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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호해(胡亥)즉위문제: <사기>와 출토자료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

by 중은우시 2022. 8. 17.

글: 난가인(爛柯人)

 

호해즉위건은 이천년동안 안개 속에 쌓여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했다고 보지만, 새로 출토된 자료는 그가 합법적으로 즉위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설중 어느 것이 정확할까? 두 가지 설이 나오게 된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일까?

 

1. <조정서(趙正書)>의 출토와 획기적 발견

 

2003년, 북경대학은 죽간(竹簡)을 기증받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조정서>였다. <조정서>는 이 책의 첫부분 "석자진왕조정출유천하(昔者秦王趙精出遊天下)"에서 나온 것이다. 진, 한 이전의 서적에는 이름을 지은 경우가 드물어, 서적의 첫마디를 가지고 명명하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조정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진(秦), 조(趙)의 조상은 뿌리가 같아 모두 조씨(趙氏)이다. 다만 진나라의 조상 비자(非子)는 주천자(周天子)의 말을 기르는데 공을 세워서 진(秦)의 땅을 봉지로 받고, 영(嬴)성을 하사한다. 고대에 성씨의 변경은 자료가 결핍되어, 사학계에서 아직 모든 사람을 설득시킬만한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사기>는 명확히 기록한다. 진시황의 성은 조라고. <사기.초세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십육년(十六年), 진장양왕졸(秦莊襄王卒), 진왕조정립(秦王趙政立)" 진시황은 정월(正月)에 출생해서, "정(正)"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경대학 전문가의 감정에 따르면, 자체(字體)와 내용으로 보아, <조정서>를 초록(抄錄)한 연대는 한무제후기에서 한소제시기 즉 서한(西漢) 중기로 본다. 그래서 이 책에서 초록된 죽간상의 글은 <사기>와 만들어진 시기가 대체로 비슷하다. <조정서>에서는 진시황과 진이세(秦二世)를 모두 진왕(秦王)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작자는 진(秦)을 정통(正統)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7국중 한 나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작자는 아마도 동방6국의 구귀족이나 그 후예일 것이다. 한문제때, 국가는 이미 진(秦)을 토덕(土德)으로 인정하고, 그 정통지위를 긍정했다. 그래서 이 서적이 만들어진 시기는 서한초기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조정서>는 이미 세상에 나왔다. 다만 사마천은 이 책을 보지 못했다. 

 

<조정서>는 진나라때 진시황의 제5차남순부터 시작하여, 진나라가 망할 때까지의 역사이다. 주로 진시황, 호해, 이사(李斯), 조고(趙高)등의 말을 기록했다. 이 책의 주요목적은 간언을 듣지 않아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진이세 호해의 이미지를 통해 군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진나라역사를 연구하는 가장 주요한 근거자료인 <사기>와 비교해보면, <조정서>는 전혀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가장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내용은 진시황은 처음부터 호해를 후임황제로 세울 생각이었으며, 호해는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것처럼 비불발상(秘不發喪)하고 조서를 고친 일이 없다는 것이다.

 

2. 우리는 <조정서>의 기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호해가 황위를 찬탈한 건은 <조정서>가 발견되기 전에, 최초의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은 바로 <사기>였다. <사기>의 기록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 진시황이 임종하기 전에, 호해는 조고와 음모를 꾸며, 이사와 결탁한 후, 유조를 고친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어 공자 부소(扶蘇)와 대장 몽염(蒙恬)을 죽인다. 

 

지금 새로 출토된 <조정서>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진왕 조정은 임종때, 승상 이사를 불러 그에게 당부한다: "나 패왕의 목숨이 다 했다. 그러나 나의 아들은 외롭고 약하다." 진시황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아들을 이사에게 부탁한다. 나중의 유비가 제갈량에게 탁고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군신간에 진정한 마음이 드러난다. 진시황은 더 이상 각박무정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후, 이사와 어사(御史) 풍거질(馮去疾)은 이렇게 아뢴다: "대신들이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으니, 청컨데 호해를 후계자로 세워주십시오". 진왕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조정서>가 출토되면서, 사회에서는 큰 파란이 일어난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진나라역사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다만 북경대학 교수 신더용(辛德勇)을 위시한 사람들은 <조정서>의 기록의 전면 부정한다. 그는 주로 <조정서>의 성격규정에서 출발해서, <조정서>는 소설류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왜 소설이라고 보는가? <한서.예문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소설가라는 무리는 모두 패관(稗官)에서 나왔고, 길거리에서 얘기되는 것, 여기저기서 들은 말로 만든 것이다." 후세의 소설과는 의미가 다르다. 여기의 소설이라는 것은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항간의 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태사공 사마천의 학술적인 수준이나 개인적인 인품으로 볼  떄 그가 본 자료들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견해를 채택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런 견해에는 동의한다. 다만 우리는 <조정서>의 진나라역사연구에서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된다.

 

3. "호해즉위"의 역사기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호해가 즉위한 것은 <사기>의 각 편장의 글을 종합하면, 호해와 이사, 조고가 모의하여 형을 죽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물어봐야 한다. 이런 전설은 어떻게 전해지기 되었는가? 호해와 조고가 음모를 꾸민 것은 비밀리에 한 것이다 마땅히 그들은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만, 다른 군주, 대신들의 언행과는 달리 사관들에 의해 기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황제즉위의 수수께끼사건들은 왕왕 당사자가 일종의 스스로 변명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항간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일부 황위쟁탈전의 사안들 예를 들어, 송태조, 송태종의 부성촉영, 강희4자, 14자황위계승문제는 모두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호해가 어떻게 황위를 얻었든, 즉위후에는 천하에 통일된 내용으로 자신이 즉위한 것의 정당성을 설명했을 것이다. 호남 토자산(兎子山)에서는 간백(簡帛)이 출토된 바 있고, 거기에는 호해의 조서가 있었다. 호해는 자신이 유조에 따라 즉위했다고 적었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부세를 감경하여 새 황제의 선정을 보였다. 우리가 보는 <조정서>는 아마도 호해 스스로 선전한 내용에 따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진이제 호해의 즉위가 불법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농민반란군 진승(陳勝)의 입을 통해서이다. <사기.진섭세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승이 오광에게 말한다: "나는 진이세가 막내아들이고, 부당하게 즉위했다고 들었다. 마땅히 즉위했어야하는 황자는 공자 부소였다." 진섭이 반진의거를 일으키면서 내세운 구호중 하나가 바로 호해는 불법으로 즉위했다는 것이고, 이는 진승이 군중들에게 호소하고 정치투쟁을 진행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것인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다만 반진세력에서는 최소한 이런 견해가 퍼져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유방은 일찌기 태자 유영(劉盈)을 폐위시키고 조왕 유여의(劉如意)를 세울 생각이 있었다. 그때 유생 숙손통(叔孫通)이 이렇게 간언한다: "진나라가 일찌감치 부소를 후계자로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조고가 거짓으로 호해를 세울 수 있었고,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폐하도 직접 보셨을 것입니다." 숙손통은 일찌기 진나라조정에 박사(博士)로 있었다. 그런데, 숙손통은 변통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상을 추측하기 어렵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나라 통치집단내에서 호해가 황위를 찬탈했다는 것에는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고, 주류의 견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사공도 이런 견해의 영향을 깊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볼 수 있는 자료들은 아마도 이런 내용들만이었을 것이다.

 

4. 호해는 도대체 정당하게 즉위한 것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호해가 진시황에 의해서 태자로 세워졌을 가능성은 있을까? 그 대답은 긍정적이다. 그렇다.

 

먼저, 진왕조는 엄격하게 적장자계승제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진나라는 서융(西戎)의 땅에 위치해 있고, 화하(華夏)예법의 영향이 비교적 약했다. 그리고 적장자계승제도 취하지 않아왔다. 국군(國君)을 선택하는데 통일된 기준은 없었고, 그때그때 시세의 흐름에 따라 정했다. 그래서 여불위(呂不韋)가 진시황의 부친 이인(異人)에게 투자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다음으로, 진시황와 아들 부소는 치국사상이 달랐다. 부소는 유가의 덕치를 좋아했지만, 진시황은 법가사상의 굳건한 옹호자였다. 공자부소는 벌을 받아 몽염의 군영으로 갔는데, 이는 부소가 진새황의 갱유때 유생들의 편을 드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호해는 어려서부터 이사에게 법률을 배운다. 그래서 진시황의 입맛에 더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이 동순(東巡)에 나섰을 때, 호해를 데려간다. 고대제왕의 출순은 왕왕 정치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진시황은 육국(六國)의 산천하류에 제사지내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동시에 육국의 백성들을 겁주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정치활동에 그는 20여명의 아들들 중에서 오직 호해만 데리고 갔다. 이는 그가 호해를 후계자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설명한다.

 

동시에, <사기.몽염열전>에는 몽의(蒙毅)가 죽기 전에 호해와 나눈 말도 의심을 품게 만든다. 몽의는 몽염의 동생이다. 진시황은 "몽의를 친근하게 대했으며,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나갔을 때는 참승(驂乘)하고 들어오면 어전(御前)에 있었다." 이를 보면 몽의는 진시황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진시황의 속마음도 비교적 잘 알았을 것이다.

 

호해가 즉위한 후, 조고는 호해의 면전에서 몽씨들에 대한 나쁜 말을 많이 한다. 그리하여 호해는 사자를 시켜 몽의를 만나게 한다. 호해는 몽의에게 이렇게 질책하며 묻는다. 선왕이 나를 태자로 세우려 했는데, 네가 여러번 막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한 것이냐. 몽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전에는 호해의 능력을 몰라봤습니다. 그리고 호해가 단독으로 시황제를 따라 천하를 주유한 것에 감탄한다. 진시황이 그를 태자로 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 귀한 점이라면 몽씨가족은 제(齊)의 땅 출신이다. 아마도 유가의 영향을 깊이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가를 신봉하는 공자 부소와 정치적입장을 같이 했다. 몽의는 진시황의 심복으로서, 진시황이 호해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그러지 말도록 말렸다. 당연히, 이 사료는 진시황이 확실히 호해를 태자로 세울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다만, 임종때의 상황과 필연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진시황이 임종할 때, 도대체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각종 기재는 서로 다르다. 신더용 교수는 "일건사(一件事), 양지필(兩支筆)"이라고 하였다. 사관의 붓과 소설가의 붓은 모두 이 사건을 기술했다. 그들이 기술한 것은 모두 어느 정도의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책의 성격으로 봐서, <사기>는 역사서이고, <조정서>는 소설이다. 그래서 후자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만들어낸 사건을 보면, 은밀성이 있어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정사라 하더라도, 태사공 사마천이라 하더라도, 그저 그중 더 그럴 듯한 것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역사의 진면목을 그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다만, 태사공이 기록한 이 시기의 역사는 역사를 취사선택한 결과이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며, 역사기억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