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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곡장성(哭長城)의 여인은 왜 "맹강녀(孟姜女)"인가?

by 중은우시 2012. 3. 10.

글: 정계진(丁啓陣)

 

 

 

맹강녀곡장성의 이야기는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다만, 많은 민간고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도 많은 허구적인 성분이 있다.

 

저명한 학자 고염무(顧炎武), 고힐강(顧頡剛)등의 고증에 따르면, 맹강녀는 바로 <좌전. 양공23년>, <예기.단궁상>, 유향의 <설원>(<입절>, <선설>의 양편에 모두 기록이 있다)과 <열녀전>등의 문헌에 나오는 "기량처(杞梁妻)"라고 한다. 기량은 기식(杞殖)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 여광(呂光, 기원전553년-기원전548년 재위)조의 대부(大夫)로, 거국(國)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들 문헌에는 이미 그의 처가 중도에 영구를 맞이하고, 제나라의 군주에게 남편을 위하여 정식의 제사활동을 치러달라고 요구하며, 시신에 엎드려 곡을 하여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성벽이 무너졌고, 남편의 후사를 다 처리한 후 치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등이 있다. 나중에 다시 그녀가 울어서 산이 무너지고, 남편을 위하여 겨울옷을 보내는 내용등이 추가된다. 당나라때가 되어서는 시인 관휴(貫休)가 다시 이야기의 발생시간과 장소를 진시황때로 옮긴다.

 

진지무도혜사해고(秦之無道兮四海枯)

축장성혜차북호(築長城兮遮北胡)

축인축토일만리(築人築土一萬里)

기량정부제오오(杞梁貞婦啼嗚嗚)

상무부혜중무부(上無父兮中無夫)

하무자혜고부고(下無子兮孤復孤)

일호성붕새색고(一號城崩塞色苦)

재호기량골출토(再號杞梁骨出土)

피혼기백상축귀(疲魂飢魄相逐歸)

맥상소년막상비(陌上少年莫相非)

 

그후 맹강녀 이야기는 진시황이 장성을 쌓고 용사들을 해친 것을 고발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가면 갈수록 우여곡절이 많아지고 생동감이 생겼다. 다만, 당나라이전의 모든 문헌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여주인공은 모두 "기량처"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명이 없었다.

 

"맹강녀"라는 이름은 개략 명(明)나라때부터 시작된다. 이와 동시에, '기량'도 발음이 같은 "범희량(范喜良)" 혹은 "만희량(萬喜良)"으로 바뀐다. 한가지 설명이 있다. 산해관 맹강녀묘(孟姜女廟)에는 아래와 같은 영련(楹聯, 기둥에 거는 대련)이 있다:

 

진왕안재재(秦王安在哉), 만리장성축원(萬里長城築怨),

강녀미망야(姜女未亡也), 천추편석명정(千秋片石銘貞).

 

이것은 남송의 명신 문천상(文天祥)의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영련의 격조에 근거하여, 즉 묘주인에 대한 평가('천추편석'으로 부녀의 정결을 새기는 것)으로 보아, 그 작가가 문천상일수는 없고, 명나라 만력이후의 사람이라고 본다.

 

"맹강녀"라는 이름의 내력에 대하여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한가지는 이렇다. 산동의 어느 마을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맹(孟), 강(姜)의 두 집이 살았다(원래 진나라의 관리들이다). 이들은 공동으로 호로(葫蘆)를 한 그루 길렀다. 나중에 담장 위에 호로가 하나 열렸다. 호로가 다 성숙한 후 두 집안은 톱으로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 한 집에 하나씩 가지려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호로를 열었을 때, 어린 여자아이가 하나 나타났다. 그래서 양가는 공동으로 이 여자아이를 길렀고, 그녀에게 "맹강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떤 설에서는 호로가 아니라 동과(冬瓜)라고도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이렇다. "맹강"은 제나라의 군주와 귀족가문 딸의 통칭이라는 것이다. "맹(孟)"은 형제자매중 첫째라는 뜻이다(맹(孟, 혹은 伯), 중(仲), 숙(叔), 계(季)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라는 뜻이다). 그 의미는 '강씨가족의 장녀'라는 의미이다. 이런 류의 설명의 주요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시경> 모전에 '맹강, 제지장녀(孟姜, 齊之長女)"(맹강은 제나라의 큰 딸이다)라는 밀이 있다는 것이다. 출토문물중에서 춘추시대 제장공 강광의 큰딸 강뢰(姜)과 남편 전환자 무우가 전환자 무우의 부친인 전수무를 위하여 함게 만든 것이 "환자맹강호(桓子孟姜壺)"이다.

 

이 두 가지 설명중 어느 것이 믿을만한가? 당연히 후자이다. 호로 혹은 동과를 잘라서 여자가 나온다는 것은 순전히 민간의 전설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고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가 없다. 다만, 후자에도 한 가지 문제는 있다. 만일 맹강녀가 확실히 제나라의 여자라면, 이 이름은 당나라 이전의 사람이 지어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문헌에 나오는 기량이 춘추시대 제나라 대부이고, 어느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강씨성은 제나라의 대족이다. 미녀가 많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시. 진풍, 위문>에 "기기취처, 필제지강(豈其取妻, 必齊之姜)"이라는 싯구가 있다. 제나라의 대부가 제나라의 강씨성 귀족여자를 처로 맞이한다는 것은 정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만일 명나라때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다면, 이 시대의 이야기는 이미 풍주 가산(지금의 호남성 진시)의 여자인 맹강녀와 진시황간에 원한이 있다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그것과 맞지 않는다.

 

필자는 생각한다. "맹강녀"가 제나라의 모 귀족여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녀가 그저 국적불명의 강씨성의 여자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로 '맹강녀"와 "기량처"가 동일인이라고 증명할 수 없는 때라면, 최소한 명,청이후의 맹강녀이야기에 대한 변화를 발휘하는데 여지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집착하면, 민간고사는 계속 될 수가 없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나는 한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춘추시기, "맹강(녀)"는 이미 제나라여자만 가리키지는 않았다. <시.용풍.상중> 및 <시.정풍.유녀동거>에 나오는 미녀 '맹강'은 모두 제나라여자라고 단언할 수 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용풍>에 강씨성 이외에 과(戈)씨성, 용(庸)씨성에도 미녀가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춘추시대에 "맹강"이라는 것은 미녀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되었고, 제나라에 한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미녀로 폭군에 항거하면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