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삼국시대 저평가된 4명의 명장

중은우시 2011. 11. 11. 16:10

글: 백마진일(白馬晋一)

 

옛말에 틀린 것이 없다. 장군이 되려는 생각이 없는 병사는 좋은 병사가 아니다. 삼국시대는 전민개병(全民皆兵)의 전쟁시대에 우수한 장수들이 속속 나타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우리는 무장의 실력을 근거로 "일여이조삼전위(一呂二趙三典韋), 사관오마육장비(四關五馬六張飛), 칠허팔황구강(七許八黃九姜)"으로 얘기한다. 심지어 왕쌍(王雙), 문원(文鴛)과 같은 이삼류의 무장들까지도 자주 화제로 오르고 있다. 당연히, 삼국명장들이 천년이후에까지도 사람들에게 얘깃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삼국연의>의 덕이 크다. 그러나, 명장이 구름처럼 많은 삼국시대에 나관중은 다 열거하고 싶어도 힘이 모자랐을 것이다. 일부 실력이 떨어지는 장수들은 독자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그중 명장이면서도 빠진 몇몇 장수들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한다.

 

1. 고순(高順): 장료(張遼)보다 뛰어났던 일류명장

 

고순을 얘기하려면 장료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요진에서 손권의 이빨을 부러뜨린 것으로 유명한 명장은 몇년전까지는 그저 고순의 조수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아직도 그들의 상사인 여포의 서슬이 아직 시퍼랬다.

 

당연히 장료의 윗자리에 있던 고순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배송지의 주석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순은 사람됨이 청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 칠백여명을 이끌고 천명이라고 불렀는데, 갑옷, 투구를 모두 잘 만들어진 것으로 입었다. 공격하는 곳은 모두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함진영(陷陣營)이라고 불렀다."

 

"함진(陷陣) 부대의 뜻은 죽음이 있을 뿐 삶은 생각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나만 있지 적은 없었다(有死無生, 有去無回, 有我無敵)". 군기가 엄밀한 '함진영'은 성격적으로 보면 돌격대와 비슷했다. '함진영'이 강인하였으므로, 명장인 관우, 하후돈도 소규모의 전투에서 모두 고순에게 패하게 된다. 아쉽게도, 고순은 때를 잘 만나지 못했다. 그의 상사인 여포는 경솔한 사람이었다. 고순은 자주 여포에게 권했다: "패가망신한 군주는 수하들 중에 충신과 능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군주가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군의 매번 언행과 거동은 심사숙고없이 나온다. 나중에는 실수라고 한다. 장군은 이런 실수가 너무 많다."

 

그러나, 고순의 충언에 대하여 여포는 전혀 귀에 담아두지 않았다. 나중에 조조와의 싸움에서 전군이 전멸한다. 패배후 포로로 잡힌 세 사람의 명장은 절개가 서로 달랐다. 여포는 삶을 구걸했으나 살지 못했다. 장료는 고민끝에 조조에게 투항한다. 고순은 투항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 아쉽게도, 고순은 여포처럼 가치없는 주군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일류명장은 이렇게 죽어갔다.

 

2.  국의(鞠義): 유실무명(有實無名)의 하북제일명장(河北第一名將)

 

한 사람의 수준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적수를 볼 수 있다. 국의의 적수는 공손찬(公孫贊)이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다. <후한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손)찬은 자주 활을 잘 쏘는 사람들 수십명과 모두 백마를 타고 좌우익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백마의종(白馬義從)'이라고 불렀다. 오환(烏桓)은 서로에게 일러서, 백마장사를 피하였다" 새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오환은 '공손찬의 모양을 그려서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명중하면 만세를 불렀다. 오랑캐들은 이후 멀리 새외로 숨었다" 이를 보면, 공손찬이 이끄는 백마의종은 상당한 규모의 부대였고, 북방의 유목민족부대들도 매우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강대한 오환군단까지도 간담이 서늘하게 하였던 백마장군이 국의에게는 꺽였다. "(원)소는 국의에게 팔백의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계교지전(界橋之戰)이다. 원소의 수석대장 국의는 팔맥의 선봉군을 이끌고 공손찬의 강인한 백마의종의 연이은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이 전투이후 백마의종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사람됨이 강렬하고, 고오(孤傲)했던 그는 결정적인 재난을 맞이한다. 그의 주군인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속으로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격적으로 시기심과 의심이 많았다. 국의와 같이 공이 크고 문무를 모두 갖추고 그에게 아부하지 않는 부하에 대하여 자연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후한서. 원소전>에는 국의의 죄명을 "스스로 공이 있다고 자랑하며 교만하고 법도를 따르지 않았다. 원소가 그를 불러서 죽였고, 그의 부하들을 병합시켰다." 이를 보면, 공손찬을 물리치는 일이 거의 완성되자, 원소는 국의라는 공이 큰 공신을 유인하여 죽여버린 것이다.(삼국연의에서 쓴 것처럼 조자룡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

 

3. 전예(田豫): 황숙이 손을 잡고 이별했던 겸손한 고수

 

전에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 일찌기 공손찬의 아래에 있을 때, 유비가 그를 아주 높이 보았다(유비도 당시에는 공손찬의 문하에 있었다). 나중에 모친이 연로하여 전예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다. 유비는 눈물콧물을 흘리며 그와 이별한다: "그대와 함께 대업을 건립할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다."

 

공손찬이 원소에 패배한 후, 전예는 부하를 이끌고 조조에 투항한다. 나중에 조조의 아들 조창(曹彰)을 따라 오환(烏丸)을 토벌하러 간다. 때마침 적군의 매복과 기병의 급습에 당해서 조창의 부대가 혼란에 빠진다. 전예는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형을 살펴, 전차로 원형진을 구성한 후, 궁노수들에게 활을 당기고 그 안에서 지키게 한다. 오랑캐는 이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결국 흩어진다. 대군은 이 기새를 틈타서 추격했고, 적을 대파한다. 오환을 원정하는 군사행동중 전예는 조창에게 여러가지 전략을 제공한다. 조창은 그를 아주 높이 평가했고, 조조에 추천한다. 그리하여 그는 유주자사(幽州刺史)의 직을 맡는다.

 

전예는 위나라의 북방을 지키는 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를 토벌하고, 오환을 토벌하고, 요동을 토벌했다. 전예는 전공이 탁월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유주병사들과 투항해온 북방민족의 병사들을 잘 훈련시켰다. 매년 중앙정부에 정예병사와 군마를 제공했다. 위나라에서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한 곳이었다. 서부전선과 남부전선에서 전투를 한 용맹한 병마는 모두 유주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전예는 성격이 고오(孤傲)하여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에게 내린 하사품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매번 오랑캐가 그에게 선물을 보내면 그는 하나하나 등기하여 국고에 넣었고 사사로이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집은 항상 가난했다. 그는 윗사람들에게 금전을 가져다 주지 못했고, 진급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역사의 공로부에서 그의 이름이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4. 진도(陳到): 조자룡과 나란히 일컬어지던 우상

 

만일 삼국연의가 조자룡의 지위를 끌어올렸다고 한다면, 진도는 삼국연의에서 저평가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촉한집단에서 조자룡과 나란이 일컬어지던 인물이었음에도 나관중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삼국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숙지의 이름은 도이다. 여남 사람이고, 예주에서부터 선주를 따랐고, 명성과 지위는 자주 조운(조자룡)의 바로 다음갔다. 모두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삼국연의를 뒤져보아도 그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유비의 창업초기부터 유비를 떠나지 않았던 군인인 그는 유비의 신임을 충분히 받았다. 제갈량은 형인 제갈근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도가 이끄는 부대는 선제의 부하들 중에서 정예부대이다. 촉국의 상등부대이다." 제갈량의 서신에서 말하는 상등부대는 사실 유비의 정예 어림군인 "백이병(白兵)"이다. 즉, 진도는 유봉의 심복특수부대의 대장인 셈이다. 혹은 최소한 심복특수부대 대장 중 한 명이다(나머지 한 사람은 당연히 조자룡이다)

 

"백이군"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유비가 예주를 다스릴 때, 친히 만든 부대이다. 그때부터, 이 부대는 진도가 지휘했다. "백이병"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하여 사료에 기록은 없다. 군대가 만들어진 후 삼사십년의 시간동안 일부 야사에서만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유비가 효정(亭)에서 패배한 후, 진도는 수백의 백이결사병을 이끌고 수만의 동오추격군의 진격을 막아낸다. 이를 통하여 유비가 백제성으로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패퇴하여 도망치는 유비에 대하여 동오의 추격군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백이병의 용맹과 선전은 역시 괄목상대할 만하다. 이렇게 공로가 현저했기 때문에, 유선의 대에 이르러, 진도는 관직이 영안도독(永安都督), 정서장군(征西將軍), 봉정후(封亭侯)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