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만풍모우(晩風暮雨)
정강2년(1127년),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며, 북송이 멸망한다. 역사에서 "정강지변"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송휘종의 적자중에서 유일하게 북으로 끌려가지 않은 강왕(康王) 조구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민심에 맞고, 명정언순(名正言順)하다. 그래서 등극과정이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 의외사건이 링러난다. 한 종실이 6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황제의 보좌를 차지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 종실은 누구였을까? 그는 마지막에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금군이 동경(개봉성)에서 철수하기 전에, 태재(太宰) 장방창(張邦昌)을 황제로 앉히고 대초(大楚)정권을 허수아비정권으로 건립해둔다. 그러나 장방창은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고, 송철종의 폐후 맹씨(원우황후, 나중의 융유태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고, 사람을 보내어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강왕 조구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동시에 맹씨는 조카 맹충후(孟忠厚)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강왕에게 가서 황위에 오를 것을 권하게 한다.
강왕 "대원수부(大元帥府)"의 왕백언(汪伯彦), 황잠선(黃潛善), 종택(宗澤), 경남중(耿南仲)등도 속속 황위에 오를 것을 권한다. 나중에 중흥4장(中興四將)중 하나로 불리는 장준(張俊)도 강왕이 즉시 등극하기를 청한다.
강왕 조구는 "자리를 피하고 오열하고(避席嗚咽),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掩面流涕), 사양하며 받지 않으려 한다(辭遜不受)" 여러번 사양한다. 결국 남경응천부(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황위에 오른다.
정강지변때, 동경성내에 남아 있던 송나라 종실은 모조리 금나라군대에 일망타진되어 북으로 끌려간다. 종실구성원은 비록 원기가 크게 상했지만, 그래도 황위를 계승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많이 있었다. 그저 강왕 한 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금나라에 끌려간 종실구성원은 기본적으로 모두 송태종의 자손들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부분의 송태종 자손은 지방에서 관직을 맡고 있어 운좋게 이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송태종의 6대손 조불시(趙不試)가 있다. 당시 그는 상주지주(相州知州)였고, 건염2년 상주성을 3개월여간 사수했다. 성이 함락된 후, 일가족이 우물에 몸을 던져 사망한다.
같은 송태종의 후손으로 조사뇨(趙士㒟)가 있다. 당시 나이 44살이다. 배분으로 따지면, 강왕의 숙부뻘이다. 그는 충주방어사, 정주관찰사등의 직위를 지냈고, 풍부한 정치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관직에 있는 동안 평판이 아주 좋았고, 현명한 것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그는 강왕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다. 다만 조사뇨는 강왕과 황위를 다투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강왕이 대통을 잇는 것을 지지한다.
제1차 소흥화의(紹興和議)후, 조사뇨는 명을 받들어 북송황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 도중에 악가군의 주둔지인 악주(鄂州, 지금의 호북성 무창)를 지난다. 악비가 군대를 잘 훈련시켜서 악가군이 강인하고 기율이 엄격한 것을 보고는 송나라가 의지할 강력한 군대로 본다. 악비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후, 조사뇨는 일가족 100명이 목숨을 담보로 악비의 무죄를 보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송고종과 진회에 의하여 관직에서 파면된다. 최종적으로 악비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다. 송고종이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보고서, 조사뇨는 당시 그의 등극을 지지했던 것을 후회했을까?
야심이 없던 조사뇨와는 달리, 위왕(魏王) 조정미(趙廷美)의 후손인 조숙향(趙叔向)은 황위를 노릴 생각이 있었다. 조숙향은 일찌기 금군에게 동경성안에 포위되어 있을 때, 외성이 함락되자, 기회를 봐서 탈출한다. 경서북로일대로 도망가서, 몇달동안 7천의 병마를 모집한다. 그 후에 이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구원하러 온다. 아쉽게도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금군이 철수한 후였다.
병마를 이끌고 옛도성이 진입한 조숙향은 황위를 노릴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강왕은 원우황후, 장방창, 그리고 왕연(王淵), 장준, 유광세(劉光世)등 장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강왕의 '대원수부'는 병마가 수만명이다. 수량이 조숙향의 몇 배에 달했다. 양자는 같은 체급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숙항은 강왕의 등극을 막을 수가 없었고, 강왕과 싸울 수도 없었다. 잠시 꾸었던 황제의 꿈은 이렇게 사라진다.
조숙향은 신조정에 귀의할 생각을 가졌으나, 병마를 조정에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린 다음에 병마을 이끌고 종택(宗澤)에게 간다. 모사 진열(陳烈)은 이렇게 건의한다: "대왕이 만일 조정에 귀의하면, 병마를 조정에 내놓아야 합니다. 아니면,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가서 이성(송휘종,송흠종)을 맞이하십시오."
조숙향은 여러가지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병력을 이끌고 조정에 귀의하기로 결정한다. 송고종은 그에게 상을 내린다. 나중에 조숙향의 부장 우환(于渙)은 조숙향이 반란을 기도한다고 고발하고, 송고종은 유광세를 보내어 체포한 후 주살한다.
조숙향은 재주와 학문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긍계록>4권을 편찬했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만 그가 작자인지에 대하여 논쟁이 있다)
또 다른 종실은 송태조의 6대손 조사숭(趙士崧)이다. 당시 회녕지부(淮寧知府, 지금의 하남성 회양)로 있었다. 그는 황제를 송태종의 후손이 계속하여 맡아온 것에 불만이 있었다. 원래 송나라는 송태조가 창업했는데, 송태종의 후손이 백여년간 황제로 있었다. 충분히 오래 했다고 여기고, 이제는 천하가 대란에 빠졌으니, 대송의 강산은 다시 송태조의 후손에게 넘어와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문인 부량(傅亮)등과 피를 뽑아 맹세한다. 그리고 격문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예조조방천령(藝祖造邦千齡), 이부경운(而符景運); 황천우송(皇天佑宋), 육엽이생묘궁(六葉而生眇躬)"
격문의 '예조'는 송태조를 가리킨다. '묘궁'은 황제,황후가 스스로를 겸손하게 일컸는 말이다. 조사숭은 공공연히 계승자의 신분을 자처한다. 이를 보면 그에게는 황위를 노릴 야심이 충만했다.
금방 조사숭은 강왕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겨우 회녕부 하나의 실력만으로는 그와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강왕을 지지하고, 그의 처제인 진량한(陳良翰)을 보내어 글을 올려 황위에 오를 것을 청한다. 강왕 조구가 등극한 후, 조사숭에 대하여 역시 상을 내리고, 연강전학사, 진강지부의 직을 수여한다.
조사숭은 어영통제(御營統制) 신도종(辛道宗)과 악연이 있었다. 신도종은 조사숭이 당시에 반포했던 격문을 찾아내어 황제에게 바친다. 송고종은 그것을 읽고 대노한다. 그리하여 조사숭은 선주단련부사로 강등시키고, 남웅주로 유배보낸다. 소흥2년에는 사면하고, 집영전 수찬의 직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조사숭은 이미 유배지에서 죽은 후였다.
강왕이 등극하는데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순조로웠다. 강왕은 즉위후에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바꾼다. 묘호는 고종으로 하니 남송의 초대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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