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남송 오황후(吳皇后): 중국역사상 유일한 금혼(金婚)의 황후

중은우시 2018. 12. 11. 17:07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의 황후 오씨는 개봉 사람으로 북송 송휘종 정화5년(1115년)에 태어났다. 오씨는 13살때 입궁하여 강왕 조구를 모신다. 조구가 등극한 후에는 오씨를 의군부인(義郡夫人)으로 봉하고, 다시 연이어 재인(才人), 완의(婉儀), 귀비(貴妃)로 승격시킨다. 소흥13년(1143년)에는 황후로 책봉한다. 오씨는 남송 송영종 경원3년(1197년)에 사망하니, 향년 83세였고, 시호는 헌성자열황후(憲聖慈烈皇后)이다. 영사릉(永思陵)에 매장된다.


오황후는 일생동안 송고종, 송효종, 송광종, 송녕종의 4황제를 통해서 황후의 자리에(황후, 황태후, 태황태후를 합하여) 55년간 있었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황후의 자리에 가장 오래 앉아 있었던 황후중 한 명이다. 만일 정강2년(1127년), 오씨가 입궁하여 조구를 모신 때로부터 계산하면 조구가 순희14년(1187년) 10월 병사할 때까지 두 사람의 혼인기간은 60년에 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황제와 금혼을 넘긴 황후이기도 하다(금혼은 결혼50주년을 말한다).


오씨는 13살에 입궁한 후 당시 아직 강왕이던 조구를 모신다. 그녀가 황후로 된 것은 아마도 운명적인 것같다. <송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부친 오근(吳近)은 일찌기 기이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속에 그는 작은 정자를 보았는데, 편액에 '시강(侍康)'이라고 쓰여 있었고, 곁에는 작약 한 그루가 있었다. '독방일화(獨放一花)', 그리고 꽃 아래에는 흰 양이 한 마리 있었다. 오근이 깨어나서 느낌이 기이하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해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을미년(양띠해)에 예쁜 오씨를 낳는다. 오씨가 13살이 되어 강왕을 모시게 되자, 오근은 비로소 깨닫는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징조라는 것을.


<송사>에 따르면, 조구가 즉위한 초기 그녀는 "항상 융복(戎服, 갑옷)을 입고 좌우를 모셨다"고 한다. 그녀가 송고종을 따라 사명에 이르렀을 때, 궁정위사들이 환관의 행패에 불만을 품고 돌연 행궁을 포위하고 환관을 주살하며 변란을 일으킨다. 궁안으로 뛰어들어온 사병이 '황제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오씨는 당황하지 않고, 지혜와 담량으로 그들을 속여서 쫓아보낸다. 이렇게 하여 조구는 한번의 겁난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얼마 후, 송고종은 금나라군대를 피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떠돌게 되었는데, 이때 물고기 한 마리가 송고종의 배에 뛰어들었다. 오씨는 말한다: "이는 주인백어(周人白魚, 주무왕의 배에 흰색 물고기와 붉은 색 새가 뛰어들었고, 결국 주나라가 흥기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임)의 길조입니다." 당시 북송은 막 멸망하고, 금나라군대는 대거 남하하며,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송고종과 군신은 할 수 없이 '바다로 들어가서 적을 피했다' 온주 연해에서 4개월여를 표류한다. 앞에는 험악한 파도가 치고, 뒤에는 추격하는 금나라 병사가 있다. 얼마나 궁박했을지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구는 이때 이런 좋은 말을 들으니, 마음 속으로 자연히 기뻐했다. 즉시 그녀를 의군부인으로 봉한다. 월의 땅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그녀를 재인에 봉한다.


그녀는 아름답고 담략이 남다른 것외에 "역사에 밝았고, 글을 잘 썼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모두 알다시피 송나라황제의 문인기질은 아주 농후하다. 조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능문능무(能文能武)'의 오씨는 자연히 그에게 남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총애가 남달랐고, 그녀는 금방 완의로 승진한다. 곧이어 '귀비'까지 오른다.


오씨는 고부간의 관계도 잘 처리했다. 송고종의 모친인 위태후(韋太后)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후, 오씨가 기거를 모신다. 오씨는 그녀의 뜻을 잘 헤아려 잘 모셨고, 금나라에서 힘든 생활을 보낸 위태후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래서 이 며느리를 아주 좋아한다. 사서에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오씨는 일찌기 <고열녀도(古烈女圖)>를 좌중에 두어 귀감으로 삼았다" 동시에 "<시서(詩序)>의 뜻을 취하여" 자신의 후궁거소에 '현지(賢志)'라는 편액을 건다. 이 두 가지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뜻은 깊다. 위태후는 일찌기 '망국의 비'로 금나라에 붙잡혀 가서 적지 않는 고초를 겼는다. 마음 속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열녀도'를 걸어서 뜻을 밝히니, '인욕투생'의 위태후로서는 마음 속으로 많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헌절황후(憲節皇后, 금나라에 의해 북으로 끌려간 조구의 왕비 형씨(邢氏). 하루도 진정 황후에 오른 적은 없다)가 사망한 후, 조정신하들은 여러번 중궁을 세우도록 청했고, 오귀비는 당연히 최우선 고려대상이 된다. 위태후도 '역시 같은 말을 하여' 오귀비를 적극 지지한다. 그리하여 소흥13년(1143년), 오귀비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된다. 그후 오씨집안은 "삼대를 왕에 추존되고, 친척으로 관직에 오른 자가 35명에 이른다"


오씨는 황후의 명을 타고났을 뿐아니라, 그녀는 황후의 '좋은 재목'이기도 했다. 송고종은 망국으로 병란중에 많은 고초를 겪었고, 그래서 심각한 성불능후유증을 남겼다. 그리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아들이 병사한 후, 더 이상 자식을 두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종실 조백종(趙伯琮)을 입궁시켜 양자로 삼고, 이름을 조신(趙愼)으로 고친다. 그리고 장현비(張賢妃)로 하여금 양육하게 했다. 당시 아직 재인이던 오씨도 황제에게 적극적으로 양자 한 명을 기르겠다고 청하다. 그리하여 오씨는 역실 종실인 조백구(趙伯玖)를 양자로 거두고 이름을 조거(趙璩)로 고친다. 나중에 장현비가 불행히도 병사하자, 오씨는 조신까지 함께 거두어 기른다. 오씨는 두 양자를 '친소의 구별없이' 모두 차이없게 기른다. 조신은 공검근민(恭儉勤敏)하고 총혜호학(聰慧好學)하여 황제와 황후가 다 좋아했다. 그리하여 보안군왕(普安郡王)에 봉한다. 오황후는 일찌기 송고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보안은 천일지표(天日之表)이다." 송고종은 조신을 황태자로 세우고 건왕(建王)에 봉하고, 조거를 궁에서 내보내 소흥에 거주하게 한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조신이 송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송고종은 송태종 조광의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송효종이 조신을 즉위시킨 후, 황권은 송태종 일맥에서 다시 송태조 일맥으로 넘어가게 된다.


오황후는 대범함으로 자손들(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의 존경을 받았다. 소흥32년(1162년), 송고종이 조신에게 양위하니, 그가 바로 송효종(宋孝宗)이다. 황제가 된 조신은 친어머니가 아닌 오황후를 아주 존경한다. 존호로 '수성태황후(壽聖太皇后)'를 바쳤을 뿐아니라, 평상시에고 공손했다. 오황후에게 궁중의 예를 다하고, 오황후의 친척들에게도 잘 대해 주었다.


손자대에 이르러 송광종(宋光宗) 조돈(趙惇)이 즉위한다. 그도 이 중량급의 '조모'에 대하여 더욱 존경했다. 그의 증손자대인 송녕종(宋寧宗) 조확(趙擴)은 수시로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오황후는 이렇게 송고종, 송효종, 송광종, 송녕종의 4황제를 거친다. 이들 남송황제들은 모두 마음이 좋은 편이지만, 연약하고 주관이 없었다. 다행히 의지가 강한 여인이 그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송광종이 할머니인 오태후에게 용인지도를 물었을 때, 오태후는 정권교체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 손자가 아주 평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그에게 알려준다: "구신(舊臣)을 숭상하는게 좋다."  그리고 다시, 소희5년(1194년) 정월, 송효종이 신하들을 이끌고 수성황태후에게 생일축하인사를 하러 왔다. 당시 증손자인 가왕(嘉王, 나중의 송녕종 조확)이 옆에서 시립해 있었다. 오태후는 조확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글을 읽는 것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함이다. 강상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녀는 미래의 황위계승자에게 군왕지도를 가르친 것이다.


오태후가 보좌한 이들 몇몇 황제는 모두 아주 재미있다. 하나같이 황제를 하기 싫어했다. 태상황이 되고자 했다. 오태후의 부군인 송고종 조구는 25년간이나 태상황으로 있었다; 송효종은 송고종을 본받아, 역시 5년간 태상황을 지낸다; 그후의 송광종은 송효종과 사이가 계속 좋치 않은데다가, 매일 부인에게 당했다(송광종의 황후 이씨는 역사상 질투심 강하기로 유명한 여인이다). 5년간 황제로 지내다가 싫증이 난다. 소희5년(1194년_ 여름에 송효종이 붕어하자, 송광종은 심신이 모두 지쳐서 돌연 병석에 눕는다. 그는 '황제로 오래 있었고, 오로지 물러나 편안히 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태상황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심지어 부친의 제사에도 병을 핑계로 가지 않는다. 이때 조정은 이미 혼란이 극심했고, 신하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백발이 성성한 팔순을 넘긴 오노태후뿐이었다. 그리하여 재신(宰臣)이 오태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한다. 오태후는 처음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사에 참여하길 원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하루라도 주인이 없을 수는 없다. 강산사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재신이 태황태후에게 당숙종의 이야기끼지 들먹이며 청했다. 오태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선다. 그리햐여 재궁전수렴(梓宮前垂簾)'을 한다. 그후에 송광종의 조서를 읽고, 황자 가왕을 황제로 앉힌다. 다음 날, 그녀는 다시 절차에 따라 가왕의 부인 한씨(韓氏)를 황후에 앉힌다. 그 후에 즉시 수렴청정을 거두고 깨끗하게 이 궁정위기를 해소시킨다. 


조씨집안의 자손들은 정말 무능했다. 남은 이 반벽강산도 제대로 지킬 줄 몰랐다. 그래서 백발이 성성한 노태후가 그것까지 신경써야만 했다.


삼년후, 경원3년(1197년) 십월 태황태후 오씨가 병사하니 향년 83세이다. 그녀는 임종때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특별히 유언을 남긴다.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게 "궁중승중(宮中承重)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북애오월(服哀五月)을 이일역월(以日易月)하도록 한다. 즉 5개월간 애도하는데 하루를 한달로 계산하니, 결국 5일간의 애도기간이다. 그녀의 이런 유언에 숨은 뜻은 그녀의 자손들에게 형식적인 것보다 실질적인 일을 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