志摩)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열정이 넘쳤다. 거기에 글씨까지 잘쓰다보니 더더욱 그 사람됨의 착실함과 무거움이 믿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될 정도였다. 아마도 그래서 여자로서 마음이 움직이고 신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혼사를 주종량은 당연히 반대했다. 집안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호화주택에서 자라온 딸이 보경로3호의 담장을 벗어나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이 넷째딸은 기꺼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회해중로의 상해시도서관부근의 중남신촌(中南新村)의 상해 보통사람들이 모여사는 집의 1층에 신혼집을 차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한쌍의 부부로 맺어졌다. 주종량은 그들의 혼례에 참석하지 않는다. 나중에 금성은행(金城銀行) 사장인 주작민(周作民)이 설득하여 겨우 이 혼사를 묵인하게 되고, 혼수를 한몫 떼어서 넷째딸에게 준다.
1948년 주종량이 홍콩으로 간 후, 그들 부부는 아들 둘, 딸 하나를 데리고 보경로 3호로 돌아와 거주한다. 1957년 주종량이 사망하고, 넷째딸은 홍콩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유산을 받는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곳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서흥업은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하여 이곳에 거주했다(1992년 서흥업은 사망했다). 비록 이 혼인은 마지막에 이별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어쨌든 아무 것또 따지지 않았던 사랑으로 시작하여 이 100년호화주택에 어느 정도 장미빛 기억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건축과 사람의 관계는 기실 몸을 기거하고 비바람을 피하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건축은 사람에게 마치 생명과 시공을 짜는 베틀같은 것이다. 생명을 담은 흙과 씨와 같은 것이다. 인생, 운명, 기회는 모두 생명에 영양을 주는 건축과 관련이 있다.
중서문화가 보경로3호내에는 조화롭게 교차하고 있고, 주운금과 같은 재색을 겸비한 명사들을 배출해 냈다. 그녀의 총명함과 고귀함은 이 시끄러운 도시의 가운데 있는 녹색땅에서 얻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집안이 몰락하고, 갑북의 실업가 가문에서 내향적이었던 서흥업으로서는 영원히 깰 수 없는 맹점이었다. 화가인 서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모친이 가장 사랑한 것은 유일한 딸인 여동생이었는데, 9살때 뇌염으로 요절했다. 죽기전의 10여일동안 모친은 밤낮으로 딸의 곁을 지났고, 슬픔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 된 그녀는 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한장 한장 딸이 사망과 싸우는 광경을 그려냈다. 보통사람이라면 모친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오직 화가인 아들은 알았다. 서원장은 말한다: "그녀는 이미 말로는 자신의 절망과 자책을 표현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그림에 의지한 것이다.....나는 모친의 마음을 알겠다...!"
다만 혹은 그녀의 남편, 옛날 그녀가 호화주택의 생활을 버리고 그를 따라 천하를 돌아다닌 남자는 아마도 그걸 몰랐을 것이다.
1952년부터 1992년 서흥업이 별세할 때까지, 그는 보경로3호에 거주했다. 도로를 따라 하루종일 닫혀있는 나무문은 바깥의 세계를 여과시켜주었다. 40년의 세월동안, 그는 계속하여 자신의 문학세계메 매진했다. 신혼때 부인과 함께 구상했던 당시 그들이 처했던 전쟁시대를 배경어로 한 남송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완성했다. 바로 이 40년의 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것이 160만자의 소설 <금구결(金甌缺)>이다. 그것으로 그는 모순문학상을 받는다.
혹은 그가 마침대 당시 그 순진하고 낭만적이던 여학생을 이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1957년 주운금은 보경로3호를 떠나 홍콩으로 간 후 다시 영국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가서 정착한다. 1980년대, 조각가인 장충인(張充仁)의 부인이 파리를 갔을 때 그녀를 만난다. 듣기로 그녀는 파리에서도 약간의 명성을 얻은 여성화가라고 한다. 나중에 그녀의 큰아들인 서원장의 형 서원건(徐元健)이 미국에 방문학자로 갔을 때, 파리의 드골공항을 거쳐가게 되었고, 근 30년간 헤어져있던 모자는 그때 유일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늙었더라." 서원건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인재로 성장한 것에(서원건은 북경중국과학원 응용수학연구소에서 이론물리를 연구했다),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부친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친은 그에게 아름다운 은색찬구(餐具)를 선물했다.
기실 1980년대에 출국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주씨집안의 넷째딸은 여전히 보경로 저택에서 길러진 현금에 대한 긍지와 함축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사치품을 그녀의 마음 속에 과학자인 아들에게 준 것이다. 비록 이 화려하지만 쓸모는 없는 선물이 서원건의 짐의 무게만 늘인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모친이 마음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운금은 부호의 딸로 태어나 재산이 없는 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금산은산은 다 없어지지만 몸에 지닌 학문이야말로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녀교육에는 아주 엄격했다. 큰아들 서원건은 모친의 엄격한 교육하에 위육중학에서 동제대학을 거쳐 중국과학원으로 들어갔다. 성적이 아주 뛰어났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고 한다. 모친이 그에게 당송시사를 외우도록 몰아세운 것을. 그러면 바로 긴장하면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정말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무섭지 않지만,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재촉하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독서에 그다지 특출하지 않았던 둘째아들 서원장에 대하여 주운금은 적잖이 실망한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서 둘째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회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비록 불만이기는 했지만(왜냐하면 회화로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상해의 남동생에게 부탁해서, 서원장에게 그녀가 옛날 그림을 배우던 선생을 소개시켜준다. 그가 바로 저명한 조각가인 장충인 선생이다.
전해듣기로 상당히 예쁘고, 낭만적이며 다재다능했으며 또한 생활은 우울했던 주종량의 넷째 딸에 대하여 적다보면 나는 항상 장애령(張愛玲)의 모친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그녀들은 이미 양대인에 속하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행복을 추구했지만 우울하게 지내야 했던 것이다.
1980년대까지, 그녀는 보경로3호의 남편 아이들과 가끔 편지를 주고 받고 전화도 했다. 나중에는 인간증발한 것처럼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2004년 상해시제1중급인민법원에서 보경로3호의 재산권분쟁으로 법정이 열렸을 때, 주운금은 법원에 의해 '행방불명'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이미 여러번 재난을 당한 보경로3호에는 더 이상 그녀가 어렸을 때의 사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마치 일찌기 책속에 끼워져있는 잊혀진 마른 장미꽃잎처럼, 사람들이 이 책을 뒤적일 때면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 꽃잎이 조용히 떨어져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사랑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천금소저는 비록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보경로3호 자체는 그녀에게 그다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왜 돌아오지 않기로 선택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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