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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소중공(蕭仲恭): 요나라 천조제의 심복이었다가 금에 투항하여 재상에 오르다.

by 중은우시 2018. 11. 9.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금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거병하여 요나라에 반기를 든 후에, 전쟁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었다. 요나라의 장수들은 속속 부하들을 이끌고 금나라에 투항한다. 금나라는 요나라에서 투항해온 장수들에 대하여 '원래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시킨다". 그리고 "맹안, 모극이라는 이름으로 수령이 부하들을 거느리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을 금나라가 요나라를 치는 선봉대로 만든다. 금나라에 투항하는 추세하에서, 요나라의 장수 1명은 시종 금나라의 투항요구를 거절해왔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 천조제(天祚帝)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천조제의 안전을 보호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러다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에 비로소 금에 투항한다. 그후에는 관운이 형통하여, 재상에까지 올라, 금나라에서 관직에 오른 거란인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얻은 인물이 된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 마지막에는 미녀 1명으로 인해 가파인망(家破人亡)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소중공의 거란이름은 술리자(術里者)이고, 요나라의 귀족이며 혁혁한 가문 출신이다. 부친은 요나라의 중서령(中書令) 소특말(蕭特末)이며, 모친은 요도종(遼道宗)의 세째딸인 월국공주(越國公主)이다.


보대3년(1123년), 소중공은 보국상장군(輔國上將軍)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천조제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친다. 금나라군대는 그 정보를 얻은 후, 줄곧 추적한다. 도중에 호위하던 요나라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호위태보 소중공이 이들을 격패시킴으로써 성공적으로 반란을 평정한다.


보대5년(1125년), 천조제는 서하(西夏)의 동의를 받은 후, 서하로 망명할 생각을 하고, 곽리저박(霍里底泊)까지 도망쳤을 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린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아무런 물자도 조달받지 못하고 있을 때, 소중공은 자신이 가진 음식물과 의복을 모조리 천조제에게 바친다. 그리고 자신은 눈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천조제가 피로에 지치고 추위에 떨자, 소중공은 자신이 눈위에 꿇어앉아 천조제가 기대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준다.


위의 몇 가지 이야기에서 소중공이 천조제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한다. 소중공 일행은 얼마 후 추격해오던 금나라의 완안누실(完顔婁室)의 부대에 따라잡혀서 모조리 포로가 된다. 금태종은 소중공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들어서 특별히 우대하여 예로 대한다. 소중공은 이때부터 금나라에 귀순한다. 요나라 천조제의 심복에서 금나라의 관리가 된 것이다. 소중공의 변신은 무척이나 빨랐다.


천회4년(1126년)초, 금나라의 동로군(東路軍)이 송나라의 수도 동경을 포위한다. 송나라는 급히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종망(完顔宗望)에게 배상금을 내고, 인질을 보내고 삼진(三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화의하자고 한다. 완안종망은 화의조건에 아주 만족하여 북으로 철군한다.


금나라군대가 떠난 후, 송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삼진을 할양하지 않는다. 금태종은 소중공과 조륜(趙倫)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삼진을 내놓으라고 한다. 송나라는 소중공과 금나라의 장수 야율여도(耶律餘睹)가 모두 거란인이며, 금나라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율여도는 이때 금나라의 원수우도감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유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납환으로 밀서를 써서 소중공을 통해 야율여도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소중공은 금나라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송나라에서 주는 서신을 전달하겠다고 말하고, 금나라로 돌아온 후에 즉시 납환밀서를 완안종망에게 내놓는다. 그리하여, 금나라는 다시 한번 대거 남침을 하게 되고,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 북송이 멸망한다.


송나라가 거란장수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책동한 것은 정확한 전략이다. 일단 거란장수들이 거병하면, 금나라군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고, 이는 송나라에 아주 유리하다. 아쉽게도, 송나라는 야율여도에게 반란을 부추기는 것이든, 소중공에게 밀서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든 모두 대상을 잘못 골랐다. 왜냐하면 당시 일부의 거란인은 모두 송나라가 배신하여 '전연지맹'을 어기고 금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한 것이 바로 요나라가 멸망한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요나라 망국의 원흉중 하나이다. 그래서 송나라에 대하여 뼛속까지 원한이 있었다. 일부 거란인들은 금나라에 투항한 후, 금나라로 하여금 남하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키도록 계속 선동했다. 목적은 바로 요나라의 망국 한을 씻는 것이다. 야율여도와 소중공은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거란인이었따. 송나라가 그들에게 반란을 교사하거나 서신을 보내게 한 것은 호랑이에게 호랑이가죽을 달라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소중공은 금나라에 충성심이 강했다. 그리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는다. 금희종(金熙宗)때, 소중공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의 직위를 받는다. 당시, 금나라종실 완안종경(完顔宗磬)과 완안종간(完顔宗干)은 권력을 쟁탈하기 위하여, 황제의 면전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로 싸웠다. 그러다가 완안종경은 칼을 뽑아들고 완안종간을 찔러간다. 소중공이 소리쳐서 비로소 멈춘다. 중요한 순간에 소중공이 나서서 큰 소리로 완안종경을 저지한 것이다. 완안종경은 보통의 종실이 아니라, 금태종의 장남이었다.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다. 그러나 소중공이 감히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소리쳐서 멈추게 한 것을 보면 확실히 비범한 면이 있다.


얼마 후, 완안종경은 모반죄로 주살되고, 소중공은 궁궐을 잘 경비했다. 이 공으로 그는 은청광록대부가 되고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된다. 나중에는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해지고, 세습맹안이 되며, 평장정사, 동감수국사가 되고, 제왕(濟王)에 봉해진다. 그리고 다시 상서우승상, 태부(太傅), 영삼성사(領三省事)가 되고 조왕(曹王)에 봉해진다. 그리하여 금나라의 거란인 중에서 관직과 작위가 가장 높은 인물이 된다.


소중공의 동생인 소중선(蕭仲宣)은 금나라에 투항한 후에, 순의, 영정, 소의, 무녕 4개 진의 절도사를 지내고, 청렴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워서 칭송했다.


소중공에게는 아들 소공(蕭拱)이 있다. 그도 난자산맹안(蘭子山猛安)이 된다.


소중공은 가족은 금나라황제의 존중을 받아, 금나라에서 가장 혁혁한 거란족가문이 된다. 다만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이 있듯이, 소씨집안은 미녀 한 명때문에 몰락하게 된다.


금희종이 미쳐날뛰면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자, 종실 완안량(完顔亮)이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완안량이 황제에 오른다. 소중공은 연경유수(燕京留守)가 되고 월왕(越王)에 봉해진다. 아들 소공은 예부시랑에 임명된다.


소공의 처도 거란인이고, 이름은 야율택특라(耶律擇特懶)이다. 그녀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이름이 야율미륵(耶律彌勒)이며, 미녀로 널리 소문났다. 그리하여 황제 완안량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완안량은 호색한이고, '천하의 절색을 모조리 처로 삼겠다"는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 적이 있다. 자연히 야율미륵을 가만두지 않았고, 그녀를 자신의 비빈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는 금나라가 아직 북경으로 천도하지 않아서 수도가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였고, 야율미륵은 변경 즉,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지금의 하남성 개봉)에 있었다. 그리하여 완안량은 소공으로 하여금 그녀를 상경까지 호송해오도록 명한다.


소공은 처제인 야율미륵을 호송하면서 연경(지금의 북경)을 지날 때, 당시 연경유수이던 부친 소중공을 만난다. 소중공은 야율미륵의 몸매와 동작을 보고서는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황상은 반드시 소공을 의심해서 죽일 것이라고 여긴다.


여러해동안 관직에 있었던 소중공은 황제의 의심많은 성격을 잘 알았다. 이제 아들이 처녀가 아닌 여자를 황제에게 바치게 되니 분명히 소씨집안에 큰 화가 닥칠 터였다. 그 위에 발생한 일은 역시 소중공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러나, 소중공은 아들이 연경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만다. 당시 나이 61살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으로 받는다.


소공은 야율미륵을 황궁으로 보낸 후, 과연 완안량으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금방 야율미륵은 궁밖으로 쫓겨난다. 그러다가 그녀의 미색을 잊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나중에 그녀를 '유비(柔妃)'로 봉한다.


완안량은 야율미륵이 소공에게 처녀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궁안으로 불러서 엄히 심문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완안량은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그의 예부시랑직을 박탈한다. 소공은 난자산으로 돌아가서 맹안업무만 한다. 소공은 불원천리 처제를 데려다 주었지만, 오히려 좌천당하게 된 것이다.


더욱 불행한 일은 뒤에 일어난다. 소공은 아납(阿納)이라는 사람과 원한이 있었다. 아납은 완안량에게 소공이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한다'고 무고한 것이다. 정륭3년(1158년) 소공은 처형당한다.


소공이 죽은 후, 처인 야율택특라는 완안량에 의하여 비서감문(秘書監文)에게 하사한다. 왜냐하면 비서감문의 처를 완안량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상을 해준 셈이다. 얼마 후, 완안량은 다시 "야율미륵이 부른다는 거짓말로 야율택특라를 궁으로 불러들여 간음한다."  결국 야율택특라도 완안량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소중공의 집안은 이렇게 몰락한다. 가족 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무명지배들이다. 사서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소공이 죽은 후, 숙부인 소중선도 누군가에 의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비난한다'는 무고를 받는다. 그러나 완안량은 "소중선의 조카인 적련아불(迪輦阿不, 소공의 거란이름)이 최근 바방으로 주살되었는데, 그래서 함부로 고발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무고한 사람을 처형한다. 이를 보면 완안량이 소중선은 굳게 믿었던 것같다. 최소한 소공의 일에 연루시키지 않았다. 소중선의 후인도 그 후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는데, 아마도 뛰어난 인물이 없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