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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사방득(謝枋得): 문천상(文天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애국지사

by 중은우시 2019. 1. 10.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겨울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각지의 매화는 눈과 함께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으며,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쓰친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매화를 읊은 시를 마음 속에서 끄집어 내어 매화향을 맡으며 음송한다. 이렇게 매화향과 눈이 있는 광경은 낭만적인 색채를 더해주고 있다.


매화를 읊은 시는 많고,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화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읊은 시로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남송의 사방득이 쓴 그 <무이산중(武夷山中)>이다. 전체 시는 다음과 같다:


십년무몽득환가(十年無夢得還家)

독립청봉야수애(獨立靑峰野水涯)

천지적요산우헐(天地寂寥山雨歇)

기생수득도매화(幾生修得到梅花)


십년동안 꿈속에서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산속의 물가에 혼자서 서있네

하늘과 땅은 적막하고 내리던 비도 그쳤는데

몇번을 다시 태어나야 매화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시는 남송(南宋)이 멸망한 후, 사방득이 무이산으로 도망쳤을 때 지은 것이다. 나라가 망한 애통함을 잊을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산하는 적의 손에 들어갔다. 항거하던 움직임도 이미 사라졌다. 시인은 천지간의 고독과 처량함과 의지할 데없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추운 겨울에도 눈과 얼음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를 보면서 스스로를 격려한다. 영원히 민족절개를 지킬 것과 절대로 원나라에 무릎꿇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히는 것이다.


사방득은 자가 군직(君直)이고, 호가 첩산(疊山)이다. 강서 익양(弋陽) 사람이며, 남송의 문학가이다. 문천상과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했고, 강서초유사(江西招諭使) 신주지주(信州知州)의 관직에 있었다. 원나라군대가 침범해 들어을 때 패전하여 성이 함락된다. 건녕 당석산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건양으로 옮겨가서 살며 점을 쳐주고 글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남송이 망한 후에는 민중(복건중부)에 우거했다. 원나라에서 여러번 관직을 내렸지만, 그는 절대 받지 않았다. 마침내 강제로 대도로 끌려갔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절식하여 굶어죽는다. 문인들은 사적으로 시호를 지어주는데 문절(文節)이라 했다.


그는 소동파의 충실한 팬이었다.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계상청산삽백첩(溪上靑山三百疊)"이라는 싯구를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첩산'으로 짓는다. 이름에 나오는 "방(枋)"은 음이 여러가지인데, 필자는 지금까지 "병"으로 읽었다. 그러나 "방"으로 읽는 사람도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 사방득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 <잠부음(蠶婦吟)>의 시는 아마 여러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규제철사경시(子規啼徹四更時)

기시잠조파엽희(起視蠶稠怕葉稀)

불신루두양류월(不信樓頭楊柳月)

옥인가무미증귀(玉人歌舞未曾歸)


두견새가 애닯게 울어대는 사경의 한밤중에

잠부(누에기르는 부인)는 잠에서 깨어 누에는 많은데 잎은 적을까봐 걱정한다.

그런데 멀리 누각에서는 아직도 노랫소리가 들려오네,

옥인은 아직도 노래하고 춤추면서 집으로 돌아가 잠들지 못했단 말인가


맞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이다. 많은 선본과 시집에는 이 시가 실려 있다. 잠부와 옥인을 대비하여 노동인민의 힘든 삶과 동시에 봉건통치자의 황음부패한 생활을 대비시킨 작품이다. 잠부와 옥인은 둘 다 밤에 잠들지 못하지만 이유는 전혀 다르다.


<송사>의 열전기록에 따르면, 사방득은 사람됨이 호방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한꺼번에 다섯줄씩 읽어내렸다. 그리고 한번 읽으면 평생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직설적으로 했다.


사방득은 재주가 출중하고, 생각이 넓었으며 학식이 많았다. 그와 문천상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했고, 예부회시(會試)때 사방득이 1등을 하고, 문천상은 5등을 했다. 그러나 전시(殿試)때 그는 시험문제에 답하면서 솔직하게 당금 조정의 폐해를 드러냈다: '백성은 가난하고, 병력은 약하고, 재물은 모자라고, 사대부는 부끄럼을 모른다" 그리고 당금의 형세는 '권력을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망치니, 반드시 조씨를 망하게 할 것이다(必亡趙氏)."


이처럼 대담하게 직언한 것은 정말 석파천경(石破天驚)이다. 분명히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송이종은 그래도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파격적으로 그를 '2갑제1명'으로 뽑는다. 그리고 문천상은 장원에 이름을 올린다. 같은 해의 진사 중에는 육수부(陸秀夫)도 있는데, 이 3명은 모두 충용영렬(忠勇英烈)이다. 마지막에는 모두 살신성인했고 ,나라를 위하여 순국한다. 그들은 남경의 석양이 질 때 마지막 빛이었다.


이어서 사방득은 업무를 분배받을 때도 좋은 곳으로 배치받지 못한다. 겨우 호적, 부세를 관장하는 '사호참군(司戶參軍)'이 된다. 그리하여 화가 난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계속 글을 읽는다.


몽골이 침입하면서 그는 강서선무사로 있던 오잠이 선무사내의 사무를 주관하는 중요관직인 '간판공사(干辦公事)'를 맡긴다. 사방득은 부임한 후 현지의 병사와 백성들과 단결하여 강서 동북에 위치한 요주, 신주, 무주를 방어했다. 그는 자신의 돈을 내서 백성과 병사들에게 물자를 공급했다.


당시 가사도(賈似道)의 권세가 천하를 뒤흔들 때였는데, 사방득은 그것을 그냥 보고넘기지 못했다. 그가 경성에서 시험관을 맡았을 때 가사도의 정사를 문제로 내며 시험생들에게 제목을 낸다: "권력을 가진 간신이 나라를 망치면, 적군이 반드시 오고,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그리고 가사도가 "정권을 훔치고, 충신과 양신을 해치며,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이는 당연히 가사도에게 밉보이는 짓이었고, 결국 삭탈관직되어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방득은 비록 관직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천하에 있었다. 그는 친구인 문천상과 간담상조하는 동지이자 전우였다. 사방득은 문천상과 맹약한 바 있다: "재상은 조정에서 노력하고, 우리는 재야에서 노력하겠다." 그는 혼자서 적의 군영으로 가서 이미 투항한 여문환(呂文煥)에게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백성을 모아서 신주를 지킨다. 성이 함락된 후에는 이름을 숨기고 건녕 당석산에 은거한다. "낮에는 베로 만든 옷을 입고 신발을 끌며, 동향에서 곡을 한다. 사람들은 그를 모르고, 미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는 건양으로 가서 시장에서 점을 봐주었는데, 점을 봐준 댓가는 쌀로 받았고 ,돈을 내면 극력 받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이 점점 그를 알게 되면서, 집으로 모셔서 자제들의 학문을 논하게 한다. 천하가 안정된 후에는 민중(복건중부)로 가서 정착한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대유학자가 산중에서 통곡하며 옛 왕조를 그리워하니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생계를 위하여 점을 봐주면서 죽어라 몽골인들의 정권에서는 관직을 받지 않았다. 이때 그의 부인 이씨는 자녀와 조카를 데리고 그리고 사방득의 두 동생과 함께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초목을 채집하며 먹는다. 이렇게 야인같은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모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사방득과 같이 굽힐 줄 모르는 애국지사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부인과 같언 건괵영웅, 여중호걸의 대공무사한 정기와 대무외의 헌신정신을 보면 자연스럽게 존경하게 된다. 그녀는 정사에 이름이 올라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사방득부부처럼 함께 <이십오사>에 이름을 올린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일가족이 충신인 사방득은 중화민족의 영광이자 자랑이다.


삼월잔화낙갱개(三月殘花落更開)

소첨일일연비래(小檐日日燕飛來)

자규야반유제혈(子規夜半猶啼血)

불신동풍환불회(不信東風喚不回)


삼월이라 남은 꽃이 다 떨어지고 다시 새꽃이 피는데

자그마한 처마에는 매일같이 제비가 날아든다.

두견세가 한밤중에 피를 토하며 우는 것은

봄바람이 한번가면 부른다고 다시오지 않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인 왕령(王令)의 <송춘(送春)>시이다. 사방득은 유랑생활때,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는 계몽경전 <중정천가시(重定千家詩)>를 편찬했다. 그는 이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지만,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를 뽑아서, 그가 남송조정에 대하여 여전히 가지고 있는 희망의 끈을 표시하고자 했다.


그의 도망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이것은 은거라는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두보의 시도 그에게는 사치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감시화견루(感時花見漏), 한별조경심(恨別鳥驚心)


그는 일찌기 나라가 망하고 산하도 바뀐 것을 보았고, 친구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천하에 몽골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가니면서 시시때때로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두려워해야 했다.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고, 타향을 떠돌면서 점이나 봐주고 있다. 그리고 원나라조정이 그를 쉽게 놔줄 것같지도 않다. 그는 <경전암도화>라는 시에서 그런 심정을 잘 표현해 놓았다:


심득도원호피진(尋得桃源好避秦)

도홍우시일년춘(桃紅又是一年春)

화비막견수류수(花飛莫遣隨流水)

파유어랑래문진(怕有漁郞來問津)


도화원을 찾아온 것은 진나라를 피하기 위해서다

복숭아꽃이 붉으니 또 한해의 봄이로구나

꽃잎이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게 하지 마라

어부가 나있는 곳을 찾아올까 두렵다


그러나, 사방덕은 어쨌든 들켜버린다. 그의 행적이 들통나자, 누군가 원나라조정에 그를 추천한다. 그는 결단코 사양했지만, 행성승상 망올태(忙兀台)는 그에게 관직을 내리는 글을 내린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복건참정이 억지로 그를 잡아 대도로 보낸다. 대도로 가는 길에, 사방득은 원나라의 곡식을 입에 넣지 않는다. 그저 과일만 먹었다. 옷과 신발은 얇았고, 그렇게 엄동설한에 놓인다.


삭풍이 불면서 만물이 조락했다. 그의 전우인 문천상이 죽은지 이미 8년이 지났다. 사방득은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겨 옛날 문천상이 남쪽을 향해 절하던 곳을 지난다. 원나라관리가 문천상의 죽음을 가지고 그를 겁주는데, 그는 정색을 하고 맞받았다: "예전에 무승상과 집영전에서 같은 과거합격한 진사로 있었다, 이제 다시 그와 함께 할 수 있으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나에게 행운이 아니겠는가."


그는 다시 한번 태화애후 사도청(謝道淸)과 조현(趙顯)이 안장된 곳을 묻고 자칭 '대송유민'으로서 참배하며 통곡한다. 그리고 곡기를 끊는다. 매국노인 유몽염(留夢炎)이 의원을 시켜 약에 쌀을 넣어서 그에게 마시도록 건네게 했다. 사방득은 노하여 말한다: "나는 죽고 싶다. 너는 어찌 나를 살리려 하는 것이냐" 그리고는 약을 땅바닥에 버린다. 이렇게 5일간 곡기를 완전히 끊은 후 그는 사망한다.


문천상은 자가 문산(文山)이고, 사방득은 자가 첩산이다. 두 사람은 같은 강서 출신이고,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했다. 한 명은 조정에 있었고, 한 명은 재야에 있었다. 모두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국궁진췌했다. 두 사람은 간담상조하고, 동시에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몸을 바쳤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들 둘을 합쳐서 "문사이산(文謝二山)"이라고 부른다.


그들 둘은 찬란한 두 개의 별이다. 서로 다른 시공이 교차하는 순간에 역사의 많고 많은 별들 중에서 찬란한 애국의 섬광을 뿌렸다.


아쉬운 점이라면, 지금 사람들이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청조한청(留取丹靑照汗靑)"의 문천상은 알지만, 당년에 그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던 사방득은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그의 시나 글은 말할 것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