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자금(王子今)
선태후는 성이 미(羋)이고, 초(楚)나라 출신이다. 그녀가 진나라에서 겪은 정치인생은 진혜문왕(秦惠文王)의 집정부터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집정시기까지 진나라가 신속하게 강국으로 발전한 역사궤적과 걸음을 같이 한다. 그녀는 진나라의 정치를 수십년간 주재했다. 이 역사시기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내가 전공을 다투고(海內爭於戰功)" 각 대국은 "군사력을 키우고 다른 나라를 병합하는데 주력했으며(務在强兵幷敵)"(사기. 육국년표), "패망한 자를 추격하고, 패배한 자를 쫓아내고(追亡逐北)" "천하를 나누어 가지는(宰割天下)"(가의 <과진론>) 떄였다. 사마천의 "소양업제(昭襄業帝)"의 평가(사기.태사공자서)는 이 시기 진나라사람들의 역사적 성취가 이후 통일을 달성하는데 가지는 의의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선태후는 진시황의 제업의 기반을 놓은 사람중 한명이다.
고대 최초의 "태후"
진(秦)과 초(楚)는 모두 중원문화의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변방이었는데, 차례로 신속히 굴기하면서 정치적 강국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순자.왕패>의 소위 "비록 후미지고 누추한 곳에 있는 나라지만 그 위세가 천하를 뒤흔들었다.(雖在僻陋之國, 威動天下)"고 했다. 진소양왕은 일찌기 "진나라는 후미지고 멀리 떨어져 있다(秦國辟遠)"(사기.범저채택열전)라고 인정한 바 있다. 초회왕(楚懷王)은 스스로 "이 후미지고 누추한 나라(此僻陋之國)"라고 칭하기도 했다. 초나라사람들은 일찌기 "폐읍지왕(敝邑之王)", "제후들이 우리를 멀리 한다(諸侯遠我)"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기도 했다(사기.초세가). 진효공(秦孝公)도 일찌기 "제후들이 진나라를 업신여기니 추악하기 그지없다(諸侯卑秦, 醜莫大也)"라고 탄식하기도 했다(사기.진본기). "진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어서, 친척의 나라같았다(秦與楚接境壤界, 固形親之國也)" 바로 초나라와 진나라가 친한 형세하에서 나중에 선태후라는 미씨성의 초나라여자가 진나라로 시집오게 된 것이다.
진나라와 초나라간의 통혼은 오랜 전통이 있었다. 장의(張儀)는 일찌기 초회왕에게 이렇게 건의한 바 있다: "청컨대 진나라여자를 대왕의 부인(箕帚之妾)으로 맞이하십시오"(사기.장의열전). 이전에 초평왕(楚平王)은 사람을 진나라로 보내어 태자의 부인을 취하였다. 그리고 "진나라여자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진나라여자를 취하고" "태자에게도 진나라여자를 취하게 한" 이야기가 전해지게 된다(사기.초세가). 저명한 진나라로 시집간 초나라여자는 나중에 진효문왕(秦孝文王)의 왕후가 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있다. 진효문왕은 진소양왕의 후계자이다. 여불위(呂不韋)는 정치투자를 하여, 이인(異人)을 지지하여 왕위계승자가 될 기회를 노린다. 그는 이인으로 하여금 '초나라복장'을 하고 '자식이 없는' 화양부인을 접견하게 한다. 과연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산다. 한나라학자 고수(高繡)는 이렇게 해석했다: '초복은 성복(盛服)이다. 왕후가 초나라사람이므로, 초나라식으로 옷을 입어 그녀를 기쁘게 해준 것이다'(전국책.진책오). '초복'은 '성복' 즉 화려한 옷이다. 이는 고향을 오랫동안 떠나있었던 초나라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초나라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혜문왕이 죽고, 진무왕(秦武王)이 즉위한다. 그는 진나라에서 두번째로 "왕(王)"을 칭한 군주이다. 그는 집정 4년째 되던 해에 역사(力士)와 "정(鼎)을 들다가" 사고로 정강이뼈가 골절된다. "진무왕은 힘이 있었고 놀이를 좋아했다." "몇몇 역사들은 모두 고위관직에 오른다." 이런 상황만으로 진무왕이 무능한 혼군이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힘자랑을 좋아하는" 것은 진문화의 전통경향이다. 진무왕은 짧은 4년동안, 위왕(魏王) 및 한왕(韓王)과 성공적으로 회맹(會盟)하고, "과인은 삼천(三川, 위수, 경수, 예수를 가리킴)으로 마차가 통하게 하여 주왕실을 노려보겠다"는 웅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군대를 진군시켜 의양(宜陽)을 취하고, 주왕실이 있는 낙양(洛陽)을 압박했다. 의거(義渠)도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토벌한다(사기.진본기). 진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계속 확장하는 정책을 진무왕은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했다. <사기.진본기>와 <사기.육국년표>에는 모두 진무왕2년(기원전309년) "처음으로 승상(丞相)을 설치하다"라는 일을 기록한다. 전자(<사기.진본기>)에는 이런 기록도 추가되어 있다: "이질(里疾), 감무(甘茂)를 좌우승상으로 삼았다." 승상제도를 둔 것은 후세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제도의 발명이었다. 진무왕이 "의거를 토벌하고" "주왕실을 노려보아서" 나중에 진소양왕때 "천하를 나누어 가지고, 강산을 분열시키는" 선례를 만들었다. 가의는 <과진론>에서 진시황의 사업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내린다: "6세(六世)에 걸친 노력으로 좋은 정책을 펼쳐서 천하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소위 "육세"라는 것은 "진효공, 진혜문왕, 진무왕, 진소양왕, 진효문왕, 진장양왕"을 가리킨다. 확실히 진무왕도 포함된다.
진무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진소양왕이 즉위하게 된다. "진소양왕은 어렸으므로, 선태후가 다스리고, 위염(魏冉)을 임명하여 정무를 담당하게 한다." 위염은 선태후의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동생이다. "진혜문왕, 진무왕때부터 관직을 맡아 일을 했다" 선태후와 위염의 협력으로 진소양왕의 지위는 확보되어, 권력교체기의 정치위기를 넘긴다. 두 오누이가 결합한 조합은 일시에 진나라의 위세를 떨친다(사기.양후열전). 진나라역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선태후"라는 명호는 현존자료를 볼 때, 중국에서 "태후"라는 칭호가 출현한 최초의 사례이다. 송고승(宋高承)의 <사물기원> 권1 "태후"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기.진본기>에 말하기를, 소왕(진소양왕)의 모친 미씨는 선태후라 불렀다. 왕의 모친을 처음 이렇게 부른 것이다." "태후라는 명호는 진소양왕때 시작한다." 명나라때 동사장(董斯張)의 <광박물지>권십일 <사물고>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진소왕의 모친 미씨는 선태후라 불렀다. 태후라는 명호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후세의 역대왕조에서는 여러번 "태후"가 정치에 간여하거나 정무를 주재하는 상황이 나타나는데, 그것도 실제로는 선태후때부터이다. 중국고대 첫번째 "태후"로서 이 여성의 정치적 표현은 여러 방면에서 첫번째였다고 할 수 있다.
선태후시대에 진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진다.
선태후가 국가경영권력을 모두 진소양왕에게 넘긴다. 마비백(馬非白)은 <진집사(秦集史)>에서 "당시는 소왕41년이다"(중화서국 1982년판, 제106페이지)라고 하였다. <사기.범저채택열전>에 따르면, "소왕이 즉위한지 이미 36년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선태후의 권세를 약화시킬 것을 고려하게 된다. 이 여자는 오랫동안 집권했고, 진나라가 취득한 "남으로 초나라의 언영(鄢郢)을 함락시키고, 초회왕을 진나라에서 죽게 만들었다. 진나라는 동으로 제(齊)를 격파한다." 그리고, "여러번 삼진(三晋, 한,위,조를 가리킴)을 곤경에 빠트렸다." 이는 모두 "진태후, 양후(穰侯, 위염)가 한 일이다...진왕은 한 일이 없다." 이 시기에 이룬 것은 모두 선태후시대에 진나라사람들이 거둔 승리라 할 수 있다.
선태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진나라역사에는 군사적으로 승전을 거두고, 정치적으로 성공한 일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기.진본기>의 기록을 보면, 진소양왕원년(기원전306년)부터 진소양왕36년(기원전271년)까지 위, 한, 초, 제, 조나라에 대하여 여러번 주도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통계로 잡은 "참수"기록은 합계43만에 이른다. 29년(기원전278년)에는 백기(白起)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郢)을 점령한다. "초왕은 도망친다" 이는 전국시대 진나라군대가 원정하여 적국의 도성을 함락시킨 최초의 사례이다. 27년(기원전280년), "사마착(司馬錯)이 농서의 군대를 이끌고 촉에서 초의 검중(黔中)을 공격한다" 30년(기원전277년)에는 촉수약(蜀守若, 張若)이 초를 토벌하여 무군(巫郡)을 취하고, 강남을 검중군(黔中郡)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모두 진나라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일으킨 대규모 공격이다. 나중에 장평전투를 지휘하여 조나라군대주력 40여만을 몰살시킨 명장 백기는 스타장군으로서 선태후시기에 이미 떠올랐다. "십삼년....좌경(左更) 백기가 신성을 공격하다" "십사년, 좌경 백기가 한, 위를 이궐에서 공격하고, 24만을 참수하다." "이십칠년,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다" 28년(기원전279년)과 29년(기원전278년)에는 "초나라를 공격"한다. 백기는 이미 대량조(大良造)의 신분으로 원정군을 통솔했다. 영을 취한 후에는 백기가 무안군(武安君)이라는 봉호를 얻는다.
진소양왕9년(기원전298년), "맹상군(孟嘗君) 설문(薛文, 田文)이 와서 진나라의 재상이 된다." 이는 진나라가 동방인재를 기용하여 행정개혁을 추진한 특별한 경우였다. 이 역사기록의 진실성은 진동릉1호묘에서 출토된 문물로 증명되었다. "십년, 초회왕이 진나라로 온다. 진나라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고 남겨두었다." "십일년, 진나라는 제, 한, 위, 조, 송, 중산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글고 한,위와는 단독으로 강화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는 군사동맹을 와해시킨다." "십칠년, 동주군(東周君)이 왔다." "이십구년, 주군(周君)이 왔다." 이는 모두 중요한 외교적 성과이다. 십이년, "초나라에 속(粟) 5만석(石)을 주었다." 이는 전국시대에 규모가 가장 큰 국제물자원조였다.
상앙변법(商鞅變法)은 확실히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다. 다만 사마천이 말한 것처럼, "상군(商君, 상앙)은 원래 사람됨이 각박했다." 그의 여러 언행은 "상군이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했다는 것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탄식한다: "결국 진나라에서 악명을 듣게 된 것은 이 자 때문이다."(사기.상군열전). 상앙은 진나라에서 악명을 얻는다. 그러나 바로 <한비자.정법>에서 말한 것처럼, "효공, 상군이 죽고, 혜왕이 즉위해도, 진법은 망가지지 않았다." 선태후는 직접 "거열상군(車裂商君)"사건을 목격한다. 진혜문왕이 상앙을 처형했지만, "상군법"의 정책은 견지하고 관철한 것에 대하여 비교적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화씨>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상군이 진나라에서 거열형을 당했다....상군법을 받들어 부강해졌다." <한비자.문전>에도 이런 말이 있다: "상군을 받들어 부강해졌다." 선태후시대에도 여전히 상군법을 행하는 정치적 방향을 유지했다. 저명한 채택(蔡澤)과 범저(范睢)의 대화에서도 7번이나 '상군'이 언급된다. 모두 "극신무이려(極身無二慮), 진공이불고사(盡公而不顧私)"(최선을 다하면서 딴 생각을 하지 않고, 공적으로만 일했지 사적인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충성을 다해서 공을 세웠다(爲人臣盡忠致功)" 채택은 심지어 상앙을 찬양한다: "주군을 위해 위기를 안정시키고 정책을 고치며, 혼란을 다스리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고, 우환과 어려움을 제거했다. 영토를 늘이고 곡식을 심어 나라를 부강하고 집안을 풍족하게 했다. 주군을 강하게 만들고, 사직을 존귀하게 만들고, 종묘를 빛나게하니, 천하가 감히 그 주군을 속이거나 범하지 못했고, 주군의 위엄이 해내를 덮고 떨쳤으며, 공은 만리바깥에까지 이르고, 명성은 천세를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런 말도 한다: "무릇 상군이 진효공을 위하여 법령을 집행하고, 간사함을 금하며,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상을 내리며,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했다. 균형을 유지하면서 도량을 바르게 해고, 경중을 맞추었다....병력을 움직이면 영토가 넓어지고, 병사들이 전쟁을 하지 않을 때면 나라가 부강해졌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천하무적이 되고, 제후들 사이에서 위엄을 세우고, 진나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공을 이루고나서, 차열형을 당했다."(사기.범저채택열전). 이를 보면, 선태후시기에 진나라의 사회여론은 상앙의 '충성'과 '공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고, 그를 동정하는 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태후는 상군법을 집행하는데 매우 굳건했으며, 상앙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진혜문왕때와 비교하여 더욱 객관적이고 공정했다.
"의거융(義渠戎)"의 문제
진나라문화는 서융(西戎)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리하여 동방국가들로부터 "이적으로 취급받았다."(사기.진본기). 진나라사람들은 두드러진 진취정신과 영웅주의로 동방인들이 보기에 "호랑지국(虎狼之國)"이었다(사기.소진열전)(저리자감무열전)(맹상군열전)(굴원가생열전). 다만 바로 이런 문화특징때문에 진나라는 전쟁수단과 군사방식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다.
<사기.흉노열전>에는 이렇게 적고있다: "의거"는 서융팔국(西戎八國)중 하나이다.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 있다." <사기.육국년표>에 따르면, 진여공공(秦勵共公)6년(기원전471년), "의거가 와서 재물을 바쳤다(義渠來賂)". 진조공(秦躁公)13년(기원전430년), "의거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위양(渭陽)을 침범한다." 진나라와 의거간에는 실력의 강약과 공수관계가 반복변화했다. 진혜문왕때, 진나라와 의거의 관계는 진나라의 국력이 상승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형성된다. 진혜문왕7년(기원전331년), "의거에 내란이 일어났다. 서장조(庶長操)가 병력을 이끌고 평정했다." 진혜문왕11년(기원전327년), "의거의 군주가 신하로 되었다." 진혜문왕 경원5년(기원전320년), "왕은 북으로 융(戎)의 땅으로 가서 하상(河上)에 이른다." 진혜문왕은 의거를 통해 통제하는 지방이 북으로 '하상'에 이른 것이다. 이는 바로 미팔자(羋八子, 팔자는 후궁의 직위이고, 선태후를 가리킴)가 "혜왕지비(惠王之妃, 진혜문왕의 비)"일 때이다(<사기.양후열전> 사마정의 <색은>). 진혜문왕 경원11년(기원전314년), "의거를 침입하여, 25개성을 얻다." <사기.흉노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중에 의거가 성곽을 쌓아 스스로를 지켰고, 진나라가 조금 잠식했다. 혜문왕에 이르러, 의거의 25개성을 점령한다. 혜문왕은 위나라를 공격하고, 위나라는 서하와 상군을 진나라에 넘긴다. 진소양왕때, 의거융왕은 선태후와 음란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선태후는 거짓말로 속여서 의거융왕을 감천에서 죽인다.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 나머지 의거를 토벌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갖게 되고, 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는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가 지금의 농동(감숙동부), 섬북(섬서북부), 영하의 대부분 지방을 차지하게 되고, 직접 초원의 호족들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 범저가 진소양왕을 만났을 때, "소왕이 도착하고, 범저가 환관들과 말다툼하는 것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 그를 만난다. "짐이 원래 일찌감치 그대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의거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긴박하여 아침저녁으로 태후에게 말씀드려야 했다. 지금 의거의 일을 다 처리하였으니, 그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사기.범저채택열전>의 이 내용을 보면, '의거일'이 당시 군국대사중에서 가장 긴급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진소양왕도 참야했으나 자주 태후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보아, 선태후가 의거문제를 처리하는 최고의사결정권자였음을 알 수 있다. "거짓말로 속여서 의거융왕을 감천에서 죽인다.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 잔여 의거를 토벌한다."는 결정은 진나라의 서북방향 전략형세의 군사행동을 결정했고, 그것은 선태후가 기획과 지휘를 주관한 것이다.
선태후는 거병하여 잔여병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의거문제를 해결했다. 즉 대체로 서북지방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위나라에서 서하, 상군을 얻고 이번에 농서, 북지를 평정하면서, 진나라는 후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진군이 동진하는데 더 이상 뒷마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후한서.서강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시황때 육국을 병합하는데 주력했고, 병력을 서쪽으로 보내지 않았다." 진혜문왕시대에 파촉을 점령하면서, 선태후는 "혜왕지비"로서 직접 이 성공적인 전략의 형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후 "촉이 진나라에 속하게 되면서, 진나라는 더욱 강해졌고, 부유해졌고, 다른 제후들을 경시할 수 있었다." (사기.장의열전). 그리고 진나라의 북방과 서북방으로의 진격은 선태후의 공로이다. 그 의미는 그녀의 남편이 파촉을 병합한 것에 전혀 못지 않다. 선태후는 상군, 북지에 대한 통제를 실현하고, 진나라의 상층지배집단이 여러 위도의 공간을 통제하게 되었으며, 유목지역, 농사유목혼합지역, 조(粟)재배지역, 보리(麥)재배지역 그리고 벼(稻)재배지역을 모두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나중에 통일왕조의 서로 다른 생태지역과 경제지역에 대하여 전면적인 행정통치를 실행하는데 예행연습을 한 셈이 된다. 당시의 동방육국은 그 어느 나라도 이런 정치실천의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소양업제(昭襄業帝)"에 관하여
<사기>에는 "소양업제"라는 말이 나온다. 또 다른 '업제(業帝)'라는 말은 <태사공자서>에 나온다. 사마천은 유방이 항우를 격패시키고 나라를 세운 공적을 칭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적업제(誅籍業帝), 천하유녕(天下惟寧)"(항우(항적)를 죽이고 제업을 세우니, 천하가 평안하게 된다). 기실 가장 먼저 '업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선태후와 동시대의 명신 채택이다. <전국책.진책삼)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채택이 범저와 얘기를 나눌 때, 명장 백기의 전공을 언급한다: "초나라는 백만이 무기를 들고 있는데, 백기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서 일거에 언,정을 점령하고, 다시 이릉을 불태우며, 남으로 촉한을 병합하고, 다시 한,위를 넘어 강력한 조나라를 공격했다. 북으로 마복(조괄)의 군대 사십여만의 무리를 갱살했으며, 피가 흘러 강이 되고 그 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다(使秦業帝)". 그리고 <사기.범저채택열전>의 기술은 이러하다: "초나라땅은 방원수천리로 백만이 무기를 들고 있는데, 백기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서 일거에 언,정을 점령하고, 다시 이릉을 불태우며, 남으로 촉한을 병합하고, 다시 한,위를 넘어 강력한 조나라를 공격했다. 북으로 마복(조괄)의 군대 사십여만의 무리를 갱살했으며, 모조리 장평에서 죽였다. 피가 흘러 강이 되고 그 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마침내 한단을 포위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다(使秦業帝)" 이를 보면, 소위 "소양업제"는 바로 진소양왕시대에 "진나라의 제업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채택이 이 말을 할 때는 바로 범저가 진소양왕에게 "진나라에 태후와 양후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왕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한지 겨우 몇년이 지난 때였다. 대체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한 것"은 주로 태후가 정무를 결정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진소양왕때 일찌기 칭제(稱帝)한 바 있다. <사기.진본기>에는 진왕이 "서제(西帝)"라고 칭하고, 제왕(齊王)이 東제(西帝)라고 칭했다는 역사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진소양왕)19년, 왕은 서제가 되고, 제는 동제가 되었다." <사기.조세가>에는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가 스스로 서제라 칭했다. <사기.전경중완세가>에는 제민왕이 이렇게 말한 기록이 있다: 진나라의 사신 위염이 제(帝)라고 불러주었다." 이를 보면, 진,제는 짧은 기간동안 제(帝)라고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나라가 스스로 서제라 칭한" 것이 먼저이고, 진나라가 제나라도 "제"라고 칭해준 것이다. 이는 전략적인 합작의 필요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소양왕 19년(기원전288년)에 "스스로 서제라 한 것"은 선태후가 직접 기획하고 처리한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소진(蘇秦)은 일찌기 진혜문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는 사민(士民)이 많고, 병사와 법치의 가르침도 있어서 천하를 집어삼키고 칭제(稱帝)하여 다스릴 만합니다."(사기.소진열전). 우리는 이렇게 믿을 수 있겠다. 진혜문왕초기에 '칭제'의 웅심이 있었다. 진소양왕은 비록 짧은 기간동안 명확하게 '서제'라는 칭호를 선포했었다. 그리고 선태후가 최고권력을 넘겨줄 때는 이미 "진나라가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사기.장의열전). 그리하여 진시황이 나중에 육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주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소양업제"의 역사적 공적은 기실 주로 선태후가 완성한 것이라고.
"미팔자"의 성격
<사기.흉노열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소양왕대, 의거융왕이 선태후와 음란하여(亂) 두 아들을 낳는다. 선태후는 거짓말로 속여서 의거융왕을 감천에서 죽이고, 병력을 일으켜 의거의 잔여세력을 소탕한다." <후한서.서강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왕이 즉위하고, 의거왕이 진나라에 온다. 그리고 소왕의 모친 선태후와 통정하여(通) 두 아들을 낳는다. 왕난(王赧)43년, 선태후는 의거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거병하여 의거를 멸하고, 농서, 북지, 상군을 설치한다." 동시에, 진나라와 의거관계사의 배경을 서술한다: "동주(東周)이래, 중국에 융(戎)은 없었고, 오직 의거(義渠)만 남았다." 그리고 여러번 의가가 진을 침입하고, 의거가 진나라군대를 격패한 전투를 언급한다. 이는 진나라역사에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선태후가 애정으로 상대방이 이민족이라는 신분도 꺼리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과감하게 유인하여 죽이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상대의 생명을 끊고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다. 왕족여사로서 그녀의 성격은 기이하면서도 사나워서 놀람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그녀가 아마도 시집온 시기는 대체로 "위부인(魏夫人)"이 와서 진혜문왕의 왕후가 된 진혜문왕4년(기원전334년)(사기.육국년표)쯤이거나 조금 후일 것이다. "의거왕을 유인살해"한 주난왕 43년(기원전272년)과는 62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즉, 그녀가 최종적으로 '의거일'을 해결한 것은 이미 나이가 팔순에 이르렀을 때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아마도 그녀의 냉정, 기지와 과감함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거왕과 선태후의 '통(通)'과 '난(亂)'은 역사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역사문헌에는 선태후의 다른 사적도 남아 있다. <전국책.진책이> "진선태후가 위추부(魏醜夫)를 사랑하다"라는 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진선태후가 위추부를 사랑했다. 태후가 병이 들어 곧 죽을 때가 되었는데, 영을 내려 말하기를, "나를 장사지낼 때, 반드시 위자(魏子, 위추부)를 순장시켜라." 위추부는 깊이 우려했다. 용예(庸芮)가 그를 위하여 태후에게 권유하여 말한다: "죽은 사람이 지각이 있습니까?" 태후가 말한다: "없다". 용예가 말한다: "만일 태후의 신령이 죽은 자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왜 헛되이 살아서 사랑한 사람을 지각이 없는 죽은 사람을 위해 묻는단 말입니까. 만일 죽은 자도 지각이 있다면, 선왕이 분노한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선왕을 위로하는데도 부족할텐데 어찌 위추부를 신경쓸 여가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태후가 "네 말이 맞다"라고 하고서 포기한다. 선태후는 개인적인 사랑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살아서 사랑한 사람을 죽어서 순장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공공연히 영(令)으로 내려서. 그리고 <한책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가 옹지(雍氏)를 5개월간 포위했다. 한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진나라에 도움을 구했다. 사신이 계속 오고갔다." 그러나, 진나라의 전쟁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나라는 다시 상근(尙靳)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상근은 진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고 합니다. 원컨데 대왕께서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선태후가 그 말을 전해서 듣는다. 그러자 그녀는 말한다: "지금까지 사신이 여러 명 왔었지만, 오직 상근이 하는 말이 옳은 말이구나." 그리하여 그녀가 상근을 불러 만난다. 선태후는 상근에게 말한다: "내가 선왕을 모실 때, 선왕이 다리를 내 몸에 얹어놓으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선왕의 온몸이 내 위에 올라오면 나는 무겁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왜 그랬겠느냐. 그건 나에게도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나라를 도와주려면 병사도 많지 않고, 양식도 많지 않아서, 한나라를 구하기에 부족하다. 한나라의 위기를 구하려면 매일 천금을 써야 한다.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으면 되겠느냐?" 선태후는 섹스로 비유하는 말을 외교협상에서 꺼냈다. 이는 역사기록상 유일무이한 경우일 것이다. 왕사정이 <지북우담>권21에서 한 말이 맞는 것같다: "이런 음란한 말이 여자의 입에서 나와서, 사신의 귀에 들어가고, 역사에 기록되다니 정말 크게 기이한 일이로다."
선태후는 성격에 특별한 모습을 보인다. 확실히 '크게 기이하다(大奇)'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사회분위기가 진나라는 융적과 같은 풍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사기.위세가). 그녀의 출신지는 초나라인데, 마찬가지로 "제후들이 우리를 멀리한다"는 "후미지고 누추한 나라"였다. 진시황이 회계각석에 "방격내외(防隔內外), 금지음일(禁止淫泆), 남녀결성(男女絜誠)"(사기.진시황본기)라고 쓰고 수호지진간(睡虎地秦簡)의 <어서(語書)>에 "거기음피(去其淫避), 제기악속(除其惡俗)"등의 문자를 쓴 것은 초나라의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외에 우리는 모두 한무제가 "무릇 비상한 공(非常之功)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非常之人)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말이 혹은 달리면 천리를 가고, 선비는 속인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공명을 세우는 것이다." 선태후는 아마도 '대기'의 사람이기 때문에, '대기'의 공을 세운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가 정치에서 공명을 세우는 동시에, 그녀가 애정방면에서 '세속의 비난'을 받은 것도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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