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진시황이 창립한 진황조는 겨우 14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중국의 기나긴 역사에 무수한 짙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진황조는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일들이 모호하다. 예를 들어 진왕 자영은 진황조의 마지막 황제(정확히 말하면 진왕)이지만, 역사상 그에 관한 기록은 아주 희소하다. 너무나 희소하여 그의 신세내력마저 불분명하다. 우리는 자주 그를 호해(胡亥)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에도 전문가들조차 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1. 자영(子嬰): 불행한 군주
자영은 위난의 시기에 진왕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겨우 40여일간 있다가 피살당한다.
진시황이 죽은 후, 조고는 이사를 끌어들여 조서를 위조한 후 공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호해를 황위에 올렸다. 호해가 등극한 후, 조고는 권력을 장악하고 이사까지 주살해버린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하며 지록위마했고, 전체 조정이 그의 놀이감으로 전락한다.
기원전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난다. 비록 반란은 반년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는 전국에서 반진반란을 불러온다. 3개월후에는 멸망했던 6국의 귀족들이 점차 복국을 하기 시작하여 천하에는 풍운이 다시 일어난다. 조고는 그 상황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한(章邯)등 장수를 꺼려했다. 거록지전이후 장한은 항우에 투항하고, 진황조는 마지막 지푸라기마저 잃어버린다.
기원전207년, 조고는 진이세 호해를 살해한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그가 황제에 오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조고는 전혀 위망이 없어 천하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영을 진왕에 앉힌다. 5일후, 허수아비가 되어 죽고싶지 않았던 자영은 아들과 모의하여 조고를 살해한다. 그해 십월, 유방이 함양으로 쳐들어오고, 자영은 투항한다. 유방은 자영을 주살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개국후에 그를 승상에 앉힐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항우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당시의 약정을 지키지 않고, 유방을 쫓아냈을 뿐아니라 자영을 살해한다. 진왕 자영은 이렇게 목숨을 잃는다.
역사에 자영에 관한 자료는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은 단지 그가 기원전207년에 사망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의 신세내력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도대체 호해의 아들인지, 아니면 호해의 형의 아들인지, 아니면 진시황의 동새인지, 혹은 진시황의 숙부, 백부인지, 추측은 많지만 통일된 견해는 없다.
2. 역사상의 자영
자영은 도대체 어떤 신분인가. 이에 대하여는 논쟁이 많았다. 어느 정도로 논쟁이 있었는가? 심지어 사마천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 자영에 대하여 두 가지 신분을 기록했다: 호해의 형의 아들과 진시황의 동생. 이 두가지 신분은 2대의 차이가 난다. 그외에 또 어떤 사람은 자영이 진시황의 숙백(叔伯)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호해의 조부뻘이다. 그럼 도대체 어느 견해가 믿을만할까?
논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일부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첫째, 자영은 나이가 제법 많았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영은 그의 아들과 모의하여 조고를 살해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영에게 아들이 있었을 뿐아니라, 아들이 이미 장성했다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고대의 남자들은 성년나이가 20살이다. 다만 고대에는 20살전에 아들을 낳는 경우도 많았다. 그외에 진나라의 복역나이는 15세이상이다. 우리는 가장 적은 나이로 가정하더라도 만일 자영이 15살에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고, 다시 그의 아들이 모의시 15살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때 자영의 나이는 최소한 30살이 되어야 한다(가장 적게 추정한 경우임).
그리고, 자영이 조고가 진왕에 세운 이유는 자영이 명망있는 인물이고, 신민의 신뢰를 받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고는 자신이 황제에 오르려 했지만, 그는 천하인들이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할 수 없이 자영을 앞세웠던 것이다. 만일 나이가 어렸다면 어떻게 천하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둘째, 자영은 국군의 아들이다. 사료에 자영을 칭할 때 왕왕 "진왕(秦王)" 혹은 "공자(公子)"라고 부른다. "진왕자영" 혹은 "공자영"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칭호는 신분을 상징한다. 전자는 그가 진왕을 했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가 군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춘추전국 내지 진나라때 왕왕 제후의 아들을 가리킨다. 제후의 아들의 아들이라면 "공손(公孫)"이라고 불렀다. 자영을 "공자영"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명확하게 그가 군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느 군주의 아들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호해의 아들일 수도 있고, 진시황의 아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진시황 부친대의 아들일 수도 있다.
셋째, 자영은 왕위계승권이 없었다. 호해가 조서를 고쳐서 부소를 죽인 후, 다른 형제자매가 황위를 빼앗으려 할까봐 우려하여 모든 그의 왕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죽여버린다. 피살된 종친이 부지기수이다. 자영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심지어 호해가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일 때, 자영은 분노하여 간언하고, 그 내용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만일 그가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앞장서서 직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호해는 그런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자영은 황위계승권이 없다. 다만 지위가 있는 종실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자영의 신분을 추측해보자.
3. 자영 신세의 수수께끼
이상의 세 가지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쉽게 사마천의 기록을 배제할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 자영은 호해의 형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반대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이가 맞지 않는다. 기원전207년에 호해가 피살된다. 당시 그는 겨우 24살이었다. 우리가 위의 첫째 추단에 따르면 자영은 최소한 30살이 되어야 한다. 호해가 죽었을 대 그의 조카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좀 불합리하다. 당연히, 호해에게 자기보다 21살이상 많은 형이 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가장 직접적인 반박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둘째, 공자의 신분과 맞지 않는다. 우리가 앞에서 추단한 것처럼 공자는 국군의 아들을 칭하는 것이다. 만일 자영이 호해의 형의 아들이라면, 그는 절대로 공자라고 불릴 수 없다. 같은 배분에서 호해가 이미 황제에 올랐다. 만일 그가 호해보다 아랫대의 사람이라면, 즉 진시황의 손자라면 그는 마땅히 '공손영(公孫嬰)'이라고 불렸어야 한다.
셋째, 상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번재에서 추단한 것처럼 자영이 진왕에 추대되고, 호해에게 주살당하지 않은 것은 완전히 그가 황위계승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방계이고, 혈통이 비교적 멀 것이다. 만일 그가 호해의 형의 아들이라면, 호해와 조고에게 피살당하지 않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추단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둘째이다. 즉 자영은 군주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국군의 아들일까? 주로 세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호해의 아들, 진시황의 아들, 진시황의 부친대인 진장양왕의 아들. 진시황의 황조부대인 진효문왕의 아들. 다시 그 위까지 올라가면 아마도 나이가 맞지 않을 것이다.
먼저, 호해의 아들이라는 설은 배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해는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영이 진시황의 아들이라는 것도 배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해는 모든 형제자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황위계승권이 있는 친형제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남은 두 가지가 가능성이 크다.
진효문왕은 기원전303년에 태어나서, 기원전250년에 사망한다. 향년 53세이다; 진장양왕은 기원전281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247년에 사망한다, 향년 35세이다. 진효문왕은 스물몇명의 아들을 둔다. 진장양왕은 중간쯤이다. 우리는 자영이 진효문왕의 아들이라고 가정하면, 아마도 막내쯤일 것이다. 그는 기원전281년부터 250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207년 진왕에 추대될 때라면 나이가 74세에서 43세 사이가 된다. 이렇게 보면 자영은 진효문왕의 아들일 수도 있다. 나이가 적합하고, 공자라는 칭호나 권력중심에서 밀려난 종실이라는 신분에도 부합한다.
우리는 다시 자영이 진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보자. 그는 기원전266년부터 기원전247년 사이에 태어나야 한다. 기원전207년에 진왕에 오를 때 자영의 나이는 59세에서 40세 사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영은 진장양왕의 아들일 수도 있다. 나이라든지, 공자라는 칭호라든지 권력중심에서 밀려난 종실이라는 신분에 모두 부합한다.
이상을 보면 진왕 자영의 신분은 진시황의 형제이거나 진시황의 숙백뻘일 것이다. 즉 호해의 숙백뻘이거나 호해의 조부뻘일 것이다.
결론
우리는 자영이 호해보다 아랫대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그럴 것이라는 생각일 뿐이었다. 당시의 역사조건에 비추어보면, 자영은 진장양왕의 아들 혹은 진효문왕의 아들일 것이다. 비록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이 최선의 추정이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진왕자영의 신분을 확정하기 어려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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