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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야율유가(耶律留哥): 한번의 반란으로 3개의 나라를 세우다.

by 중은우시 2018. 11. 25.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유명한 소설가인 남파삼숙(南派三叔)은 <도묘필기(盜墓筆記)>에서 장백산에 "동하국(東夏國)"이 있었고, 신비한 동하국의 "만노왕(萬奴王)"은 12개의 손을 가진 괴물이었다고 적었다. 역사상 동하국은 확실히 존재했었다. 다만, 12개의 손을 가진 동하왕은 소설작가가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며, 동하국의 건립자는 금나라의 장수인 포선만노(浦鮮萬奴)이다. 그가 할거정권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한 거란인이 반금의거를 일으켜 주었기 때문이며, 이 거란인은 바로 "동료(東遼)"정권의 창건자인 야율유가이다.


야율유가는 요나라 종실의 후인이고, 그의 조상은 요나라가 멸망할 때 금나라에 투항했다. 야율유가는 금세종(金世宗) 대정5년(1165년)에 태어났고, 금나라에서 관직에 올랐으며, 북변천호(北邊千戶)의 직위를 받았다.


13세기초, 굴기한 몽골이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의 지휘하에, 매년 남침하여 금군을 연이어 격패시킨다. 금나라의 실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징기스칸은 금나라 경내의 여진인을 계속하여 끌어들이고, 그들을 부추겨서 반금의거를 일으켜, 금나라의 후방을 습격하도록 하여 몽골군대의 군사작전에 호응하게 하였다. 징기스칸의 책동하에 금나라 북부의 임황부(臨潢府)와 태주(泰州)등지의 거란인은 전후로 여러번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모두 금군에 진압당한다.


대안3년(1211년), 야호령(野狐嶺)전투가 발발하고, 몽골과 금나라 양국의 운명을 결정할 이 전투에서 몽골이 대승을 거둔다. 금나라의 정예부대는 크게 피해를 입고, 이후 금나라는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며, 곳곳에서 공격을 당해서 얻어맞았다.


금나라황제는 거란인이 몽골인들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거란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 "요민(遼民) 1호를 여진 2호가 협거(夾居)하며 방비하게 했다." 금나라의 이런 조치는 거란인의 불만을 산다. 그리하여 야율유가는 '불안해하고' 반금의거를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다.


숭경원년(1212년), 야호령전투가 끝난 다음 해, 야율유가는 융안(隆安, 지금의 길림성 농안), 한주(韓州, 지금의 길림성 이수)일대로 달려가, "장병을 규합하여 그 땅알 약탈하며" 정식으로 금나라에 반기를 든다.


금나라는 군대를 보내어 소탕하려 하나, 야율유가는 한편으로 싸우며 다른 한편으로 도망쳤다. 그러면서 다른 반금 거란반란군과 회합한다. 당시 금나라 북부의 거란인은 오랫동안 변방수비와 양마등 힘든 요역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 왔고,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 예를 들어, 금세종때, 몽골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로 거란인을 동원하여 계호(界壕)를 쌓았다. 금장종(金章宗)때는 다시 수만의 거란인들로 하여금 계호와 변보(邊堡)를 쌓도록 한다. 금나라 북방의 여진인들은 부담이 심해 아주 힘들어 했었고, 속속 야율유가에 호응한다. 짧은 몇 달만에 부대는 수십만으로 늘어나고, 야율유가는 원수(元帥)로 추대된다.


이번 거란인의 반란은 비록 규모가 컸지만, 야율유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만으로는 금나라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몽골에 귀부(歸附)하여 비호를 받고자 한다. 도중에 요동을 공격하는 몽골군을 만나게 되는데, 야율유가는 몽골장수 안진나연(按陳那衍)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거란군이다. 몽골에 투항하려 한다. 그런데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지쳐서 이곳에 머물고 있다." 안진나연은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야율유가는 부대를 이끌고 안진나연과 금산(金山)에서 만난다. 그리고 백마, 백우를 죽여 높은 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화살을 꺽어 맹세한다."


야율유가는 거란군과 몽골군의 결맹을 맺은 후, 안진나연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로 돌아가며, 말한다: "나는 돌아가서 아뢰겠다. 동북을 정복하는 책임은 이제 너에게 있다."


정우원년(1213년), 금나라황제는 장수 호사(胡沙)를 보내어 60만대군을 이끌고 야율유가를 정벌하러 떠난다. 말로는 백만대군이라 하였다. "야율유가의 뼈 1냥을 가져오면 금 1냥을 주고, 살 1냥을 가져오면 은 1냥을 주겠다. 그리고 천호(千戶)세습하게 하겠다." 야율유가는 스스로 중과부적이어서 금군을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동맹인 몽골의 지원을 요청한다.


징기스칸은 급히 "안진(按陳), 발도환(孛都歡), 아로도한(阿魯都罕)으로 하여금 천기(千騎)를 이끌고 야율유가와 회합하여, 금나라군대와 적길뇌아(迪吉腦兒)에서 대진하게 하였다." 원군을 얻은 야율유가는 용기 백배하여, 조카 야율안노(耶律安奴)를 선봉장으로 보내어, 호사의 군대를 가로로 돌진하게 하여, 금군을 대패시킨다. 그 후에 포로와 획득한 물자를 징기스칸에게 바친다. 이를 군대를 보내 도와준 보답으로 삼은 것이다.


그해 삼월, 사람들은 야율유가를 '왕'으로 추대한다. 그리고 처인 요리씨(姚里氏)를 비(妃)로 세운다. 파사(坡沙), 승가노(僧家奴), 야적(耶的), 이가노(李家奴)등을 승상, 원수, 상서, 통고여저발행원수부사(統古與著拔行元帥府事)로 삼고, 국호를 요라 한다. 역사에서 "동료(東遼)"라 부르는 나라이다.


금나라황제 선종(宣宗)은 사자 청구(靑狗)를 보내어 야율유가에게 투항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름이 청구라는 이 사자는 심시도세(審時度勢)후 거꾸로 야율유가에게 투항한다.


금선종은 대노하여, 선무사(宣撫使) 포선만노로 하여금 40만대군을 이끌고 다시 야율유가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야율유가는 귀인현(歸仁縣) 북하(北河)에게 격패시킨다. 포선만노는 패잔병을 이끌고 동경(東京, 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도망친다. 정우2년(1214년), 금선종은 변경(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천도하고, 정우3년(1215년) 오월, 중도(中都)는 몽골군에 점령당한다.


포선만노는 금나라의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고, 그해 십월, "천왕(天王)을 참칭하며,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한다." 다음 해, 포선만노는 몽골에 투항한다. "그의 아들 첩가(帖哥)를 몽골조정에 인질로 보내나,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동하'라 칭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 <도묘필기>에 언급된 그 건축대가 왕장해(王藏海)를 붙잡아와서, '운정천궁(雲頂天宮)'을 만들도록 한 '동하국'이고, 포선만노는 바로 제1대 '만노왕'이다.


역사상의 '동하국'은 그저 인구가 적은 소규모정권이고, 겨우 19년간 존속하다가, 몽골군에 멸망당한다. 포선만노도 몽골인에게 포로로 잡혀,규모가 거대한 운정천궁같은 것을 지을만한 능력과 시간이 없었다. 천궁과 열두개의 손을 가진 만노왕은 모두 소설작가가 필요에 따라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니, 진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포선만노를 격패시킨 후, 요동의 금나라 관리들은 속속 투항한다. 그리하여 야율유가는 '요동이 주군을 모조리 갖고, 함평(咸平)을 수도로 삼고, 중경(中京)이라고 불렀다." 금선종은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좌부원수(左副元帥) 이랄도(移剌都)로 하여금 10만을 이끌고 야율유가를 공격하게 하나, 다시패배한다.


1215년, 야율유가는 동경을 점령하고, 부하들이 황제를 칭하자고 권하나 거절한다. 같은 해 십일월, 야율유가는 몽골로 가서 징기스칸을 배알하고 요왕(遼王)에 봉해진다.


이어진 몇년동안, 야율유가의 부하 몇멍은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나 차례로 평정된다. 그중 1명은 야율시불(耶律厮不)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후료(後遼)"정권까지 세운다. 그러나, 겨우 3년간 존속하다가 야율유가에 의해 소멸된다. 1220년, 야율유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전설적인 일생은 끝이 난다.


야율유가가 반금의거를 일으키며, 직접 '동료'정권을 건립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야율시불의 '후료'정권과 포선만노의 '동하'정권까지 탄생시킨다. 이렇게 한번의 의거로 3개의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중국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경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