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려광(楊黎光)
중화민족은 다사다난했던 민족이다. 극단적으로 열악한 환경하에서, 계속 권력의 능멸을 맏고, 빈곤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권력과 재물에 대하여 남다른 인식과 느낌이 있다.
중국사회는 권력을 핵심으로 구축되었다. 권력과 재물은 이상하리만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황제는 지고무상의 권력을 가지고, 전체 국가의 재물을 지배한다. 소위,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의 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그리하여, 권력과 재물에 대한 갈망은 황위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중국의 소위 '영웅'은 사실 모두 황위의 쟁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의 구별은 단지; 어떤 사람은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것은 권력과 재물을 전부 가지려는 것이고, 타인을 황제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은 권력과 재물에 빌붙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해에서 보도중생하려는 부처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민족을 이끌고 고난에서 벗어나려던 모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의 성인과 선철(先哲)들이 사색한 대부분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을 다스리느냐' 혹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다스림 아래에서 생존하느냐'였다. 중국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권력과 재물의 사고방식이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중국인들의 쾌락관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 결정했다.
진나라 말기의 난세는 영웅이 배출된 시대였다. 중국역사상 난세를 맞이할 때마다 영웅이 나온다. 그러므로, '난세영웅' 혹은 '난세효웅'이 고정적인 중국어의 단어가 되어버렸다. 진이세원년(기원전209년)에서 한고조5년(기원전202년)까지 칠년간, 황제가 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황제로 만들고자 하는 '영웅'이 얼마나 많이 배출되었는지 모른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진승, 항우, 유방이다.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세 사회계층에서 왔지만, 모두 최고권력을 획득하여 천하의 재물을 모조리 가지는 것을 인생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황제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 중 유명한 세사람이다.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다. 역사도 하나의 연극이다. 진나라말기의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극적인 요소가 풍부하다. 태사공 사마천의 묘사를 거쳐 생동감넘치고 의미가 무궁무진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사람들로 하여금 웅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혹은 야심의 역사순간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입에 풀칠하던 가난한 소작농 진승; 대대로 초나라장수이고, 살인사건을 저질러 바깥으로 도망다니던 항우; 원래 한량에 놈팽이인 백수청년으로 막 시골의 간부인 사수정장이 된 유방. 그들은 거의 동시에 황제의 꿈을 꾼다. 그리고 차례로 이를 선언하거나 고백한다.
진승의 선언은 가장 격정적이고 선동적이다. 피압박자로서 막다른 골목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장사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으려면 큰 이름을 남겨야 한다.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는가?" 그의 한 마디,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한마디 말로서 중국농민이 오랫동안 압박받은 불만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한마디로 그는 그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원시적인 욕망을 일깨운다. 그이후, 기회만 있으면, 각 호족들은 '경성으로 밀고 들어가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게 된다' 진승의 이 말 한마디는 중국농민의 반란사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항우와 유방의 고백은 각각 진시황의 두 번의 순유와 관련이 있다. 그 때, 그들은 모두 길가에 서있던 구경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순유할 때의 대단한 장관을 보고, 앞과 뒤에서 무리를 이끌고 가는 위풍당당함을 보고는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진시황이 회계로 순유를 갔을 때 절강을 넘게 되었다. 항량과 항우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항우는 말했다. 저 황제의 자리는 우리가 대체할 수 있지 않은가. 말투는 아주 솔직하고 오만했다. 거기에는 황위를 노리는 마음도 드러나고, 눈앞에 보이는 황제 대한 경멸도 드러났다.
유방은 함양에서 요역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진시황의 순유를 본다. 그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요란한 것을 보고는 크게 감탄한다: "아, 대장부라면 당연히 이러해야지." 그의 당시의 표정은 아마도 입에 침을 흘리면서 선망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세 가지 서로 다른 선언과 고백은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신분배경을 보여주고,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운명과 결말을 보여준다. 다만 모두 권력과 재물에 대한 극단적인 갈망을 드러낸다.
반란을 일으키는 농민들 중에는 분명히 뛰어난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진승은 그들중 최초의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대표인물이다. 그는 운명에 도전하는 반란선언, 장신농귀(裝神弄鬼), 요언혹중(妖言惑衆)의 거사수법은 모두 하나의 모델이 되어, 후세에 계속하여 모방하고 복제하는 것이 된다.
진성은 철저한 빈농이다. 고생도 많이 하고 원한도 깊었다. 피곤하여 허리와 등이 아팠고, 밭에서 일하면서 고개를 한번 들고, 허리를 한번 펼때마다, 숨을 한번 쉴 때마다 자신의 생존상황에 실망을 하고, 원한을 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그러자 그 동료는 비웃는다. 너같이 아무 것도 없는 빈농이 무슨 부귀해질 때를 얘기한단 말인가? 미친 것아니냐. 그의 조소를 듣고 진승은 탄식한다: "아, 참새, 제비따위가 어찌 기러기, 고니의 뜻을 알 것인가."
진승은 세 마디의 명언을 후세에 남겼다. 하나는 앞에 얘기한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참새, 제비따위가 어찌 기러기, 고니의 뜻을 알 것인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말자"는 것이다. 앞의 두 개는 널리 알려져 있고, 모두 권력과 재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소위 '홍곡지지(鴻鵠之志, 기러기와 고니의 뜻)"은 실제로 부귀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위에 서려는 것이다. 그 뿐인 것이다. 그러나,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는 것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후의 광경을 예상한 것이고,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승 자신이 행동으로 부정한다. 부귀와 빈천은 결국 서로 다른 인생체험이다. 빈천하면서 부귀를 상상하거나, 부귀하면서 빈천을 상상하거나 그것은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진승은 결국 황제가 되지 못한다. 왕을 칭한 것도 겨우 6개월가량이다. 그는 왕이 된 후에, 진지(陳地)를 수도로 삼는다. 이 때 그와 함께 고용살이하던 고향사람들이 원래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는 약속에 따라 과연 그를 찾아왔다. 그 고향사람들은 직접 왕궁 앞으로 가서, 궁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바로 부른다: "나는 진승을 만나러왔다." 궁문을 지키던 자는 법도를 모르는 자들을 보았다. 궁문이 너희가 마음대로 두드리라고 있는 것인가? 진승이 너희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인가? 당시 하마터면 그들을 묶어버릴 뻔했다. 그래도 그들은 궁안의 진승에게 보고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고향사람도 고집이 있는 자였다.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문밖에서 기다렸다. 진승이 궁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바로 길을 막고 큰 소리로 진승의 이름을 불렀다. 진승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그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함께 자리에 앉아서 궁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 고향사람은 궁안으로 들어가보니 전각이 늘어서있고, 장막이 쳐져 있다.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야 진승 너 이놈 대왕이 되더니 정말 대단해졌구나.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진승도 확실히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러나, 그 고향사람은 너무나 눈치가 없었다. 진승과 만난 후에는 하루종일 궁안에서 오가면서 아무런 예의도 없고, 갈수록 방자해졌다. 게다가 진승이 남의 집 고용살이할 때의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일들까지 여기저기 까발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진승이 아주 난감한 입장이 된다. 하루는, 마침내 한 사람이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여 진승에게 말한다. 당신의 손님은 우매하고 무지하여, 헛소리만 해대어 당신의 명망을 해친다. 즉, 이미 권위에 위협이 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승은 불같이 노하며 그 고향사람을 죽여버린다.
비록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이것은 너무 거칠고 잘못된 방법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진승의 옛친구들은 모두 떠나버린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가까운 사람이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실패에 더욱 다가간다.
성공한 제왕이건 실패한 반란자이건, 사마천은 매 인물을 묘사할 때, 그의 쾌락정도에 주목했다. 혹은 몇 마디 말로, 혹은 글이나 행간에 숨겼지만, 의미심장했다. 우리 후인들이 음미하고 생각할 점이 있다.
부귀를 추구하는 각도에서 보자면, 진승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비록 성공이 지나치게 짧기는 했지만. 그러나, 부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부귀를 얻고 난 후, 진승은 자신의 생명이 빛나는 시간동안 분투의 희열과 성공의 만족을 느꼈다.
거사초기에, 그는 오광(吳廣)과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점을 치러 간다. 점쟁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일은 모두 성공한다. 공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승,오광은 기뻐한다. 이 기뻐했던 것은 분명히 내심에서 나오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후, 대택향을 공격하고, 기(蘄)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질(銍), 찬(酇), 고(苦), 자(柘), 초(譙)를 모두 함락시켰다. 그는 계속 승리했고, 순조롭게 진지(陳地)를 차지한다. 이 기간동안 그는 계속하여 즐거움에 즐거움이 더 했을 것이다. 진지를 차지하기 전에 그는 이리 '수레 육칠백승, 말 천여마리. 병졸 수만명'이 있었다. 가난했던 그가 졸지에 졸부가 된 것이다. 진지를 쉽게 차지한 후, 현지의 호족 명사들이 그의 공덕을 노래하고,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마약이라도 먹은 것같았을 것이다. 이제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얼굴은 땅을 보고, 등은 하늘을 보며 하루종일 일하고, 그저 흙 속에서 먹거리를 파내서 연명하던 소작농이,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두다니, 이것이 바로 꿈에도 그리던 부귀가 아닌가. 그가 즐겁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기뻐서 미쳐죽을만큼 좋았을 것이다.
황제가 되고자 했던 사람으로서는 진승이 실패자이다. 쾌락을 추구했던 사람으로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만일 단순히 이 각도에서만 보자면, 그는 항우보다 성공하였다. 항우는 한번도 진정으로 즐거웠던 적이 없는 것같다. 아마도 그는 아예 즐거움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같다. 진승의 제왕꿈은 가장 먼저 끝이 나고, 역사의 무대는 항우와 유방에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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