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자영(子嬰)의 신분: 진이세(秦二世)의 조카? 형제? 숙부?

중은우시 2010. 5. 3. 22:00

글: 이전원(李殿元)

 

진시황이 죽고, 어린 아들 호해가 황제위를 물려받는다. 그가 바로 진이세이다. 조고는 진이세를 죽이고, 자영을 진왕(秦王)으로 삼는다. 자영은 조고가 권력을 독점하는데 불만을 품고 조고를 주살한다. 유방이 함양에 진입하자, 자영은 투항한다; 항우가 함양에 들어온 후, 자영을 죽인다.

 

자영은 비록 진왕에 겨우 46일간 있었지만, 진나라의 역사상 자영은 역사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영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에 쌓여 있다. 왜냐하면 최초로 자영에 대하여 기록한 <<사기>>에서 자영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3가지로 서로 다르게 적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이세지형자(二世之兄子)"로 기록한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조고가 "입이세지형자공자영위진왕(立二世之兄子公子嬰爲秦王, 진이세의 형의 아들인 공자영을 진왕으로 삼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자영은 진이세의 조카이다.

 

둘째는 "이세형(二世兄)"으로 기록한 것이다. <<사기.육국년표>>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조고반(趙高反), 이세자살(二世自殺). (조)고입이세형자영(高立二世兄子嬰). 자영립(子嬰立), 자살고(刺殺高), 이삼족(夷三族)"(조고가 반란을 일으키니, 이세가 자살한다. 조고는 이세의 형 자영을 세운다. 자영이 왕이된 후, 조고를 죽이고, 삼족을 멸한다). 여기에 따르면, 자영은 진이세의 형이다.

 

셋째는 "시황제(始皇弟)"로 기록한 것이다. <<사기.이사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고는 "자지천불여(自知天弗與), 군신불허(群臣弗許), 내소시황제(乃召始皇弟), 수지새(授之璽)"(스스로 하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여러 신하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진시황의 동생을 불러서 그에게 옥새를 주었다). 여기에 따르면 자영은 진이세의 숙부가 된다.

 

1. 자영이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가지 설중에서 가장 많이 유행하는 것은 '이세지형자'라는 것이다. 동한의 반고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주장을 채택한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사기집해>>에서 이 기록의 차이를 발견하고, <<사기색은>>에서는 "시황제"의 "제"는 오타이고, "시황손(始皇孫)"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영향이 큰, <<사해>>, <<사원>>의 두 저명한 사전에서도 모두 일치하게 자영은 '이세지형자'라고 보았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부소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록 '이세지형자'라고 하는 것이 거의 대세이고 거의 정설로 굳어졌지만,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보면,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연령으로 추산해보면, 자영을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고 보기 힘들다. 만일 자영이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면, 이세의 조카가 되는데, 그가 진시황 장자인 부소의 장자라고 보더라도, 진시황이 겨우 51살까지 살았는데, 18살에 부소를 낳았다고 치고, 부소가 다시 18살에 자영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진시황이 죽었을 때, 자영은 겨우 14살에 불과하다. 호해가 3년간 재위하였고, 자영이 호해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되었을 때, 나이는 겨우 17살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기>>에는 여러 곳에 자영이 조고에 의하여 진왕에 옹립되었을 때, 일찌기 그의 아들과 조고를 주살하는 일을 논의하였다고 나온다.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고가 자영을 진왕으로 옹립하였고, "자영은 그의 아들 두 사람과 모의하여 말하기를..."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기록을 보자면, 자영에게는 아들이 두 명이 있었고, 그 두명도 모두 나이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같이 조고를 주살하는 일을 논의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자영을 진시황의 손자로 보는 것, 즉 이세의 형의 아들로 보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

 

둘째, 사회지위로 보더라도, 자영은 '이세의 형의 아들'일 수가 없다. 만일 자영이 진시황의 손자이고,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면, 앞에서 이미 계산해보았지만, 가장 나이가 많아야 17살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에 명성이 혁혁할 수가 없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조고는 진이세를 살해하고 새로운 임금을 모실 때, "나는 황상을 바꾸려고 하며, 공자영을 세우고자 한다. 자영은 인자하고 검소하며, 백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받든다(百姓皆載其言)" 여기에서 조고의 말에 약간 과장된 점이 있을 수 있고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없이는 '백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받든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자영은 당시 통치계급내에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 저명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문자기록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보더라도, 자영은 '이세 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영이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고 명확히 기록한 것은 <<사기.진시황본기>>의 그 자료 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글자의 전문은 "이세지형자공자영'이다. '자영'은 사람이름인데, '형자공(兄子公)'의 세 글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이 곳의 기록에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사기.육국연표>>에는 조고가 '입이세형자자영"이라고 하여, "이세의 형인 자영"이라고 해석된다. 이것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곳의 '자영'은 인명으로 언급한 것이다. 여기의 '자영'을 분할하여, '이세형의 아들 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문구가 바로 '자영이 세워지고(子嬰立)'이기 때문에, '자영'은 묶어서 하나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이사열전>>에는 '시황제'라고 하고 있는데, <<사기집해>>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책에서는 말하기를, 시황제의 동생 자영을 불러서 옥새를 주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서광이 인용한 "한 책에서는 말하기를'은 바로 또다른 자료에서 '동생'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이를 보면, 문자기록중에 자영이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단 하나 뿐이고, 다른 기록은 모두 이에 부합하지 않아서, 근거로 삼을 수가 없다.

 

이상의 분석으로라면, 자영은 절대로 진시황의 손자가 될 수 없다. 이세의 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만일 부소의 장남일 가능성이 없다면, 다른 형제의 아들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자영을 '이세의 형의 아들'이라고 하는 설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2. 자영은 '이세의 형'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영이 '이세의 형'이라는 설에 대하여, <<사기.육국연표>>에는 '입이세형자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이 자료 하나 뿐이다. 다른 곳에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점만으로는 이 설이 정확하다고 인정하기 불충분하다. 만일 다른 상황도 고려하여 분석한다면, 자영이 '이세의 형'이 되는데에는 문제가 있다.

 

비록 연령상으로 보면, 자영이 '이세의 형'이라면 반드시 23살 이상이어야 한다. 가장 많더라도 30세가량일테니, 아마도 10여세정도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과 조고를 모살하는 일을 협의한다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당시의 정치형세를 본다면, 호해가 정권을 잡은 후에 자신에 반대하는 형제들을 대거 살륙하였다. 이를 보면, 자영이 '이세의 형'이라는 것은 인정되기 힘들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진시황이 재위중일 때,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정통적인 관습대로라면, 장남인 부소가 법정승계인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부소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부소를 바깥으로 내보내어 감군을 하게 시켰다. 그리하여 부소를 법정후계자로 선포하지 못했다. 사구에서 병세가 위독하였을 때, 법정승계인을 반드시 정해야할 때, 비로소, 진시황은 겨우 부소를 법정승계자로 정한다. 그러나, 진시황이 사구에서 급사함에 따라, 조고, 호해, 이사가 진시황의 유조를 고쳐서, 호해를 태자로 삼는 것으로 한다.

 

<<사기.이사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에게는 이십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부소가 장자(長子)이고, 호해는 소자(少子)이다. 그런데, "소자호해"의 조문을 보면, <<사기집해>>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변사는 성명을 감추고, 진나라장수 장한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사는 진왕이 죽고, 십칠형을 폐하고 지금 왕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이세는 진시황의 열여덟째 아들이 된다. 이 글은 <<선문>>에 있다." 배인이 인용한 이 글을 보면, 호해는 진시황의 열여덟째아들이다. 가장 어린 아들이 아닐 수 있다. 그의 위에는 17명의 형이 있다. 만일 배분 순서대로 권력을 잡았다면, 호해에게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음모수단으로 황위를 탈취해야 했다.

 

다만, 호해가 음모적인 수단으로 황제위를 찬탈하자, 그 결과 다른 형제들이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권력투쟁이 가속화한다. 이런 정치형세에 호해는 조고의 말을 믿고 다른 형제들에 대한 대규모의 살륙을 감행한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육공자가 두에서 육사하였다." "공자장려곤제 3명이....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검을 뽑아 자살했다.". <<사기.이사열전>>에는 "공자십이인이 함양시에서 죽임을 당했다"; "공자고...죽었고, 여산에 묻히기를 원했다." 호해에 의하여 살해된 여러 공자는 이미 22명이다. 여기에 부소를 합하면 이미 23명에 이른다. 이 23명중에 호해의 '17명의 형'은 당연히 가장 먼저 포함되었을 것이다. 부소, 장려, 고는 확실히 이름이 남아 있다. 나머지 형들이나 호해보다 어린 공자는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번 도살을 통하여 진시황의 아들, 진이세의 형제 특히 그의 형들은 아마도 모조리 사망하였을 것이다. 진이세가 모조리 제거하였을 것이다.

 

자영이 만일 진이세의 형이라면, 그가 어떻게 도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 특히 <<사기.몽염열전>>에는 명확하게 진이세가 몽씨형제 및 대신을 주살할 때, "자영이 진언하여 간했다: '....충신을 주살하고 절개와 업적이 없는 자들을 세운다면, 안으로는 여러 신하가 믿지 못할 것이고, 밖으로는 전사들의 뜻이 멀어질 것이니, 신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도 평안무사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영을 '이세의 형'이라고 보는 거은 당시 정치형세와 모순되므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3. 자영은 '시황제의 동생'이라는 것은 믿을만 하다.

 

자영의 신세내력에 대한 3가지 설중에서 '이세의 형의 아들'과 '이세의 형'이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두 부정되었따. 남은 것은 단지 '진시황의 동생'이라는 설뿐이다.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이 설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믿을 만하다.

 

비록 자영을 '시황제'라고 한 것은 단지 <<사기.이사열전>>에만 보인다. 그러나 다른 자료와 같이 분석해보면, 큰 모순이 없고 믿을만하다.

 

첫째, 연령으로 봐서, '시황제'라면 비교적 장성한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함께 조고를 주살하는 일을 모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이사열전>>에서는 '자영이 즉위한 후, 병이 들어서 질병을 이유로 정사를 보지 않았다. 환관 한담과 그의 아들은 조고를 모살할 것을 협의했다. 조고가 황상에게 아뢰고 병문안을 하겠다고 하여, 불러들여서, 한담으로 하여금 그를 찔러죽이게 하였고, 삼족을 멸했다." 이것은 이치에도 맞는다. 믿을만하다.

 

둘째, 자영이 진이세에게 진언한 일을 보면, 그는 진이세의 숙부이므로 자연히 몽씨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신하이지만, 어쨌든 배분이 위이다. 그래서 간언하는 말투를 보더라도 그러한 관계와 맞는다. 황위를 노리는 것으로 본다면, 당시에 황제위의 전승은 부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진시황의 동생이라면, 황위쟁탈전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호해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황실의 구성원으로써 진왕조의 장치구안(長治久安)을 위하여 진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다지 큰 모험이 아니다. 비록 진이세가 대신을 죽이고 골육을 멀리하면서, 자신에 반대하는 먼 친척도 죽이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중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거해야하는 것은 그와 황제위를 다툴 사람, 즉 그의 형들인 것이다.

 

셋째, 조고가 진이세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 후, 자영을 끌어내서 왕위에 앉게 하였는데, 이는 자영이 당시 황실내에서 어느 정도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고가 할 수 없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조고가 진이세를 핍박하여 죽게 한 후, 원래 자신이 황제위에 올라 직접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관의 옹호를 받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자영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면서 실권을 장악한다. 자영은 조고의 괴뢰로 남고 싶어하지 않았다. 조고가 전체 통치그룹에서 인심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것도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고를 죽이고, 통치권력을 회수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통치그룹내부에서 인심을 비교적 얻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보면, 자영은 모략이 있고, 담량이 있어, 보통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다. 이는 그의 신세내력과 지위를 보여준다. 진시황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비교적 맞아떨어진다.