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멸망시킨 후, 국군(國君)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중은우시 2022. 7. 21. 15:24

글: 금색설역사(金色說歷史)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진(秦)나라, 제(齊)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이다; 주위열왕23년(기원전403년), 조, 위, 한의 삼가분진(三家分晋)후, 중화역사는 전국시대로 접어든다(시간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도 있다). 그후 주안왕16년(기원전386년), 주천자는 제나라 전씨(田氏)에게 많은 돈과 재물을 뇌물로 받은 후, 실질적으로 제나라의 국정을 여러 해동안 통치해오던 전씨의 우두머리 전화(田和)를 제후(齊侯)로 봉하여, 전씨가 정식으로 제후가 된다. 주위한의 삼가분진으로부터 전씨제국(田氏齊國)까지, 그리고, 격렬한 제후간의 병합투쟁에서 살아남은 진, 초, 연의 세 대국을 합쳐 정식으로 전국시대에 가장 강대했던 7개 국가가 형성되고,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전국칠웅"이다.

 

진효공5년(기원전356년), 진효공은 위(衛)나라사람인 공손앙(公孫鞅, 일명 商鞅)을 기용하여, 변법도강한다. 그때부터 진나라는 발분도강하며 계속 발전하면서 6명의 국군, 근 백년의 시간이 흘러 진장양왕3년(기원전247년)에 이르러 진나라는 위, 조, 초, 한등 강력한 적수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며, 하서(河西), 파촉(巴蜀)을 탈취하여, 효산(崤山)동쪽의 육국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나타내게 된다. 

 

진장양왕이 사망한 후, 장남이자 당시 나이 겨우 13살인 영정(嬴政)이 즉위하니, 그는 진나라의 31대 국군이다. 진왕정9년(기원전238년), 영정이 친정을 시작하며, 조정을 어지럽힌 조태후의 정부인 장신후(長信侯) 노애(嫪毐)일당을 주살한다. 진왕정10년(기원전237년)에는 영정이 "중보(仲父)", 상방(相邦),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를 "공기사용(公器私用), 천권전단(擅權專斷)"했다는 이유로 재상에서 파직하고, 봉지로 돌려보낸다. 진왕정12년(기원전235년)에 여불위의 왕권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중보'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더욱 먼 곳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여불위는 자신이 화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살한다. 이렇게 하여 영정의 왕권은 더 이상 외부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된다. 그는 마침내 여유를 가지고 선왕들이 제정한 책략에 따라 산동6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진왕정17년,한왕안(韓王安) 8년(기원전230년), 진왕은 산동6국에 대하여 10여년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후에, 최초로 버티지 못한 나라가 쓰러지게 된다. 진나라의 남양군수(南陽郡守) 내사등(內史騰)은 기습을 통해 육국중 가장 약체였던 한나라를 공격하고, 한왕안(韓王安)은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남은 5만의 병사를 모조리 위수(渭水) 남안으로 보내어 진군을 맞이한다. 내사등은 진군을 이끌고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갈리는 것같은 기세로 쳐들어가며, 한나라군대는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전군이 궤멸하여 도망치게 된다. 진군은 승기를 틈타 추격을 하여, 한나라의 도성 신정(新鄭)을 포위했다. 내사등이 친히 말을 타고 나가 소리친다. 그리고 투항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자 한왕안은 절망에 빠져 소복을 입고 성문을 열고 나가 진나라군대에 투항하며 왕인(王印)을 바친다. 이렇게 한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를 제거한 후, 내사등은 한왕안을 함양(咸陽)으로 압송하여 진왕에게 바친다. 영정은 한왕안을 서인(庶人)으로 폐한 후, 진현(陳縣, 지금의 하남성 회양)에 안치시키고, 관리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거주하게 한다. 진왕정21년(기원전226년), 한나라의 옛귀족들이 신정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한왕안을 모셔가 한나라를 복국시키려 한다. 진나라군대는 반란을 진압한 후,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진현에 연금되어 있던 한왕안을 죽여버린다.

 

진왕정19년, 조왕천(趙王遷)8년(기원전228년), 진나라는 반간계를 써서 조왕으로 하여금 조나라의 마지막 대들보인 이목(李牧)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고, 즉시 대군을 발동하여 조나라를 공격한다. 신임 조군총사령관인 조총(趙蔥)은 이목처럼 진나라군대를 격퇴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진나라장수 왕전(王翦)에게 죽임을 당한다. 패잔군은 한단으로 물러난다. 조왕천(趙王遷)은 간신 곽개(郭開)의 주장을 받아들여 투항하려 한다. 그러나 조왕천의 형인 공자(公子) 조가(趙嘉)는 극력 반대하며, 진나라군대와 끝까지 혈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왕천은 이미 투지를 잃었다. 공자가의 간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명을 내려 성문을 열고, 진나라군대에 투항한다. 조나라는 이렇게 멸망한다.

 

진나라와 조나라는 혈연적으로 같은 일족이므로(조나라의 왕족도 영(嬴)성이다. 진나라왕족과 같이 둘 다 상나라말기의 대신 비렴(蜚蠊)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조왕천에 대하여 영정은 가벼운 처분을 내린다. 서인으로 폐한 후, 방릉(房陵, 지금의 호북성 운양)에 안치하여 산 속에서 거주하게 한다. 그후 서인이 된 조왕천은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조용히 방릉의 산 속에서 나이들어 죽은 듯하다.

 

한단이 함락된 후, 공자가는 조왕천과 함께 투항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투항하길 원치않는 종족자제, 성내관리 백성등 백여명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와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대(代, 하북성 울현)의 땅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대왕(代王)에 오른다. 그리고 조나라의 대의 땅에 있던 잔존세력을 끌어모아 계속 진나라에 저항한다.

 

진왕정22년, 위왕가(魏王假) 3년(기원전225년), 진나라는 한, 조 두 나라를 멸망시킨 후, 계속 초(楚)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진나라가 남하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도중에 위나라의 도성 대량(大梁)일 지나야 했다. 위나라가 후방에서 기습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영정은 먼저 위나라를 정벌하여, 측면의 우환을 없앤 후 다시 초나라를 정벌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영정은 왕분(王賁, 왕전의 아들)를 위나라를 공격하는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왕분은 출정하여 대량을 포위한다. 3개월동안 성을 포위하고 일거에 섬멸하고자 했지만, 대량성의 성벽은 높고 튼튼했으며, 지세도 험준했다. 진나라군대가 여러번 강공을 펼쳤지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사상자만 수없이 발생하게 된다. 왕분은 분노하여 호구(濠溝)를 파서 황하의 물을 대량으로 끌어들여 수공을 펼친다. 성벽이 마침내 황하물에 의해 무너지고, 대량은 더이상 지켜낼 수가 없게 된다. 위왕가는 할 수 없이 성문을 열고 나와 진나라군대에 투항한다. 이렇게 위나라도 멸망한다.

 

왕분은 공성과정에서 여러번 실패하고, 군대의 사상자가 심각하여, 성을 지키던 위왕가에 대해 원한이 깊었다. 그리하여 위왕가가 투항한 후, 몰래 그를 죽여버린다. 그후 진왕에 죄를 달게 받겠다고 청한다. 영정은 군대의 정서를 감안하여 왕분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그로 하여금 계속 군대를 이끌고 대량에 주둔하게 한다. 위왕가는 이렇게 죽어버린다.

 

진왕정23년, 초왕부추(楚王負鄒) 4년(기원전224년) 영정은 한, 위, 조의 삼진을 멸한 후, 즉시 장군 이신(李信)에게 20만대군을 주어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초나라는 강경했다. 항연(項燕)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반격한다. 항연은 진나라군대가 연전연승하여 교만해진 틈을 타서, 반격한다. 진나라군대는 방비에 소홀했다가 초나라군대에 격패당하고, 손실이 참혹했다. 이신은 황급히 잔여부대를 이끌고 진나라로 도망쳐 돌아간다.

 

영정은 실패후에 교훈을 얻는다. 노장 왕전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온나라의 군대를 끌어모아 60만대군을 만들어 2차로 초나라를 공격한다. 왕전은 출병추 차근차근 전투를 벌여가며 견고한 성을 쌓아서 항연의 군대와 대치했다. 초나라는 국력소모가 심해져서 물자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군심이 흔들리게 된다. 초왕부추는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 여러번 항연에게 출동하여 진나라군대와 일전을 벌여 격퇴하라고 재촉한다.

 

항연은 어쩔 수 없이 진왕정24년,초왕부추5년(기원전223년), 적극적으로 진나라군대에 대한 공격을 전개한다. 그러나 진나라군대가 쌓아놓은 엄밀한 방어망을 뚫지 못한다. 어쩔 수 없게 된 항연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수춘(壽春)으로 물러난다. 왕전은 초나라군대가 퇴각하자 즉시 병력을 이끌고 추격한다. 과하(渦河)변에서 진영이 흐트러진 초군을 따라잡고 포위공격한다. 초군은 대패하고, 주력은 전멸하고, 항연도 전사한다. 진나라군대는 기세를 틈타 계속 동진하여, 방어가 허술한 초나라도성 수춘을 함락시킨다. 초왕부추는 도망가다가 진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그후 초왕부추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전쟁통에 피살되었거나 벽지로 유배갔을 것이다. 어쨌든 사서에서 그의 행적은 실종된다.

 

수춘이 함락된 후, 초왕의 동생 창평군(昌平君) 웅계(熊啓, 원래 진나라의 장수이며, 초나라의 왕족임)는 진나라를 배신하고 회남에서 초나라의 잔여세력을 끌어모아 스스로 초왕에 앉는다. 수도는 난릉(蘭陵)으로 한다. 그리고 장강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진군에 저항한다. 진왕정25년(기원전222년), 진나라장수 몽무(蒙武)가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마지막 초나라잔여세력이 있는 난릉을 공격한다. 창평군은 진군을 버텨내지 못하고 패전후 난릉에서 자살한다. 이렇게 초나라는 멸망한다.

 

진왕정19년, 연왕희(燕王喜)27년(기원전228년), 진나라는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조나라의 공자가는 수백의 심복을 데리고 한단을 빠져나와 북으로 대의 땅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대왕이 된다. 진나라는 조나라의 전지역을 점령한 후, 병력을 연나라조나라국경까지 밀고 들어간다. 역수를 넘어 연나라땅으로 쳐들어갈 의도였다. 연왕희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신하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는다. 이때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은 예전에 진나라에 인질로 여러 해동안 잡혀가 있었고, 진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강성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나라대신들이 제기한 "대(代), 제(齊), 초(楚)와 연합하여 진나라와 싸우자"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리고 놀라운 의견을 낸다. 직접 진왕을 암살하여, 진나라내부가 권력투쟁으로 혼란에 빠져서 다른 나라에 신경쓸 여지가 없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연왕희는 태자단의 의견에 동의했고, 자객을 사신으로 위장하여 진나라에 보내며, 그 기회에 진왕을 암살하기로 한다.

 

진왕정20년, 연왕희28년(기원전227년), 연나라의 태자단은 협객 형가(荊軻)를 가짜사신으로 파견하여 진나라에 거짓으로 투항하겠다고 찾아가게 한다. 진왕을 접견할 때 암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형가자진(荊軻刺秦)"이다. 아쉽게도 형가는 마지막에 실패하고, 영정은 위기를 벗어난다.

 

암살실패후, 영정은 즉시 이를 빌미로 왕전, 신승(辛勝)등 대장으로 하여금 역수를 넘어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연왕희와 태자단은 대왕가에게 연락하여, 연, 대 연합군을 결성하고, 역수의 서안에서 진군과 대치한다. 왕전은 진군을 지휘하여 연,대 연합군을 역수에서 대패시키고, 10만명을 참수한다. 연나라는 군대의 주력이 전멸했고, 잔여부대는 계성(薊城, 북경의 서남쪽)으로 도망쳐 온다. 

 

진왕정21년, 연왕희29년(기원전226년), 진군은 승기를 틈타 연나라의 도성 계성을 함락시킨다. 연왕희와 태자단은 황급히 요동(遼東)으로 도망친다. 진나라장수 이신은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연수(衍水, 요녕성 혼하)에서 잔존 연나라군대를 따라잡고, 대패시킨다. 진나라군대의 추살을 막기 위하여, 연왕희는 대왕가의 권유에 따라 태자단을 죽이고, 진나라에 비굴하게 화의를 청한다. 영정은 곧 위나라, 초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을 벌여야한다는 점을 고려하고, 연, 대연합세력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연,대연합군을 공격하던 병력을 되돌려, 위를 공격한다. 도망중인 연왕희는 잠시나마 구차하게 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진왕정25년, 연왕희23년(기원전222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초나라국왕인 창평군 웅계가 자살한다. 그리하여 영정은 왕분을 총사령관으로 대군을 모아 북상시키고 요동을 포위한다. 구차하게 4년간 목숨을 연장한 연왕희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왕분은 요동성(요녕성 요양)을 함락시켰고, 연왕희를 생포한다. 이렇게 연나라는 멸망한다.

 

영정은 형가를 시켜 자신을 암살했던 구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연나라사람이라면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분에게 연나라에서 투항한 왕족종실을 함양으로 압송할 필요없이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명한다. 연나라왕족들은 이렇게 도륙되고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연나라를 멸망시키 ㄴ후, 진나라군대는 대의 땅으로 되돌아온다. 대왕가는 겨우 나라를 세웠지만 실력이 약해서 진나라군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패전하고 포로로 잡힌다. 이렇게 조나라의 잔여세력도 멸망한다.

 

대왕가는 포로로 잡힌 후, 함양으로 압송된다. 조천을 사면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영정은 조가도 자신과 같은 성이 영인 일맥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서인으로 폐한 후, 그가 이끌고 투항한 일족들과 함께 영성이 일어난 땅인 농서군 상규현(上邽縣, 감숙성 천수)으로 보내어 거주하게 한다. 그후 조가는 상규에 머물머 거기서 늙어죽는다.

 

조가가 죽은 후, 아들 조공보(趙公輔)는 그를 농서군 서현(감숙성 예현)의 서한수(西漢水) 가에 묻는다. 그의 묘를 당시 백성들은 조가의 묘라는 뜻으로 "가릉(嘉陵)"이라고 부른다. 서한수는 촉군의 하맹현(섬서성 약양)으로 흘러들어간 후, 고도수와 만나 양평관으로 해서 사천으로 흐른다. 파군(중경)에 이르러 장강에 합류한다. 발원지가 조가의 묘인 가릉이 있는 곳이므로 후세의 수경지리사서에서는 이 강을 "가릉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릉강 명칭의 유래인 것이다.

 

진왕정25년, 제왕건(齊王建) 43년(기원전222년) 진나라는 연나라를 멸한다. 이제 산동의 제국들 중에서 제나라만 남았다. 제왕건은 재위기간이 40여년이며 계속 편안하게 생활했고, 전쟁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나라의 예우를 받으면서 득의만면하고 아무런 방어준비를 해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군민들은 상하로 모두 경계심이 느슨해져 있었다.

 

다른 다섯 나라가 모두 멸망한 후에 비로소 제왕건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하여 급히 병력을 모았고, 서쪽국경방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진나라와 왕래를 끊는다. 영정은 제나라가 진나라사신의 제나라방문을 거절하였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왕분에게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제왕건은 제나라군대 주력 40만을 서쪽 국경에 모아 진나라군대에 저항한다. 제나라의 주력이 모두 나가, 서부에서 왕분이 이끄는 군대를 방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성인 임치(臨淄)를 수비하는 병력은 거의 없었다.

 

제나라군데가 서쪽국경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연(燕)의 땅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군대가 이신의 지휘하에 돌연 연나라땅에서 신속히 남하하여 금방 연제국경을 돌파하고, 임치성까지 밀고 들어간다. 성안의 제나라군대는 진나라군대의 돌연한 기습에 어쩔 줄 몰라한다. 아무런 방어활동도 하지 못한다. 어쨌든 제나라는 40여년간 평화롭게 지내왔었기 때문에 전투의 투지가 없었다. 진나라군대와 시가전을 벌일 용기도 없었다. 제왕건은 이미 늙었고, 전혀 결사의 전투를 벌일 투지는 없었다. 진나라군대가 먼저 항복하면 오백리 봉지를 주겠다고 약속하자, 제왕건은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고 진나라군대에 투항한다. 제나라는 이렇게 멸망한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영정은 제왕건을 서인으로 폐하고, 명목상으로는 약속을 지킨다. 공(共)의 땅 오백리를 전건(田建)에게 봉읍으로 하사한다. 담나 진나라는 전건이 시녀, 시종, 노비등을 데려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품도 제공하지 않았다. 전건은 혼자 공의 땅에 버려진다. 전건은 황량한 소나무와 전나무가 있는 사이에 스스로 물을 긷고 음식을 만들며 초가집을 지어야 했다. 결국 나이도 많고,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었던 그는 배고픔과 병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후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