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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범수(范睢): 대기만성의 모사

by 중은우시 2012. 1. 17.

작자: 미상

 

진소왕(秦昭王)시기에 위염(魏)은 진소왕을 옹립한 공로에다가 진소왕과 외숙-조카관계라는 점으로, 선태후(宣太后)의 총애를 받아, 대내적으로는 대권을 독점하고, 국정을 통할하며, 일생동안 4번이나 진상(秦相)을 역임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동으로 확장을 주장하고, 적극적이고 신축성있는 외교수단을 이용하여 정면에서 전투를 벌이는 진군과 협조하여, 여러차례 산동의 여러 나라들을 격파했다.

 

진소왕14년, 백기는 진군을 이끌고 한, 위연합군은 이궐에서 격파하고, 24만명을 참수한다. 진소왕23년에는 진국이 연, 삼진(한,위,조)과 결성한 합종동맹에 참가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제나라를 거의 멸망될 뻔했다. 진소왕27년에 진나라군대는 조나라로 진격하여, 대(代)의 땅에 있는 광랑성을 점령한다. 진소왕28년,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등 여러 성을 함락시킨다. 다음 해,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킨다. 진나라는 이 곳에 남군을 설치하고, 초나라는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진을 수도로 삼는다. 그동안 위염은 여러번 계책을 내놓으니, 전적이 휘황했고, 그 위세를 널리 떨쳤다. 그는 그러한 공로로 양후에 봉해진다. 그러나, 제,초 두 강국을 물리친 후, 위염은 권모술수에 빠진다. 진나라의 무력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주력하고, 국가이익을 돌보지 않았다. 한, 위를 넘어 멀리 원정하여, 도읍을 탈취한다. 자신의 봉작을 추가하고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대한다.

 

이때, 위나라에서 온 한 유세객이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 유세객의 이름은 범수이다. 그는 위나라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널리 배우고, 기민하였으며, 계책이 많고 언변이 좋았다. 일찌기 위나라왕의 밑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자금이 없었다. 할 수없이 위나라의 중대부 수가의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수가를 따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나중에 제나라와 통모하여 위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다. 다행히 정안평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고, 몰래 진나라사신 왕계를 따라 진나라로 가서 진소왕을 배알한다. 진소왕을 배알할 때, 범수는 먼저 진소왕에게 진나라가 직면한 형세를 분석해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사방은 모두 수비하기 좋은 요새이다. 북으로 감천이 있는데, 골짜기 입구를 지키면 되고, 남쪽으로 경수,위수의 두 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농서, 파촉이 있고, 왼쪽에는 함곡,효산이 있다. 진나라는 날카로운 병사가 이미 백만에 이르고, 전차가 천승에 이르며, 백성은 순박하고 용맹하여 국가를 위하여 열심히 싸울 수 있다. 국면이 유리할 때는 함곡관을 나서서 싸우고, 형세가 불리하면 함곡관을 지키며 적을 막으면 된다. 진나라는 하눌이 내린 지리적인 우세와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군대에 의존하여, 산동의 여러나라를 통제하고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천하의 패자가 되는 대업도 쉽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지금까지 서쪽에 치우쳐 있어, 패업을 완성할 수 없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진나라의 전략상 실수때문이다. 진상 위염은 군대를 한,위를 넘어 제나라를 치게 했는데, 이것은 크나큰 실책이다. 파견하는 군대가 적으면 제나라에 손실을 가하기는 부족하다. 파견하는 군대가 적으면 천리길을 공급해야 하여, 진나라에 손실이 된다. 만일 가능한 한 적은 인원을 파견하면서 제나라에 손실을 가하게 하려면, 한, 위로 하여금 병력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저 일방적인 생각이다. 정리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동맹의 배신만 초래할 것이다. 일단 동맹관계에 흠이 가면, 한, 위를 지나 제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이는 진나라를 위하여 영토를 넓힐 수도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군대도 잃고 나라도 욕보이게 된다.

 

당금천하에서 한, 위의 두 나라는 중원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어, 천하의 문호이다. 진나라가 동으로 확장하려면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진나라가 제후들에게 칭패하려면, 이전에 받들었던 전통인 '연횡"정책으로 충분하다. 만일 천하를 얻으려면, 이 전략은 중점이 불명확하고,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원교근공'의 전략을 세워야 한다. 즉 거리가 진나라에서 먼 나라들은 끌어들여 교분을 맺고, 거리가 진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들은 역량을 집중하여 공격하여 약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마디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왕의 한 마디가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왕의 한 자가 된다"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동시에 범수는 진소왕에게 '원교근공'전략을 실시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한다: 먼저 이익과 위협의 두 가지 수단을 결합시켜, 한, 위를 통제하고, 이를 통하여 초, 조를 위력으로 복종시키고, 그리고 나서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한다. 그후에 되돌아와서 다시 한, 위를 소멸시킨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성을 하나하나 얻어가고, 땅을 하나하나 얻어가면서 점차 대외적으로 확장하면, 누에가 뽕나무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점차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

 

진소왕은 범수의 말에 크게 감탄한다. 그리하여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아, 공동으로 용병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을 기획한다. 그리고 국가전략을 조정하여, 한, 위양국을 진나라의 동쪽확장의 중점대상으로 삼는다. 소왕39년, 소왕은 범수의 계책에 따라, 병력을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하고, 회를 점령한다. 2년후, 다시 형구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진소왕42년, 범수는 다시 진소왕을 위하여 한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세운다. 먼저 한나라의 인후에 해당하는 영양을 점령하여, 한나라를 3조각으로 나눈다. 한나라는 위기에 처하여 할 수 없이 진나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련의 정복전쟁을 거쳐, 진나라의 국세는 날로 강성해지고, 산동의 여러나라들이 다 두려워했다.

 

범수는 중국역사상 아주 걸출한 정치가, 군사전략가이다. 절대로 보통의 유세객과 다르다. 그는 깊이 알고 있었다. 진나라의 전략에서 혼란을 가져온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권신들이 너무 많고, 왕권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법가학파는 정치영역에서의 "법(法)", "술(術)", "세(勢)"의 삼대요소를 아주 중시한다. 이 삼자가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는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법"이라는 것은 엄격한 법으로 나라를 단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준다; "술"은 권모술수이다. 즉 군왕은 정치수단을 이용하여 정적에 대항하고,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세"는 권위이다. 군왕은 권력을 한몸에 쥐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위신을 지니고 있다. 그래야 신하들을 부릴 수 있고, 만민을 호령할 수 있다. 여기에서 "법"은 치국의 기반이며, "술"은 변통의 수단이고, "세"는 법률이 최종적으로 작용을 발휘하는 근본보장이다. 진나라를 되돌아보면, 상앙의 법이 이미 전국시대 법전의 최고수준을 대표한다. 진나라른 이로 인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진나라왕은 대대로 명군이었다. 당시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군주가 여러 신하를 다스리고, 군림천하하는 권위였다. 그리하여, 범수는 진나라가 "가지가 무성하며 줄기가 약한(枝繁干弱)"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시 진소왕에게 "가지를 쳐서 줄기를 튼튼하게 한다(削枝固干)"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 계책을 통하여 점차 친인척과 고관들의 수중에서 대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군왕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한다. 진소왕은 이 계책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하여 진소왕41년에 양후(위염)의 상인(相印)을 회수하고, 그를 봉지에서 노년을 보내도록 명한다. 그리고 범수를 승상으로 삼고, 응후(應侯)로 봉한다. 곧이어 화양군, 경양군, 고릉군등 권신을 관외로 쫓아낸다. 동시에 선태후를 깊은 궁에 안치시키고 다시는 조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변혁을 통하여, 내부의 숨은 환부를 도려내고, 권력을 진소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의 수중에 집중시켜, 진나라의 정권이 더욱 안정되게 한다.

 

범수가 진나라에 온 후 바친 두 번의 계책은 근본을 튼튼히 했으며, 그 뜻이 아주 깊었다. "삭지고간"은 진나라내부에 착안하여, 권신의 실력을 약화시켰고, 군주제중앙집권을 강화시켜, 진나라가 최종적으로 제후의 분쟁을 끝내고, 천하통일을 완성하도록 유리한 정치적 보장을 제공했다. "원교근공"은 열국의 형세를 감안하여, '문과 무를 병용하고, 제후들을 이간시키며,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하여 먼 곳으로 가며, 하나하나 잠식한다(문무병용, 분화제후, 유근급원, 축개잠식)"는 것은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각 정치세력이 다자간 투쟁을 진행할 때의 중요전략중 하나가 된다. 지금까지도 그 지혜의 빛은 여전히 빛난다. 원나라때 오사도는 <전국책교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이 술책을 써서 제후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